545화. 봉인
“이준 오라버니?”
잠시 고민하던 이은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의 처분을 이준에게 맡기겠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이은이 이준에게 결정권을 넘기자, 빙존이 거의 애원하는 듯한 말투로 소리를 쳐댔다.
“빙하곡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앞으로 우리 빙하곡은 절대로 자네와 재난독녀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네!”
이에 이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곡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이준 역시 빙존의 태도가 이렇게 변한 것이 이은의 배후에 고족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은에게 부탁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빙하곡을 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빙하곡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녀의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모르기는 몰라도,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에 이준은 빙하곡과 전쟁을 벌이기보다 아라를 구한 것에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이준의 답변을 들은 빙존자는 곧바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아무리 자존심이 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대에서 빙하곡이 끝장나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오늘 빙하곡으로 인해 꽃잎성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조만간 반드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혹여나 상대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는지, 빙존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아가씨, 오늘의 일은 작은 원한일 뿐이니 고족과의 관계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길 바라오.”
이어지는 빙존의 말에 이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빙존자를 죽이려 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고마워요. 약속은 꼭 지켜주세요.”
곧이어 빙존의 등 뒤에 새카만 균열이 생겨나더니 빙존과 천상 장로가 그 안으로 사라졌다.
빙존 일행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청해의 등 뒤에도 검은 공간 통로가 나타났다. 빙하곡이 이 문제에서 손을 떼기로 한 이상, 혼자서 이준을 붙잡겠다고 남아 있어봐야 목숨만 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막 공간 통로에 발을 들이려는 찰나, 고족의 두 노인이 번개처럼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 노인에게 붙잡히기 무섭게 청해의 염력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꼼짝달싹 못하게 된 청해는 곧바로 바락바락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영혼의 궁전과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것이냐!”
“허허, 영혼의 궁전이 그리 대단한가?”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이준 일행이 허공을 밟고 두 노인에게 붙잡혀 있는 청해에게로 날아왔다.
“네 놈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두 명의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려 예를 갖추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허허, 아가씨의 명령이니 우리 두 늙은이에게 고마울 필요는 없소.”
흑색 옷의 노인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오라버니, 이 자는 어떻게 할까요?”
“봉인 해버리자. 영존쯤 되는 인물을 잃어버리면 제 아무리 영혼의 궁전이라도 타격을 입겠지.”
“나를 봉인 하겠다고? 꿈 깨거라!”
이준의 말에 청해의 얼굴이 순간 사납게 일그러지더니 그의 온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청해의 행동에 이은은 번개처럼 이준을 붙잡은 뒤 뒤쪽으로 몸을 날렸고, 고족의 두 노인의 몸에서는 더욱 거대한 염력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두 투존 강자가 전력을 다해 염력을 봉인하려 했음에도 청해의 몸에서 기이한 붉은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아가씨, 이것은 혼전 놈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자폭법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청해의 자폭을 저지하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자, 두 노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빠르게 뒤로 후퇴했다.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청해의 피부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더니 돌연 폭발적인 에너지가 사방으로 흘러나오며 주위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펑!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벼락같은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해의 몸이 산산이 찢어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거대한 회오리로 변하며 하늘을 집어삼킬 듯 뒤덮었다.
해일처럼 터져 나오는 거대한 에너지에 이준 일행은 황급히 아래로 몸을 날렸고, 거대한 회오리는 온 하늘을 3,4분 정도 휩쓸다 서서히 사라졌다.
“투존 강자가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소. 이번 자폭은 그저 육체를 없앤 것뿐이네. 그의 영혼이 도망가면 영혼의 궁전에서 곧 새 몸을 만들어 낼 것이야.”
천화존자가 고개를 저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 때, 옆에 있던 이은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또 다시 금색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은의 금빛 눈동자가 텅 빈 하늘 위에 멈춰서더니 돌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금색 화염이 치솟아 오르며 허공에 검은 색 균열이 생겨났다.
이은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굽히자, 그 검은 색 균열 안에서 반투명한 영혼체 하나가 끌려 나왔다.
청해의 영혼체는 곧바로 흉악한 얼굴로 이은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그 의 주먹이 금색 화염에 닿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이익!
이은이 또 한 번 손을 휘두르자, 금색 화염이 번개처럼 영혼체의 몸을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악!”
곧이어 청해의 영혼체를 불태우던 금색의 화염이 빠르게 수축하며 손가락만한 크기의 황금색 단약처럼 변했다.
“이준 오라버니, 받아요.”
이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은이 내민 황금색 구슬을 받아들었다. 그 역시 구름 불꽃을 이용해 청해의 영혼을 찾아내려 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공간의 틈 사이에 숨은 영혼체를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은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청해의 영혼체를 찾아내 봉인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장반지 안에서 옥병을 꺼내 든 이준이 청해가 봉인된 구슬을 넣고 손가락으로 옥병 입구를 문지르자, 투명한 화염이 나타났다.
“구름불꽃? 서천우 대장로님이 노발대발 하시지 않았어요?”
그 투명한 화염을 본 이은이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벗어나기 아주 어려웠을 거야.”
“자네가 중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가씨께서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를 끌고 고계를 빠져나와 이곳까지 왔네. 자네에게 아무 일이 없기에 망정이지……. 허허.”
한 편에 서있던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임 장로!”
이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허허,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은의 호통에 백발의 노인은 짓궂게 웃으며 황급히 달아났다.
고계에 있는 내내 이은은 마치 시체처럼 무표정했고, 또 차갑기 짝이 없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을 보자마자 이리 밝은 모습을 보이니, 두 노인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이은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이준의 몸이 갑자기 가볍게 휘청이며 옆으로 기울었다.
천계의 불꽃으로 인해 망가진 몸을 이끌고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이미 가만히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있는데도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현기증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이 쓰러지려는 찰나, 이은과 아라가 동시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아, 괜찮아…….”
이에 이준은 조금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오라버니, 이 분은 누구시죠?”
이준의 오른편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던 이은이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평소의 그것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고, 목소리에서는 싸늘한 느낌이 묻어났다.
“아, 아라라고 내 친구야. 아라야, 이쪽은 이은.”
두 여인의 사이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이준은 곧바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오기 전에 아라 언니의 재난독체가 아주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정말 그러네요. 그 동안 오라버니를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나 역시 이준에게 네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오늘 보니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네. 왜 그렇게 그리워하나 했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두 여자의 말투나 대화 내용은 매우 친근하고 다정했지만, 이준은 왠지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됐다. 이번 일도 끝났으니 모두 우선 좀 쉽시다. 이곳은 담화를 나눌만한 곳도 아니니까요.”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은과 아라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양쪽에서 이준을 부축한 채 꽃잎성 안으로 향했다.
* * *
이준 일행이 유가(家)에 도착하자, 유종길을 비롯한 유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황급히 나와 그를 맞이했다.
중주의 삼대 협곡 중 하나인 빙하곡을 무찌르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이준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는 기대와 선망이 가득했다.
“이준 오라버니, 다들 괜찮아요?”
무사히 돌아온 이준을 발견한 선화가 쪼르륵 달려 나와 물었다.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이은을 선화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이은이라고 해. 들어본 적 있지?”
“네, 비석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이은 선배님이잖아요!”
선화의 말에 이은은 잠시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으응, 그래, 너도 아카데미의 학생이구나.”
“유종길 장로님, 대화를 나눌 장소 좀 마련해주실 수 있을까요?”
수줍어하는 이은의 모습에 이준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허허, 이준 선생이 말하는 건데, 이 정도 쯤이야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그의 말에 유종길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길을 안내했다.
이준은 이은과 아라를 비롯한 일행들을 데리고 천천히 유종길의 뒤를 따랐다.
* * *
유종길은 이준을 유씨 가문 저택의 귀빈실로 안내해 준 뒤 장로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으니, 그를 가만히 쉴 수 있게 하려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사람들이 나가고, 의자에 앉는 순간, 이준의 입에서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이은이 찻잔을 내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님을 구해야지.”
“스승이라면, 약선 선생님을 말하는 거죠?”
“약선?”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흑색 옷의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약존님이 자네의 스승인가?”
“허허……. 약존님의 제자라니, 자네 정말로 운이 좋군.”
또 다른 백발의 노인 역시 웃으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네, 그렇습니다. 제 스승님이 약존이십니다.”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이은을 바라봤다.
“왜 그래?”
“오늘 일로 영혼의 궁전 놈들도 분명 뭔가 대비를 할 거예요. 어쩌면 약선 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모르고…….”
이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영혼의 궁전을 얕봐서는 안 되네. 그들은 우리 고족과 맞먹는 진정한 강자이니까 말이지.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자네의 실력으로는 투존 둘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약존님을 구할 수 없을 걸세.”
백발의 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가씨는 이번에 오래 나와 있을 수 없네. 10일 안에는 돌아가야 하지. 그리고 우리 고족에게 있어 자네의 신분은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있기 전까지는 고족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노인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고족과 자신 사이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준 오라버니, 영혼의 궁전의 힘은 오라버니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요.”
이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