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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536화 (536/818)

536화. 등장

청백색 화염에 둘러싸인 보리 점액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달아나려 했지만, 그 저항은 채 5분을 넘기지 못했다.

“응?”

하지만 이준이 화염을 거둬들이는 순간, 보리 점액에서 청록색의 먼지 같은 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뭐지……? 잘되고 있는 건가?’

이준 역시 보리점액 같이 귀한 물건을 제련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정상인지 아닌지 알 턱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상하네, 실패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준이 가슴을 졸이고 있는 사이, 바닥에 쌓인 청록색 먼지가 액체로 변했다가 하나로 뭉쳐 청록색의 구슬로 변화했다. 이 역시 지금껏 수많은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청록색 구슬의 촉감은 매끄럽지 않고 오히려 조금 거칠었지만, 손에 쥐니 구슬 속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이건 보리구슬?”

이준이 놀란 눈으로 청록색 구슬을 보며 말했다.

보리 구슬은 보리수의 심장이나 보리 점액과 마찬가지로 옛 보리나무에서 나는 것이었지만, 보리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곧바로 분말가루로 변한다고 알려진 전설의 보물이었다.

그리고 이 보리구슬이 있어야 전설 속의 보리수의 심장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얻은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보리수의 심장은 투성으로 승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천하제일의 보물로, 투존 강자들마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달려드는 투기대륙 최고의 보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보리구슬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아라를 살리는 일이었다.

이에 이준은 냉기를 풍기는 옥함을 하나 꺼내 그 안에 보리 구슬을 넣은 뒤 곧바로 아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지의 불꽃에 의해 제련된 보리 점액은 아라의 몸에 닿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보리 점액을 흡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기가 가득한 청록색의 빛이 그녀의 하복부에서부터 퍼져 나와 단숨에 그녀의 몸 전체를 감쌌다.

곧이어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보리점액이 그녀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며 독안개로 인해 생기를 잃었던 그녀의 혈관과 근육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역시 보리점액이야.”

아라의 몸이 빠르게 생기를 되찾자 이준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친구의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었다.

“이제 재난독체의 힘을 빼내야 해.”

보리 점액으로 생기를 불어넣은 다음 할 일은 바로 재난독체의 독을 빼내는 것으로,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둘 모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다.

이에 이준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정신을 집중한 뒤 천천히 손을 들어 청백색의 화염을 피워내 한손으로는 아라의 하복부를, 한손으로는 아라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회색 기체를 포위하고 있던 청백색 기운이 빠르게 둘로 갈라지며 신비한 빛을 발하는 녹색 액체가 회색 독안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생명력으로 가득한 보리점액을 만나자,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회색 안개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미친 듯이 폭발했다.

“아라야, 염력으로 독기체를 응집시켜!”

회색 독안개 속에서 죽음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낀 이준이 곧바로 아라에게 영혼의 힘을 불어넣으며 외쳤다.

이준의 영혼의 힘에 의해 정신을 차린 아라는 빠르게 염력을 움직여 미친 듯이 들끓고 있던 독안개를 마정석 안으로 갈무리했다.

펑!

잠시 후, 마정석에서 작은 폭음이 터져 나오며 회색 독안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독기체가 침투하며 보랏빛 마정석은 점차 회백색으로 변해갔다.

회색의 독안개는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마정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의 단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던 독안개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후……. 무사히 끝난 건가?”

무사히 독안개가 흡수된 것을 확인한 이준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벌렁 뒤로 드러누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라가 스스로 마정석 안에 흡수된 독안개를 더욱 작은 결정으로 압축시키는 것뿐이었다. 그 작업만 끝난다면 그 끔찍한 독기는 다시는 아라를 괴롭힐 수 없었다.

* * *

이준이 아라의 재난독체를 봉인하는 사이, 꽃잎성과 멀리 떨어진 빙하곡의 대전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낙신골로 떠난 54명 중 돌아온 사람은 너 하나뿐이구나, 천이. 이것이 네가 가져온 성과물이냐?”

차디찬 대전 안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곡주님, 그자들 중 투존 강자가 있었습니다.”

천이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자 위에 앉아있던 빙하곡주의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투존? 몇 성 투존이더냐?”

“1성 투종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역시 도망치지 못했을 겁니다.”

“흠, 그래? 투존이라……. 그 정도라면 자네라도 어쩔 수 없었겠군.”

빙하곡주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손가락으로 널따란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디로 간지 아느냐?”

“그, 그것이…….”

천이가 머뭇거리며 답을 하지 못하자, 온 대전 안에 서늘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얼음의 힘을 사용하는 천이의 염력조차 얼어붙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한기였다.

그때, 대전 안에 돌연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음침한 목소리 하나가 새어 나왔다.

“빙존, 그들이 간 곳은 우리가 알고 있네.”

“영혼의 궁전? 우리 빙하곡에 보기 드문 손님이 오셨군.”

하지만 빙존은 갑작스런 검은 안개의 출현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들 중 하나가 우리 영혼의 궁전이 노리는 놈이거든. 목표가 같으니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는 재난독체만 있으면 되니 나머지는 자네들 알아서 하시오.”

말을 마친 빙존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또다시 서늘한 냉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끌끌,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군.”

* * *

같은 시각, 연금성 가장 자리에 위치한 공감 통로에 파동이 일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광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광장 안에 서있던 모든 이들이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그 무리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가장 앞에 서있는 두 명의 노인이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는 도저히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사방으로 공간의 힘을 뿌려댔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공간의 힘은 오로지 투존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두 노인을 중심으로 몇 명의 투종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투종 강자들의 바깥쪽에는 수십 명의 투황이 서있었다.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가장 실력이 약한 자도 최소한 5성 이상의 투황이었으니, 중주 전체에서도 이만한 힘을 가진 세력은 한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또 한 명의 그림자가 공간 통로를 걸어 나왔다.

그리고 두 노인을 제외한 모든 강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이를 맞이했다.

수십 명의 투황과 십여 명의 투종, 그리고 두 명의 투존이 예를 갖춰 맞이하는 자라니, 그런 힘을 가진 존재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에 광장 안에 서있던 사람들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공간 통로를 빠져 나온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래된 제단 안에는 눈부신 빛이 가득했다. 뜨거운 햇빛이 반사되며 만들어 낸 열기에 의해 아라의 이마에서는 끊임없이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준은 양반 다리를 한 채 가만히 앉아 조용히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라의 피부에서 피어오르던 독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창백했던 얼굴에도 차츰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라의 하복부에 모여들었던 에너지는 어느새 전갈이무기의 마정석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줌의 에너지가 마정석 안으로 흘러들어가자, 아라의 몸에서 신비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난독체를 통제하기 위한 마지막 과정이 무사히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말없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단 안에 가득 모여든 눈부신 빛을 바라봤다.

매끄러운 석벽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니 마치 태양 한가운데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아라가 마정석 안에 모인 재난독체의 독기를 성공적으로 통제해내는 것뿐이었다. 이 과정은 이준이 도와줄 수 없으며 오직 그녀만의 능력으로 해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아라가 재난독체의 힘을 완벽히 통제하는 데 성공하기를 기다리던 이준의 시선이 문득 제단 중심에 위치한 구멍으로 향했다.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구멍 안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 지하 구멍이 어디로 통하는 지는 이 지하구멍을 만든 사람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불속성 에너지가 엄청 짙네…….’

지하로 통하는 구멍을 바라보던 이준은 문득 그 안에 흐르는 불 속성의 에너지를 감지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의 에너지가 모여 있는데도 대지 불꽃의 씨앗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이 무심결에 지하구멍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무언가 강한 힘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새카만 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속성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지 불꽃의 씨앗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해. 이 정도로 불 속성 에너지가 충만한데 불꽃의 씨앗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의아함을 느낀 이준은 지하 구멍에 염력을 불어넣어 그 안에 흐르고 있는 불속성의 에너지를 활성화 시켜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염력을 통해 지하 구멍 안쪽의 불속성 에너지를 활성화 시키기를 십여 분, 돌연 손톱만한 크기의 핏빛 수정 하나가 지하 구멍 안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구멍 안에서 빠져 나온 핏빛 수정은 제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햇볕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새하얀 불씨로 변화했다.

수정이 녹으며 만들어진 백색의 화염 속에는 은은한 붉은 색 선들이 마치 모세혈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바로 태양의 불꽃인가?”

말없이 하얀색 화염을 바라보던 이준은 그 안에 담긴 힘이 그간 모아온 마수의 불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마수의 불꽃이나 천지의 불꽃과는 난폭한 기운이 전혀 없어 결투하는데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불꽃 같았다.

이 정도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불꽃에 난폭한 기운이 없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간 수많은 불꽃을 복종시키고 삼켜온 이준이었지만, 이런 기이한 성질을 가진 불꽃은 처음이었다.

‘으음……. 확실히 난폭한 기운이 없는만큼 공격력은 떨어지겠지만, 연금비약을 만들 때는 아주 쓸 만하겠는데. 유씨 가문에서 왜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이 불꽃의 힘을 빌리는지 알겠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의 머릿속에 ‘태양의 불꽃’을 ‘악마의 불꽃’의 먹이로 주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이 정도의 에너지라면 마수의 불꽃 열 개 보다 더 좋은 자양분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청록색 화염을 피워 태양의 불꽃을 감싼 뒤 그것을 자신의 입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의 불꽃이 몇 배는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효과가 있어.”

게다가 이 태양의 불꽃은 마수의 불꽃보다 훨씬 온순해 양만 충분하다면 악마의 불꽃을 키우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시커먼 구멍 안에 다시 불속성의 염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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