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금색 화염
말을 마친 빙존자는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에 있는 눈꽃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다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곱게 따라 오거라. 나의 재난독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네가 필요하다.”
곧이어 빙존자의 미간 사이에 있는 눈꽃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그의 몸 주위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돌연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쉭!
빙존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이준 일행을 가리키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눈보라가 맹수처럼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빙존자의 공격에 아라와 천화존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준을 뒤로 숨긴 뒤 염력을 뿜어내 커다란 방벽을 만들어 냈다.
치이이익!
무수한 검은 눈꽃이 표창처럼 염력 방벽에 꽂히자, 음산한 검은 빛이 순식간에 벽 전체로 퍼져나갔다.
펑!
곧이어 염력으로 만들어 낸 방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눈보라가 두 마리의 흑룡으로 변화해 아라와 천화존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아라와 천화존자는 빠르게 뒤로 몸을 물리며 염력을 뿜어내 흑룡을 막아냈다.
쾅!
다음 순간,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지며 허공 위에 새카만 공간의 균열이 생겨나더니 아라와 천화존자의 몸이 저만치 멀리 밀려났다.
일격에 두 투존을 날려버린 빙존자가 번개처럼 손을 휘두르자, 또다시 하나의 흑룡이 생겨나 이준을 덮쳤다.
그러나 흑룡이 막 이준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또다시 공간이 왜곡되며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 빙존자의 염력을 박살냈다.
“누……누구?”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에 이준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중주에서 아라와 빙존자를 제외하고 누가 빙하곡에 맞서 자신을 도와준단 말인가?
이준은 다시 한번 눈을 비비며 두 강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중주에서 이런 수준의 강자들과 연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외모도, 염력도, 너무나 낯설었다.
바로 그때, 따스한 염력이 고리 모양으로 퍼져나가며 온 하늘을 뒤덮고 있던 눈꽃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서 자신을 도와준 두 노인의 염력과는 달리, 빙존자의 눈꽃을 사라지게 한 그 염력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으……은아? 은이니?”
잠시 후, 이준의 목구멍에서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한 아이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새카만 공간의 균열에서 가느다란 몸매를 가진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빙존자과 이준 사이에 우뚝 섰다.
청색 옷을 입은 여인에게서는 마치 제왕과도 같은 위엄이 느껴졌고, 깊은 바다처럼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힘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감은 중주를 호령하는 삼대협곡의 곡주인 빙존자를 초라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압박감에 꽃잎성의 사람들과 빙하곡의 장로들은 물론이고 빙하곡주마저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세상이 멈춘 듯 적막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이준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준 오라버니…….”
이준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이준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준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은은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이준을 구해준 두 노인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흐음……. 저 청년이 바로 아가씨께서 입이 닳도록 말하던 그분인가 보군.”
흑색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자는 ‘그 분’의 후예일지도 모릅니다.”
“그 분의 후손이라고?”
그의 말에 백발의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이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허어……. 참으로 놀랍군.”
천화존자와 아라 역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빙하곡주의 공격을 막아낸 두 노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보다 한 수, 아니 두 수는 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강자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거느리고 다니는 것이 이준보다도 어려보이는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와 이준이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자마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으니, 놀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는 그 여자가 이준이 늘 그리워하던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 곁에 없었다고 원망했던 것은 아니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은이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준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준은 웃으며 마음속에서 울렁이던 감정을 거두고 이은의 등을 토닥인 뒤 그녀를 놔주었다.
“다쳤어요?”
이준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발견한 이은의 얼굴이 순간 짙은 살기로 물들었다.
“하하, 대신 나에게 덤벼든 놈들을 저 꼴로 만들어줬지.”
이준이 꽃잎성 안에 있는 깊은 구덩이와 망가진 건축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덩이에 처박혀 있는 세 투종의 모습을 확인한 이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이내 몸을 돌려 빙존자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신비로운 금색 화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오라버니를 해치려고 했던 놈만 처리하면 되겠네요.”
방금 전까지의 그 다정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살기를 피워대는 이은의 모습에 이준은 못 당하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
하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준의 한마디에 이은의 얼굴에는 또다시 맑은 웃음이 번져나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은의 섬뜩한 눈빛에 빙존자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어디서 온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우리 빙하곡의 일입니다.”
이은과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두 노인을 대하는 빙존자의 태도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역시 중주를 호령하는 최강의 세력 중 하나를 거느리고 있는 자였지만, 눈앞에 있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천하의 빙하곡주라 해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빙하곡의 일이라…….”
이은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읊조리는 순간, 빙존자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재난독체 뿐입니다. 이준이라는 저 청년은 놓아드릴 테니 재난독녀를 저에게 넘겨주시지요.”
이은의 싸늘한 태도에 빙존자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이준을 놓아주려 했다. 모르기는 몰라도, 여인 둘이 남자 하나를 싸고도니 그렇게 말을 하면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인이 재난독녀를 넘겨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라를 바라봤다.
“빙 곡주님, 이준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청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주가 잡아오라고 한 자를 이렇게 놓아줬다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만일 저 자를 잡고 싶다면 직접 잡으시오!”
하지만 빙존자는 단칼에 청해의 제안을 거절했다. 영혼의 궁전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확실히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준을 잡으려 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빙하곡이 끝장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여자든, 오라버니든, 누구도 내줄 수 없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오라버니를 어쩌겠다는 둥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여주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이은이 입을 열자, 두 투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특히 청해의 경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눈썹을 파르르 떨며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비록 자신의 실력이 눈앞의 세 사람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실상부한 중주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 영혼의 궁전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방진 것! 내가 누구인 줄 알고 협박을 하는 것이냐! 나는 영혼의 궁전의 영존이다!”
하지만 영혼의 궁전이라는 이름에도 이은의 태도는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영존이 아니라 영혼의 궁전 전주가 직접 와서 말을 해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말을 마친 이은의 눈에서 순간 신비한 금색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 분 주지. 꺼져. 이게 내 마지막 경고다.”
이은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언행에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던 빙존자의 얼굴 역시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면 모를까, 새파란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듣고 조용히 물러난다면 빙하곡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허허, 점잖게 대해 주었더니 말이 너무 심하구려.”
곧이어 빙존자의 미간에 새겨져 있던 눈꽃 문양에서 기이한 광택이 반짝이더니 이내 검은색의 얼음 염력이 서서히 퍼져 나왔다.
빙존자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자, 검은색의 얼음 속성 염력이 딱딱하게 응집되더니 이내 새카만 얼음 장검으로 변화했다.
날카로운 얼음 장검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냉기와 독기, 그리고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로님들.”
빙존자가 검을 꺼내들자 이은은 귀찮다는 듯 두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두 장로가 급히 몸을 숙이며 예를 갖췄다.
“아가씨, 걱정 마시고 저희 둘에게 맡겨주시지요.”
말을 마친 흑색 옷의 노인은 빙존자를 향해 가볍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허, 빙하곡의 곡주가 얼음의 힘을 최고 경지까지 수련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오늘 나에게 한 번 보여주지 않겠소?”
백발의 장로가 가볍게 발로 허공을 내리치자, 그의 형체가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빙존자와 멀지 않은 곳에 다시 나타났다.
“자네가 먼저 선택했으니 그럼 이 두 사람은 내가 맡겠네.”
흑색 옷을 입고 있던 또 다른 노인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청해 존자와 천상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백발의 노인을 바라보던 빙존자가 말없이 발을 구르자, 허공 위에 수십 개의 검은색 얼음 창이 솟아나 번개처럼 노인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백발의 노인이 픽 웃으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순간, 거대한 흙방패가 생겨나 검은색의 얼음 창을 막아냈다.
“아가씨는 기다리게 하는 걸 싫어하니 빨리 끝장을 내주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 노인이 염력을 폭발시키며 인을 맺자, 황토빛 염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거대한 용으로 변해 빙존자를 덮쳤다.
* * *
백발의 노인이 빙존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노인 역시 허공을 밟으며 청해와 천상 장로를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었다.
“천상 장로, 자네와 나 둘이서 손을 잡고 저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어떻소?”
바짝 접근해오는 흑색 옷의 노인을 보곤 점점 표정이 굳어가던 청해존자가 옆에 있던 천상 장로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천상 장로는 백발의 노인과 빙존자가 얽혀 싸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실력은 곡주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못 하지 않았고, 상대편에는 아직 손을 쓰지 않은 투존 강자 둘과 그 실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젊은 여인까지 있었으니 길게 끌어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수밖에 없겠소.”
천상 장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자신의 주군인 빙존자가 싸우고 있는데 자신이 달아날 수는 없었다.
“감태, 이준을 죽여라!”
그 순간, 청해가 차가운 얼굴로 혼전의 강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