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반혼의 비약
그리고 얼마 뒤, 새빨간 살덩이에서 자주색에 가까운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고, 피가 빠져 나오면서 새빨갛던 살덩어리의 색깔이 점점 옅게 변해갔다.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자, 살덩어리는 격렬하게 흔들리다 폭발해 하얀 잿더미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작업을 모두 끝마친 이준의 손에는 한 주먹 정도의 자홍색 피가 들려 있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자홍색 피가 그대로 날아가 옥병 속에 담겼다.
“선생님, 이 피가 바로 선생님의 몸을 제련할 때 필요한 피예요. 곧 선생님의 육체가 다시 생겨날 겁니다.”
이준이 천화존자를 향해 손에 들린 옥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천화존자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이 맑은 웃음이 피어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몸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사라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느껴졌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군.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네.”
노인이 입이 귀에 걸린 채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이준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절 도와주셨는데, 어떻게 약속을 어길 수 있겠어요?”
이준의 겸손한 태도에 천화존자는 만족스러운 듯 또 다시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허허, 네 스승이 참으로 부럽구나.”
“끝났으면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그 때,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아라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가야지.”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아라와 함께 선화를 챙겨 낙신골의 북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준 일행이 떠나자, 산중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바닥에 뚫려있는 거대한 구덩이만이 이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 * *
낙신골 북쪽 지역에 위치한 작은 협곡에는 짙은 독안개가 깔려 한치 앞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선화가 빙하곡의 강자들이 이미 낙신골에 도착했다고 했으니, 얼마 안 있으면 우리를 찾아낼 거야.”
협곡 안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에 불을 붙이며 이준이 말했다.
“네, 게다가 이번에 온 강자들은 모두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들이에요.”
선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라면 천화존자의 영혼체와 하늘 요괴가 있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옆에 있던 아라와 천화존자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존자 본인도 지금 상태로는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선생님의 몸을 만들고 아라의 재난독체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이준의 말에 아라와 천화존자는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최소한 둘 중 한 가지는 해결되어야 빙하곡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몸부터 만들자. 예전에 투존 강자셨으니 육체가 생기자마자 금방 예전 실력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투존이 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야. 난 재난독체를 한 번도 완벽히 통제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재난독체를 제어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실력이 얼마나 늘지 알 수 없어.”
아라가 잠시 고민하다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천화존자의 몸을 먼저 만드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흐음……. 하지만 자네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내 몸을 먼저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재난독체의 힘은 투존조차 두려워할 정도니 자네의 재난독체를 먼저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하지만 천화존자의 의견은 아라와 반대였다.
“아니에요. 제가 재난독체를 통제하는데 성공해도 힘을 쓰는데 익숙하지 못 하니, 선생님의 몸을 먼저 만드는 게 맞습니다.”
“으음……. 하지만 아라 말도 맞아요. 제가 보기에도 선생님의 몸을 먼저 제련해야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의견이 맞지 않자,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던 이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
“그래, 잘 생각했어. 확실하지 않은 것에 모두의 목숨을 걸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내 몸은 아직 몇 달은 버틸 수 있어.”
이준이 결론을 내리자, 두 사람은 군소리 없이 그 의견에 따랐다. 몸을 만들든, 재난독체를 통제할 연금비약을 만들든, 모두 이준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 결정 역시 그가 내리는 것이 옳았다.
“제가 지금 반혼의 비약을 만들 테니 그동안 절 보호해주세요.”
결심을 내린 이준은 주저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약솥을 꺼내들었다. 지금은 1분이 아쉬운 상황이니, 결론이 나왔다면 한시라도 빨리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았다.
이준이 연금비약을 제련하기 시작하자 두 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물러나 그를 보호했다.
약솥을 꺼낸 이준은 곧바로 천지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동시에 필요한 약재들을 저장반지에서 꺼내 허공에 띄워두었다.
잠시 후, 이준이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있는 기묘한 꽃 한 송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손에 들린 꽃은 금색과 붉은 색이 뒤섞여 매우 화려했고, 꽃의 중심에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눈, 코, 입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영혼의 꽃…….”
영혼의 꽃은 반혼의 비약을 제련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주재료 중 하나로, 선화에게 부탁했던 약재 중 하나였다. 이렇게 진귀한 것을 며칠 만에 구해온 것을 보니 연금탑의 장로직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그녀의 가문이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응애!”
영혼의 꽃이 화염에 휩싸이자, 검은 기체와 함께 날카로운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청을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란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불꽃의 온도를 올렸다.
잠시 후, 영혼의 꽃 안에서 터져 나온 기체가 흩어지며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곧바로 화염을 거두지 않고 이미 가루로 변해버린 꽃을 한참이나 더 가열한 뒤 분말가루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것을 포장해 약솥 한쪽에 띄워두었다.
다음으로 사용할 약재는 불길한 광택이 도는 붉은 색의 열매로, 영혼의 힘을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는 ‘요괴의 열매’였다.
빨간색 열매를 유심히 훑어보던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약솥 안으로 들어간 주먹만 한 과실이 빠르게 끈적한 액체로 변화했다.
‘반혼의 비약’을 만드는 이준의 손놀림은 전에 없이 신중하고 섬세했다. 만일 반혼의 비약을 제조하는데 실패한다면 빙하곡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목숨이 걸린 제련 작업이었다.
그 사이 아라와 나머지 사람들은 혹여나 이준에게 방해가 될까봐 모두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 작은 협곡의 반경 천 미터 안에 있는 독마수들은 모두 아라와 천화존자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고 있었다.
* * *
이준이 연금비약 제조에 들어간지 이틀, 바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빙하곡의 한 장로가 바위성 주변을 살핀 뒤 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에게 공손히 말했다.
“천 장로님, 이틀 전 저희가 느낀 에너지 파동이 바로 이곳에서 전해진 것입니다.”
“이곳에선 이미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구나.”
천 장로라 불린 노인이 바위성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론 이곳이 분명 8성 투종 정도의 실력을 갖춘 전갈이무기가 장악한 구역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또 다른 장로 하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뗐다.
“전갈이무기라……. 내 예상이 맞다면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군.”
“예? 그 녀석은 8성 투종의 실력을 갖춘 7레벨 마수입니다. 낙신골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인데 누가 그를 죽인단 말입니까?”
천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시체의 기운 외에도 이곳 바닥에 엄청난 화속성 염력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빙하곡 제자의 영혼 속에서 봤던 자들 중 하나가 강한 위력을 가진 화염을 사용하던데……. 분명히 그 자의 짓인 것 같구나.”
“그 녀석들이 한 짓이라고요?”
천장로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8성 투종을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니, 상대의 실력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빙부혁 장로를 그리 쉽게 죽였는데, 이 정도는 돼야겠지.”
천 장로가 낙신골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공기에 전갈이무기의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니, 마정석을 가지고 갔구나. 그 기운을 따라가면 그 녀석들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과연 천 장로님, 대단하십니다.”
세 장로 중 하나가 존경 어린 눈빛으로 천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그 청년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 구나. 재난독녀를 데리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갈이무기를 잡아 죽이다니, 대단한 녀석이야…….”
말을 마친 천장로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로들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조용한 협곡 안에서는 청록색의 화염이 독안개를 몰아내며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벌써 6일이나 지났어요…….”
선화는 거대한 바위 위에 앉아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7레벨 연금비약은 제련하기 힘드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반면 아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솥 안에 있는 기체가 점점 짙어지는 걸 보니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그 때,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약솥이 흔들리며 우웅, 하는 소리가 협곡 안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야?”
곧이어 이상하리만치 짙은 연기가 약솥 안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다 된 거야?”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느낀 아라가 이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라와 선화, 천화존자가 바라보는 가운데 약솥에서 터져 나온 에너지가 점점 더 짙어지더니 이내 협곡 전체에 시원한 약향이 퍼져나갔다. 이는 연금비약이 완성되기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반혼의 비약은 7레벨 중급 단계의 연금비약이었지만, 이미 당진을 도와 7레벨 최고 수준의 연금비약을 만들어 보았던 덕인지 단 한번만에 재련에 성공한 것이다.
7레벨 연금비약이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에너지에 의해 하늘 위에 떠있던 독안개가 서서히 물러가고, 그 자리를 새카만 먹구름이 메웠다. 고급 연금비약을 만들 때 나타나는 비뢰의 먹구름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새카만 먹구름을 본 이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비뢰는 모든 연금술사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이었지만, 이준에게는 하늘 요괴를 단련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덩어리에 불과했다.
지난 번 비뢰를 통해 하늘 요괴는 이미 8성 투종에 가까운 실력을 갖게 되었으니, 이번에 비뢰의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최상급 하늘 요괴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준이 들뜬 마음으로 요괴를 소환하는 순간, 먹구름이 갑자기 멈춰서며 낮은 번개 소리가 몇 번인가 울려 퍼지다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은 머리 위에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번개가 저절로 사라진 거지?”
“이준 오라버니, 낙신골의 독안개 때문에 비뢰가 힘을 잃은 것 같아요.”
아라와 천화존자 역시 멍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 선화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재수가 없군.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시간도 없는데 비뢰를 상대하던 도중에 빙하곡 놈들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거야.’
이준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 뒤 약솥 안에서 흑색과 홍색이 뒤섞인 연금비약을 꺼내들었다.
“이게 바로 반혼의 비약인가…….”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이 연금비약은 검은색과 빨간색이 뒤섞여 있었으며, 표면에서는 검붉은 광택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연금비약 제련에 성공했으니 바로 몸을 만들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