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섬멸
하늘 위에 멈춰 서있던 감태와 영혼의 궁전의 사자들은 청해의 외침을 듣고 잠시 멈칫거리며 망설였다. 지금 이준의 곁에는 투존 강자만 두 명이나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를 죽이란 소리인가?
하지만 청해의 명령을 거절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하지 모르니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준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빙하곡의 장로, 제자들아! 영혼의 궁전을 도와 이준을 잡아라!”
곧이어 천상 장로의 명이 떨어졌고, 빙하곡의 투사들 역시 망설이다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자신의 수하들에게 이준을 공격하라고 명한 두 노인은 곧바로 염력을 폭발시키며 앞뒤에서 흑색 옷의 노인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감태를 비롯한 빙하곡의 장로들 역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이준과 이은을 둘러쌌다.
감태의 실력은 결코 도영호보다 약해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머지 영혼의 궁전의 사자들 역시 투종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준의 상태가 좋을 때라고 해도 결코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준이 그들과 싸울지 고민하던 그때, 곁에 있던 이은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며 가볍게 손가락을 굽혔다. 그러자, 그녀의 가느다란 손에서 액체 같은 금색 화염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그리고 금색 화염이 나타나는 순간, 이준의 체내에 있던 천지의 불꽃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지의 불꽃?”
액체 같은 금색 화염이 이은의 손가락 주위를 서서히 회전하자, 주위의 공간에 구불구불한 새카만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금색 화염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이준의 등 뒤에서는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지의 불꽃이라면 그도 세 개나 가지고 있었지만, 눈앞의 금색 불꽃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화염과도 달랐다.
심지어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청연의 불꽃마저 그 불꽃을 두려워하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청연의 불꽃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라면 이은의 손에 있는 그 금색화염은 절대로 평범한 것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천지의 불꽃 중에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고 자부하는 청연의 불꽃이 두려움에 떨 정도라면, 그녀의 손에 들린 금색 불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지의 불꽃 중에 금색을 띠고 있는 물건이라면 4위인 금제(金帝)의 불꽃과 7위인 저승의 불꽃뿐일 텐데……. 은이가 그런 엄청난 화염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7위인 저승의 불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으나, 4위인 금제의 불꽃이라면 염력마저 불태울 수 있는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 불꽃이었다.
금제의 불꽃이라는 이름은 처음 그 화염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전설에 따르면 그 ‘금제’라는 사람은 투성이 만든 이공간을 잿더미로 만들 정도의 엄청난 강자라고 했다.
이준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감태와 영호들을 비롯한 빙하곡의 투종 강자들이 형형색색의 염력을 내뿜으며 두 사람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이은이 가볍게 손끝을 튕겨 그 위에서 돌고 있던 금빛 화염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은의 손을 떠난 금색 화염은 꽃잎처럼 허공을 나부끼다 얇은 금색의 막으로 변화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쾅!
곧이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무투기들이 그 위로 쏟아졌지만, 금빛 방어막 위에 가벼운 파문만을 만들어 냈을 뿐 두 사람에게는 털끝만큼의 충격조차 주지 못 했다.
순간 영혼의 궁전의 사자들과 빙하곡의 장로들은 모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투존 강자라 해도 이렇게 간단하게 열 명 이상의 투종의 협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젊은 여자는 대체 어느 정도나 강한 것이란 말인가?
그들이 공포에 빠져 떨고 있을 때, 또 다시 이은의 손끝에서 금색 화염이 피어올랐다.
“죽어!”
이은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으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십여 개의 금빛 섬광이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두 사람을 포위하고 있던 투종 강자들을 집어삼켰다.
금색의 화염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감지한 투종 강자들은 곧바로 전력을 다해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방어 무투기를 꺼냈다.
그러나 얼음 속성의 무투기로도, 영혼의 궁전의 검은 염력으로도 그 불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감태를 비롯한 투종들은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흉부를 관통하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자, 그들의 가슴팍에 손가락 반 마디 정도 굵기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다.
감태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앞에 있는 염력 방어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들의 염력 방어막에는 어느새 손가락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화려한 폭발도, 지축을 흔드는 굉음도, 처절한 비명 소리도 없이, 십여 명의 투종 강자들이 하나하나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감태를 포함한 몇 명 정도는 간신히 급소를 피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실력 차가 극명한 상황에서 이은에게 달려든다는 것은 마른 장작을 짊어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상처를 부여잡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감태 일행을 가볍게 무너뜨린 이은은 살짝 입을 벌려 그 공포스러운 금색 화염을 다시 체내로 흡수한 뒤 고개를 돌려 놀란 얼굴을 한 이준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은이 너…….”
십여 명의 투종 강자를 벌레처럼 짓밟아 버리는 이은의 실력 앞에 이준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투종에 이른 뒤 나름대로 실력에 자신감이 생겼지만, 이은의 실력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는 가문의 도움과 혈통의 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니 저 같은 사람 열 명이라도 오라버니와 비교할 수 없어요.”
이은이 이준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이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은은 또 한 번 가볍게 웃음을 지은 뒤 손끝에 금빛 화염을 피워냈다.
그녀가 가느다란 손끝에 피어오른 금빛 꽃잎을 가볍게 불자, 모래처럼 잘게 부서진 금빛 화염이 허공에 흩날리며 냉기의 장막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얼음 장막이 사라지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수많은 검은색 형체가 이은의 앞에 빼곡하게 나타나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췄다.
이은이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까딱이자, 그 수십 명의 강자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꽃잎성 전체를 에워쌌다.
콰앙!
바로 그때, 저 먼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청해와 천상 장로 두 사람이 흑색 옷 노인의 공격에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백발의 노인과 빙존자가 끝없이 검은 균열을 만들어내며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펑!
하늘 위에서 또 다시 두 형체가 맞부딪히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백발의 노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늘의 힘을 한 번 써봐야겠구나!”
백발노인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은 이준의 미간이 순간 움찔거렸다. 하늘의 힘이라면, 제왕의 권의 다섯 가지 힘 중 하나가 아니던가!
백발노인의 외침에 빙존자의 안색이 돌연 새파랗게 질렸다.
“하늘의 힘? 제왕의 권?!”
다음 순간, 빙존자의 시선이 청색 옷을 걸친 채 저 멀리 서있는 이은에게 향했다.
“고……고족의 사람이란 말인가?!”
고족(古族), 이 신비한 일족은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투기대륙의 최강자들이 모여 있는 중주에서도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었다.
이은과 두 노인의 실력에 그들의 배경이 심상치 않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고족이라니……!
빙하곡 역시 중주에서 손에 꼽는 세력이었지만, 고족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호랑이라면 빙하곡은 고양이에 불과했다. 중주에 숨어있는 수많은 세력들 중에서도 이공간에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고족 뿐이었다.
그 순간, 빙존은 그 어린 아가씨가 왜 빙하곡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는지 깨달았다. 고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빙하곡 따위는 하루 만에 중주에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어딜 한 눈을 팔고 있느냐!”
빙존이 이은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백발의 노인의 손바닥에서 짙은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짙은 녹색 섬광이 내뿜는 빛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천지의 에너지가 요동치며 구름이 일렁이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
노인의 손바닥에서 퍼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에너지에 이미 오래전부터 투존의 경지에 올라 중주를 호령해 온 빙존마저도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그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빙존은 다시 한 번 미간에 자리 잡고 있는 눈꽃 문양에서 검은 염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검은 색의 얼음 염력이 그의 손에 빠르게 모여들며 두터운 얼음층이 생겨났다. 그의 팔을 뒤덮은 얼음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빙존이 검은 얼음으로 뒤덮인 두 주먹을 맞부딪히자, 영혼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싸늘한 냉기와 함께 매캐한 독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쾅!
꽃잎성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두 강자가 새파란 하늘 위에서 유성처럼 맞부딪혔다.
두 강자의 염력이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 공포스러운 에너지 폭풍이 온 하늘을 휩쓸며 허공 위에 거대한 검은 색 균열이 생겨났다.
두 사람의 염력이 충돌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거센 폭풍은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 부수었고, 꽃잎성 주위에 가득한 고목들마저 공포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하, 정말 통쾌하군! 빙하곡의 얼음의 힘은 역시 대단하구나!”
열 발자국 정도를 뒤로 밀려난 노인은 자신보다 훨씬 더 멀리 밀려난 빙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수 십 걸음을 뒤로 밀려난 빙존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굳은 눈빛으로 눈 앞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윽……. 제왕의 권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이야.’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임로, 놀 때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괜찮은 강자를 만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어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가뜩이나 새파랗게 질려있던 빙존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시고 말았다.
“저기 아가씨, 기다리시오!”
“왜?”
이은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자, 임로라고 불린 노인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에 빙존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천상 장로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천상 장로, 돌아오시오!”
빙존자의 외침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천상 장로는 청해를 버려둔 채 황급히 몸을 날려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곡주님?”
“오늘 일은 우리 빙하곡의 잘못이오. 만일 죄를 지은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겠소.”
빙존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장로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새파랗게 젊은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한마디에 천상 장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빙존의 곁을 지켜온 그였지만, 단 한 번도 빙존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설마…….”
하지만 천상 장로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빙존이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간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빙존자, 이게 무슨 뜻이오? 설마 천하의 빙하곡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런 어린 것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까!”
그때, 청해가 빙존자를 향해 날아오며 외쳤다. 천상과 힘을 합쳐도 물리치기 어려운 상대를 혼자서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길 없는 당혹감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청해가 뭐라고 말하든, 빙존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재난독체가 아니라 그 무엇이 걸렸다 해도, 고족을 건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