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대전 임박
천이 장로 일행이 나타나자, 성 안은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 사람이 빙하곡의 천이 장로? 저 사람이 여길 오다니!”
“네 눈엔 천이 장로만 보이냐!”
“저 사람은 빙하곡 대장로인 천상 아니야? 저 사람까지도 이곳에 오다니…….저 천상 장로는 10년 전에 투존으로 승급했다던데!”
“재난독녀를 잡기 위해서 정말 작정했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빙하곡의 강자들을 바라 보았다.
“천상, 천이…….”
유종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이와 천상 장로라면 능히 혼자서도 유씨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헌데 그런 실력자가 둘이나 같이 왔으니…….
“재난독녀? 우리 유씨 가문이 언제부터 재난독녀를 숨겨주었소?”
한 장로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이준과 함께 온 그들인가? 그들 중에 재난독녀가 있는 것 아니오?”
그의 말에 유종길을 비롯한 장로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일 이준이 정말로 재난독녀를 데려온 것이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놀랄 게 뭐가 있소, 당신들에게 저자들과 죽기 살기로 싸우라 한 것도 아닌데.”
유종길이 놀라 허둥지둥하던 그때, 등 뒤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원으로 시선을 돌리자, 천화존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천화존자의 한마디에 유종길을 비롯한 장로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눈치만 살폈다. 천화존자든 빙하곡이든 유씨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느 쪽에게도 밉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뒷짐을 쥔 채 먼 하늘을 바라보던 천화존자의 시선이 천이 옆에 있는 백색 옷의 노인에게 멈춰섰다.
“투존인가…….”
“용케도 찾아왔군요.”
바로 그때, 유씨 가문 저택의 처마 위에 이준이 나타났다.
“그러게 말이다.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확실히 신통한 놈들이군. 아라의 상태는 좀 어떤가?”
천화존자가 몸을 움직여 이준의 옆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거의 다 됐어요. 하지만 아직 싸울 순 없어요.”
이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저자는 투존인 것 같으니 내가 맡겠네. 자네가 저 천이 장로라는 자를 맡을 수 있겠나?”
천화존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투존인 천상 장로와 싸운다면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인 천이 장로를 이준이 맡아야 했지만, 현재 그의 실력으로 천이 장로를 상대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편에는 천이와 천상뿐 아니라 다른 투종 강자들도 있었으니 제아무리 천화존자라 해도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유종길 장로님 걱정 마세요. 이번 일은 저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유씨 가문에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준은 하얗게 질린채 정원에 서있는 유종길과 장로들을 향해 미소를 지은 후 천화존자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저 빙하곡 강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허허, 글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천화존자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천화존자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이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 위에 떠있는 수많은 백색 형체를 바라보았다.
“그럼 한번 해보죠.”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허공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 천이 장로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그의 등 뒤에는 천화존자가 서 있었다.
“천이 장로님, 지난번에 같은 빙하곡 사람들을 희생시켜 달아나더니 창피한 줄도 모르고 또 나타나셨네요.”
이준이 뱀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천이 장로를 바라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건방진 놈, 곧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껄껄, 지난번에도 그런 기세로 해보지 그랬는가. 상황이 불리하면 동료들을 희생시켜 달아나고, 상황이 유리하면 기세가 등등해지는 꼴이 곧 투존이 될지도 모를 사람답지 않게 기개가 없구만.”
천이 장로가 살기 등등한 태도로 입을 열자, 천화존자 역시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천화 존자의 조롱 섞인 말에 천이 장로는 분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의 두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아직 얼마 전 그에게 죽임을 당할뻔한 기억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허허, 자네가 바로 천이 장로를 무너뜨린 사람인가 보군.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두꺼운 백색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 천화존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천화요.”
“천화존자라……. 나는 빙하곡의 대장로, 천상이라 하오. 오늘 일은 우리 빙하곡과 재난독녀의 일이니 좀 빠져주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천상의 제안에 천화존자는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막는 수밖에 없겠군.”
“봐줄 필요 없소.”
천화존자는 웃음으로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재난독녀는? 설마 또 숨은 것인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을 본 천이 장로는 조금 마음을 놓은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훑다가 아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 꽃잎성은 우리 빙하곡이 완벽하게 틀어막았으니 여기서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천이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상 장로가 허공을 밟으며 천화존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이 장로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애송이, 이번엔 누가 널 구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
그와 동시에 이준의 몸속에서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이 장로, 이 사람은 우리 영혼의 궁전의 사냥감 중 하나다. 나에게 넘기는 것이 어떻겠나?”
천이 장로가 손을 쓰려는 순간, 먼 곳에서 짙은 흑안개가 피어나며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검은 안개가 나타나자,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이준의 얼굴이 순간 어둡게 내려앉았다.
“영혼의 궁전?”
“몇 년 동안 안 보이더니, 투종이 되어 있었구나. 약로 그 노인네의 안목이 역시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결국 너도 나에게 잡혀가게 될 것이다. 하하!”
바로 그때, 하늘을 뒤덮을 듯한 살기가 화산처럼 이준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도영호!”
철천지원수를 보는듯한 이준의 눈빛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허허, 살의가 끓어오르느냐. 남의 힘을 빌려 허세를 부리던 때보다는 훨씬 낫군.”
검은 안개가 가볍게 뒤흔들리며 그 안에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한참이나 도영호를 노려보던 이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여버리겠다.”
“푸하하, 그런 네게 그런 능력이 있느냐? 약선도 잡았는데, 너라고 못 잡을까?”
이준이 말없이 손을 휘두르자, 은빛으로 번쩍이는 하늘 요괴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하늘 요괴의 등장에 도영호를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놀란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요괴? 끌끌, 스승이 사라지니 이번엔 요괴를 만들어서 허세를 부린 것이냐?”
“도영호, 저 요괴의 실력은 8성 투종과 맞먹소. 이 요괴는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이 저 애송이를 잡아주시오.”
그때, 옆에 있던 천이 장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요괴는 천이 장로님께 맡기고, 제가 저 어린놈을 붙잡아 장로님의 화를 풀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걱정 마. 너 따위는 하늘 요괴의 도움 없이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도영호의 실력은 대략 8성 투종 정도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몇 성이나 더 강해져 있었다.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니 약로를 영혼의 궁전에 잡아넣으면서 꽤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승님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8성 투종 정도라면 지금의 이준에게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수준의 강자는 아니었다.
“여전히 주둥이 놀리는 거 하나는 일품이구나.”
도영호는 픽, 웃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검은 안개 속에서 묵직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며 시커먼 쇠사슬 하나가 뻗어 나와 도영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안심하거라, 금방 약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도영호가 쇠사슬을 꺼내자 이준 역시 청록색 화염을 피워 올리며 검은 송곳을 꺼내 들었다.
“걱정말아라. 네가 만나게 해주지 않아도 내가 찾아갈 테니까. 널 죽여버린 뒤에 말이야.”
“껄껄…….”
이준의 말에 도영호는 말없이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새까만 쇠사슬이 살아있는 뱀마냥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다음 순간, 청록색 화염에 뒤덮인 검은 송곳과 도영호의 쇠사슬이 부딪혔다. 천지의 불꽃에 닿자, 쇠사슬 위를 감싸고 있던 기이한 검은 안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윽!”
쇠사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도영호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며 검은 쇠사슬을 거두어들여 그것을 기다란 창으로 변화시켰다.
“가라!”
곧이어 시커먼 창이 음산한 검은 안개에 휩싸인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허공을 가르며 이준에게로 날아왔다.
“육합자의 검, 합일!”
이에 맞선 이준이 검은 송곳을 휘두르자, 그의 송곳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안개에 둘러싸인 검은 창을 막아냈다.
쾅!
굉음이 하늘에 울려 퍼지며 거대한 파문이 고리모양으로 확산됐다.
“2성 투종의 실력으로 이 몸에게 덤비려 들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영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나와라!”
치이이익!
도영호의 외침에 빠르게 퍼지던 에너지의 파도 안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수십 개의 검은색 사슬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갑작스런 변화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검은 송곳을 휘둘러 육합자의 검을 시전했다.
챙챙챙챙챙챙챙!
수십 개의 쇠사슬은 이준이 만들어 낸 치밀한 검막을 뚫지 못하고 귀를 찢을듯한 쇳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도영호의 공격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쇠사슬 공격으로 인해 이미 이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새카만 검망에 숭숭 구멍이 뚫려버리고 만 것이다.
도영호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르자, 또다시 수십 개의 쇠사슬이 이준을 향해 독사처럼 달려들었다.
상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이준은 곧바로 발밑에서 은빛 섬광을 폭발시키며 저만치 먼 곳으로 달아났다.
“이준, 중주에 와서 도망치는 실력만 늘었구나!”
순식간에 도영호와 백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린 이준은 자신을 도발하는 도영호의 말을 무시한 채 두 손으로 빠르게 인을 맺기 시작했다.
“천계의 불꽃, 제 1장!”
그러자 거대한 청색 화염이 터져 나왔다가 빠르게 이준의 몸 안으로 흡수되며 그의 염력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비술? 보잘것없는 재주구나!”
도영호는 오히려 차갑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이준을 비웃었다.
“이건 불의 협곡의…….”
하지만 이준이 사용한 비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천이 장로는 도영호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도영호, 조심하시오. 이 천계의 불꽃은 불의 협곡의 최고급 비술이오. 저 녀석이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장에서 그쳤으니 망정이니 완벽한 천계의 불꽃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끌끌, 하지만 저놈은 1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도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손이 또다시 복잡한 인을 그려냈다.
“천계의 불꽃, 제 2장!”
그 순간, 투명한 화염이 폭발하면서 또다시 이준의 염력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이번에는 도영호마저 안색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의 염력이 어느새 6성 투종 수준까지 상승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