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재난독체
허둥지둥 유씨 가문을 빠져나가는 흑화종의 장로들을 바라보던 유씨 가문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없이 이준과 천화존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선화가 급히 대청 안으로 달려 들어와 유종길을 부축하며 물었다.
이에 유종길은 괜찮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이준을 향해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이준 선생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번 저희 가문에서 선생님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에 대해서는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지요.”
유종길이 이준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장로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지난번에는 저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친구의 목숨이 달려있어 급한 마음에 결례를 범했으니 제가 용서를 구해야지요.”
이준의 정중한 태도에 유종길은 속으로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성기 시절의 유씨 가문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유씨 가문은 투존 강자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꽃잎성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그보다 친구 분께서는 무사하신지…….”
유종길의 질문에 이준이 잠시 망설이다 공손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번에 제가 유씨 가문에 찾아온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태양의 제단을 좀 써야할 것 같은데…….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실 이준의 부탁은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방금 전 유씨 가문은 태양의 제단은 물론이고 가문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길 뻔 했으니, 그 위기에서 가문을 구해준 이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유종길은 잠시 다른 장로들의 표정을 살피다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태양의 제단은 외부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지만, 선생님 덕분에 오늘 멸문을 피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지요.”
유종길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이 없자 이준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대화를 마친 유종길은 곧바로 가문의 젊은 투사들에게 대청을 정리하도록 시킨 뒤 직접 이준 일행을 이끌고 유씨 가문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십여 분 정도 천천히 걸어가니 외진 곳에 위치한 광장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광장의 중앙에는 오래된 제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 위에 서있는 거대한 바위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었지만, 그 주위는 아주 깨끗이 정리되어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유씨 가문에서 이 제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제단은 주변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마치 다른 세상인 것 마냥 농밀한 천지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제단의 중심에는 새까만 석비 하나가 서있었는데, 거대한 바위에 쏟아지는 밝은 빛이 모두 반사되어 그 석비 위에 모여들고 있었다.
“저 석비 밑에는 지하 깊은 곳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있습니다. 석비를 움직이면 대지 불꽃의 씨앗이 튀어나와 이곳에 모인 빛에 불이 붙으면서 태양의 불꽃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예전 일이지요.”
오래된 제단을 바라보던 유종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예전 일’이라는 유종길의 말에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몇 년 전부터 대지 불꽃의 씨앗이 지하구멍에서 올라오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더 이상 태양의 불꽃을 만들 수 없게 되었지요…….”
유종길의 목소리에는 감출 길 없는 착잡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준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태양의 불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준이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아라의 재난독체를 억누르기 위해 햇볕이 잘 들고 천지 에너지가 짙은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라야, 제단으로 들어와.”
이에 이준은 굳이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아라를 불렀다.
아라가 제단 안으로 가볍게 착지하자, 주위에 짙게 깔린 햇빛이 그녀의 몸을 따갑게 찔러댔다.
“선생님,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세요.”
이준의 부탁에 천화존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움직여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걱정 말게. 투존 강자가 찾아오지 않는 한, 누구도 자네를 방해할 수 없을 걸세.”
잠시 후, 유종길 역시 눈치껏 제단에서 떨어졌다.
제단 주위에는 많은 석벽이 깔려있었는데, 가까이 오지 않으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투존 강자인 천화존자가 주위를 살피고 있으니 누군가가 작업을 방해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선을 거둔 이준은 조금 긴장한 듯한 아라를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우리도 시작하자.”
* * *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아라는 자신 안에 숨어있는 무시무시한 독기를 통제할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었다.
이준의 지시에 따라 제단에 자리를 잡은 아라는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손을 뻗어 제단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정도를 확인해 본 이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아라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찮은걸…….”
햇볕도 충분했고, 천지의 에너지도 짙었다. 바깥에서 제단의 안쪽을 보기도 어려웠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은 천화존자가 막아주고 있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환경이었다.
이준은 시선을 돌려 제단 가운데에 있는 새까만 석비를 바라보았다. 유종길의 말에 따르면, 그 석비가 제단을 가동시키는 열쇠라고 했었다.
손으로 새까만 석비를 살짝 미는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는 느낌이 솟아올랐지만, 이준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가볍게 힘을 주어 비석을 밀자,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석비가 밀려났다.
석비가 천천히 밀리면서 머리 크기만 한 검은 구멍이 이준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유종길이 말한 그 지하통로임이 분명했다.
우지직!
잠시 후, 제단 주위의 석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원형의 석벽이 만들어져 제단과 그 안에 있는 이준과 아라를 바람 한점 통하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둘러쌌다. 밖에서 이곳을 바라본다면 높게 솟아오른 바위벽만 보일 것이다.
원형의 바위벽이 형성되자, 석벽이 점점 매끄럽게 변하면서 점점 더 많은 햇볕이 석벽에 반사되어 지하 통로에 모여들었다.
햇빛이 모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단 안이 점점 뜨거워지며 아라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치이익!
곧이어 자줏빛 독안개가 그녀의 몸속에서 새어나오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햇빛과 부딪혀 ‘치익’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하얀 손을 꽉 쥐고 있는 아라를 본 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말을 마친 이준이 손을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가득한 전갈이무기의 마정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정석을 꺼내든 이준은 자신의 저장 반지 안에서 눈처럼 새하얀 옥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백색 옥함을 살짝 열어젖히자, 비취색을 띤 액체가 빠져 나와 허공을 부유했다.
허공을 떠다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준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보물중의 보물, 보리 점액이었다.
말없이 보리점액을 바라보던 이준은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라를 다시 한 번 안심시키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설명했다.
“이제 세 개의 천지의 불꽃으로 네 몸속에 있는 독기를 한곳으로 몰아넣을 거야. 아프겠지만 참아내야 해! 알았지?”
어두워진 이준의 표정을 본 아라는 입술을 꾹 다문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준이 자신의 재난독체를 해결하기 위해 수년간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뛰어다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반드시 참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전에, 내가 네 몸속의 봉인을 풀어 재난독체를 완전히 폭발시킬게.”
이준의 손은 긴장으로 인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만일 재난독체를 통제하는데 실패한다면 자신의 친구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중압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괜찮아. 난 널 믿어.”
이준의 떨리는 손을 본 아라가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준은 한 번 더 크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럼 봉인을 풀게!”
말을 마친 이준은 손끝에 청록색 화염을 피워낸 뒤 조심스럽게 아라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천지의 불꽃이 이마에 닿자, 아라의 몸 전체에서 재난독체를 봉인할 때 만들었던 봉인진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보라색 눈동자가 회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녀의 몸 안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회색 독안개가 해일처럼 터져 나와 제단 안을 가득 메웠다.
“으윽…….”
온 몸을 불태우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아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독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자, 이준은 긴장이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에서 얼음 불꽃의 정수를 끄집어 낸 뒤 그것을 자신의 청연의 불꽃과 융합시키기 시작했다.
세 개의 불꽃이 하나로 섞이며 만들어진 화염은 옥색에 가깝게 변화했고, 천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기운을 뿜어냈다.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깊은 한숨을 들이쉬고는 아라의 몸 전체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화염이 몸을 뒤덮는 순간, 짙은 회색 독안개가 격렬하게 폭발을 일으키다 아라의 몸속으로 다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악!”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에 아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하지만 이준은 이미 아라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신속하게 한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 뒤 나머지 한쪽 손으로 인을 맺었다.
“뭉쳐라!”
이준이 인을 맺음과 동시에 청백색 화염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불씨로 변해 아라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몸속에 가득한 회색 독안개를 미친 듯이 몰아냈다.
회색 독안개는 마치 늑대에게 쫓기는 양 마냥 불씨를 피해 이리저리 달아났고, 이준은 능숙한 몰이꾼처럼 그 안개를 아라의 아랫배쪽으로 몰아갔다.
치이이이이익!
전신에 가득 퍼져있던 독안개가 모두 한곳으로 모인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청백색의 화염을 한군데로 모아 고리를 만든 뒤 그 안에 회색의 독안개를 가두었다.
아라의 몸속에 깃든 독기는 투존 강자라 해도 쉽게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독성을 갖고있었다.
만일 이준에게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해 만든 청백색의 화염이 없었다면 이런 짓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안개는 모두 모였으니 마정석을 꺼내고, 보리점액을…….”
화염 감옥으로 독안개를 가두는데 성공한 이준은 곧바로 전갈 이무기의 마정석을 아라의 하복부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보라색의 마정석이 기이한 파장을 내뿜으며 아라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아라의 몸에 흡수된 마정석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그녀의 단전 주위에 모여든 짙은 독안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야!’
마정석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비취색의 보리 점액 위에 청백색의 화염을 덧씌웠다.
보리점액은 기이한 힘을 가졌지만 아라의 재난독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지의 불꽃으로 제련 작업을 거쳐야 했다.
화염과 보리점액이 서로 만나는 순간, 보리점액이 화염 속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