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흑화종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면, 제가 한 군데 알고 있는데…….”
그 때, 투종들의 싸움을 피해 구석에 숨어있던 선화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어딘데?”
이준이 들뜬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꽃잎성이요. 우리 유씨 가문에 태양의 제단이라는 신기한 장소가 있는데, 낮이 되면 햇빛이 모두 그곳으로 모여요. 그리고 그 제단에는 지하로 통하는 구멍이 있는데, 가끔 대지불꽃의 씨앗이 그 지하 구멍에서 나와 햇빛과 만나는 순간 화염으로 변하죠. 우리 가문에서는 그걸 태양의 불꽃이라고 불러요.”
선화가 말했다.
“태양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은 아니지만, 마수의 불꽃보다는 훨씬 강해서 우리 가문의 연금술사들은 연금비약을 제련할 때 그 불꽃을 이용해요. 물론…….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지만.”
선화가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태양의 불꽃?”
이준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채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읊조려 보았다.
“네 말대로라면 그 태양의 제단은 분명 유씨 가문의 금지 구역일 텐데, 그들이 빌려줄까?”
잠시 고민하던 이준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 역시 유씨 가문의 장로들과 만난 적이 있지만, 인상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그 일은 선배가 누군지 몰라서 그랬던 거지, 이제는 다를 거예요.”
점점 쇠약해지고 있는 유씨 가문에는 이제 7레벨 연금술사도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는 결코 연금성 오대가문 중 한축을 담당할 수 없었으니,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조만간 다른 세력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선화가 보기에 지금 유씨 가문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준뿐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연금탑에도 20대에 7레벨 연금술사가 된 사람은 오직 단 한명 뿐이었고, 투기대륙 최고의 연금술사들이 모여 있다는 연금 탑에서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선화의 말에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말대로 됐음 좋겠다. 아라의 재난독체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너희 유씨 가문의 문제는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
“걱정 마세요 선배!”
이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화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꽃잎성으로 가는 게 좋겠어.”
이준이 고개를 돌려 천화존자와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라는 물론 다른 의견이 없었고, 천화존자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이준은 씩 웃으며 몸을 돌려 선화의 뒤를 따라 낙신골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낙신골 출구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만약을 대비해 망토로 얼굴을 가린 채 꽃잎성으로 향했다. 빙하곡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 함부로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낙신골 입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시간이 제법 오래 지났는데도 줄지 않는 것을 보니 빙하곡에서 현상금을 내건 것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천이장로가 이끌고 온 무리가 전멸하면서 지금의 낙신골에는 빙하곡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준 일행은 별다른 방해 없이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신골을 빠져나온 이준 일행은 외진 곳을 찾아 꽃잎성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 *
낙신골에서 꽃잎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준 일행은 반나절 만에 평원 위에 위치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성안에 들어가자마자 선화의 안내에 따라 성의 중심에 있는 유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유씨 가문에 도착하는 순간, 선화와 이준의 얼굴이 모두 어둡게 내려앉았다.
지금 유씨 가문의 저택에는 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호위병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꺼운 대문이 무언가 엄청난 힘에 의해 박살난 채 활짝 열려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준은 아라와 천화존자를 데리고 유씨 가문으로 들어가 돌 부스러기가 잔뜩 널브러져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발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대청이 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대청 안에 들어서는 순간, 시종일관 새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던 선화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엉망이 된 대청 안에는 이준이 전에 봤던 유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녹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유씨 가문의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은 두 명의 노인으로, 두 사람 모두 6성 최고 수준의 투종 강자였다. 유씨 가문의 대장로인 선화의 할아버지보다도 강한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야, 저 사람들은?”
이준이 물었다.
“흑화종 사람들이에요. 연금성에서 꽤 강한 실력을 가진 세력이죠. 꽃잎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의 본거지가 있어요. 우리 유씨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준의 질문에 선화가 하얀 손을 바르쥐며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가장 앞에 있는 두 노인이 흑화종의 양대 산맥이에요. 실력도 강하고 악명도 높아서 할아버지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어요.”
이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눈앞의 두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흑화종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6성 최고급 투종이라면 빙하곡의 빙부혁보다도 강했으니 과연 중주 지역에는 강자가 별처럼 많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조흑길, 진마혁. 정말로 우리 유씨 가문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이냐!”
대청 안에서 청색 옷을 입은 장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종길, 곱게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하지만 끝까지 저항 한다면……. 곱게 항복하지 않은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네.”
“꿈 깨시게!”
유종길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흑의를 입은 두 투종 강자의 입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오늘 유씨 가문의 씨를 말릴 수밖에.”
이준의 곁에 주저앉아 있던 선화는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장로인 유종길조차 당해낼 수 없는 상대를 그녀가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선배…….”
선화가 반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준의 소매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곁에 서있던 아라가 선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 * *
“꽃잎성과 유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태양의 제단을 넘기거라. 유씨 가문의 모든 생명이 전부 자네 선택에 달려있다.”
흑색 옷을 입은 장로가 음산하게 웃으며 유종길에게 말했다.
하지만 유종길이 끝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두 장로 중 한 사람이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살기등등한 기세로 대청 안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됐네. 이제 기회는 충분히 줬어. 유종길, 이 결과는 네가 직접 선택한 일이니 우릴 원망 말거라!”
“에휴…….”
하지만 흑색 옷의 장로들이 막 손을 쓰려는 찰나, 가벼운 탄식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화종의 장로들이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대문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 건방진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젊은 청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두 장로 중 한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이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천천히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도 기회를 주지. 곱게 흑화종인지 백화종인지 하는 곳으로 꺼지든지, 이 자리에서 전부 죽든지. 선택해.”
청년의 담담한 목소리가 대청에 울려 퍼지자, 흑화종의 장로는 물론이고 유씨 가문의 장로들마저 미친 사람을 보는듯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조흑길, 진마혁이라 불렸던 두 장로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어이가 없구나. 2성 투종 밖에 되지 않은 놈이 감히 우리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싫다는 소리네…….”
청년은 그들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저 녀석을 죽여라!”
참다못한 조흑길이 뒤에 있던 흑화종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하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이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이준의 몸에서 기다렸다는 듯 청록색 화염이 터져 나와 흑화종 제자들의 염력을 단숨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갑자기 솟아난 청록색 화염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열기를 느낀 조흑길과 진마혁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놀라며 두 눈을 치켜떴다.
“처, 천지의 불꽃?”
흑화종 역시 불속성 무투기로 유명한 세력이었으니, 모든 화염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천지의 불꽃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껄껄, 다 쓰러져가는 유씨 가문을 치러 와서 천지의 불꽃을 얻게 될 줄이야!”
조흑길은 탐욕으로 눈을 빛내며 진마혁과 눈길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멍청하긴…….”
눈에 살기가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이준 주위의 공간이 왜곡 되면서 백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나타나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노인의 손길에 따라 공간이 뒤틀리며 공포스러운 힘이 흑화종의 두 장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푸흡!”
투존 강자의 힘에 얻어맞은 두 장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하며 뒤쪽으로 튕겨나갔고, 실이 끊어진 연마냥 힘없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그대로 회의실의 거대한 벽면에 깊숙이 처박혔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에 의해 회의실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6성 투종 강자 둘을 일격에 날려 보내다니, 대체 얼마나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투, 투존?”
잠시 후, 유종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사실 그의 실력으로는 천화존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투종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 투존 뿐이었다.
‘우리 유씨 가문이 언제 이런 강자와 연분이 있었지?’
지금의 유씨 가문에게는 투존 강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힘이 없었다. 그런 힘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흑화종이 이곳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문을 모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선화와 한 청년의 모습이 들어오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저 자는 지난번에 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무시무시한 실력의 요괴를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투존을 데리고 다니는 젊은 투사라니.
이에 유종길은 이준이 엄청난 세력의 후계자쯤 되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어떻게 중주에서도 공포의 대상인 투존을 대동하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유종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피를 흘리며 벽에 처박혀 있던 흑화종의 두 장로가 천화존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선배님, 저희 두 사람은 흑화종의 장로인 조흑길과 진마혁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견문이 짧아 두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금방이라도 유씨 가문을 멸문시킬 것처럼 거만하게 굴던 조흑길과 진마혁이 공포와 당혹감, 수치심, 분노와 모멸감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분하더라도 투존 강자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 뿐이었다. 투존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두 사람은 물론이고 흑화종 전체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꺼져.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면, 그 때는 흑화종의 종주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겠다.”
이준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두 사람을 흘기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말에 조흑길과 진마혁은 모두 몸을 덜덜 떨며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비틀비틀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