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전갈용족
천 장로라 불린 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펴자, 냉기가 그의 손을 감싸며 얼음 거울이 만들어 졌다.
그 거울에 안에는 이준과 아라, 하늘 요괴, 그리고 천화존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빙하곡 제자의 영혼에서 찾아낸 것이다. 설마 재난독녀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하지만 이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허허, 오랫동안 빙하곡에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해오는 자가 없었는데, 적응이 되지 않는군.”
지팡이를 짚은 장로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얼음 거울을 들여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가자, 직접 이자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구나.”
말을 마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낙신골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빙하곡의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도착했어. 돌로 이루어진 이 작은 성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야.”
이준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짙은 독안개에 가려진 거대한 흰색 바위성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전갈 이무기가 저기에 있는 거야?”
이준의 질문에 아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전갈이무기도 내 기운을 느꼈을 거야. 그 정도 레벨의 독마수라면 내 재난독체를 못 느낄 리가 없으니까.”
“좋아. 그럼 한 번 가보자. 선화야, 너는 여기에 있어.”
이준이 웃으며 선화에게 말했다.
“네. 그럼 다들 몸조심 하세요.”
선화가 바위 뒤로 몸을 숨기자, 이준과 아라, 그리고 하늘 요괴의 몸이 번개처럼 바위성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크아앙!”
세 사람이 바위성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대지에서 갑자기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며 우렁찬 울음소리가 성안에서 터져 나왔다.
“하하, 설마 재난독체가 제 발로 굴러들어 올 줄이야!”
곧이어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새빨간 물체 하나가 성 안에서 튀어나왔다.
피처럼 붉은 몸을 가진 마수의 등 뒤에는 삼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가 달려 있었고, 둔부에는 차가운 빛을 내뿜는 기다란 붉은 꼬리가 달려 있었다.
새빨간 마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기운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아라를 살리기 위해서도, 천화존자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도 오늘 반드시 놈을 잡아야 했다.
하늘 위에서 독기를 내뿜는 형체를 바라보던 아라의 예쁜 눈동자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전갈이무기는 하늘에서 서서히 내려와 바닥과 가까운 허공에 멈춰선 뒤 아라를 쳐다보다가 그 옆에 서있던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친구를 데려왔군. 하지만 2성 투종을 하나 데리고 왔다고 나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라를 바라보는 마수의 눈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이 정도 수준의 독마수에게 재난독체는 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영약이었으니 그녀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멀지 않은 시일 내에 투존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오늘 우리는 네 마정석을 빼앗으러 온 것이니까.”
아라의 한마디에 전갈 이무기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군!”
7레벨 마수가 등 뒤에 달린 날개를 펄럭이는 찰나, 순식간에 전갈 이무기의 형상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준의 발에서 은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몸이 빠르게 뒤쪽으로 날아갔다.
쉬익!
곧이어 칼날 같은 붉은 손톱이 허공을 갈랐고,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검은 균열이 일어났다.
고작 2성 투종이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놈은 더욱 빠르게 이준을 향해 달려들며 곧바로 전갈의 꼬리처럼 생긴 기다란 꼬리를 휘둘러댔다.
쉭! 푸욱!
날카로운 꼬리가 이준의 이마를 그대로 관통했지만, 피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잔영?”
다음 순간, 백 미터 밖에서 이준의 형체가 서서히 나타났다.
“내가 널 우습게 봤구나.”
전갈 이무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준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보랏빛 염력에 휩싸인 그림자 하나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놈의 등 뒤로 돌진했다.
“흥! 겨우 이 정도로 내 마정석을 노렸단 말이냐!”
전갈이무기가 크게 웃으며 두 손을 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대지가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산 곳곳에서 새카만 그림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조심해, 전부 낙신골 안에 있는 독마수들이야…….”
이준의 곁에 돌아온 아라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독마수들을 바라보던 이준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 안에서 4성 투종 정도의 기운을 가진 두 마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구역의 주인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너희들의 생사는 내가 결정한다.”
전갈이무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되겠어. 저 독마수들을 우리가 상대하고 저 놈은 하늘 요괴와 천화존자 선생님에게 맡기자.”
말을 마친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영혼체 하나와 은빛으로 빛나는 요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이번에는 7레벨 마수인가. 자네 정말 겁도 없군.”
멀지 않은 곳에서 독기운을 퍼뜨리는 전갈이무기를 발견한 천화존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선생님의 몸을 제련하려면 7레벨 마수의 피가 필요하거든요.”
이준이 가볍게 웃으며 전갈 이무기를 가리키자, 천화존자의 눈빛이 전에 없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껄껄,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지. 하지만 아쉽게도 나 혼자서는 저 녀석을 감당할 수 없네.”
천화존자의 영혼이 매우 강력하다 하더라도 전갈이무기와 같은 강자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것은 조금 무리였다. 육체가 없이는 영혼의 힘만 사용할 수 있을 뿐 염력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선생님을 도와준다면 아무 문제없죠?”
이준이 옆에 있는 은빛 요괴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의 말에 천화존자는 가볍게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요괴의 전투력은 8성 투종이라 해도 손색이 없으니 그 정도라면 충분히 7레벨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화존자와 하늘 요괴가 나서자, 전갈이무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전갈 이무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무섭게 이준은 곧바로 뒤편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독마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선생님,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세요. 이 독마수들은 저와 아라가 막겠습니다.”
“그래, 문제없네.”
천화존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갈용족인 나에게 감히 너희들이 덤비겠다?”
전갈이무기가 음산한 눈빛으로 말했다.
“전갈용족?”
전갈용족이라는 말에 이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갈용족이라면 독마수 중에서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일족인데다가, 그 몸속에는 아주 희귀한 고대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수들 중 ‘용족’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그 수가 매우 적었고, 희귀한 만큼 그 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전갈용족의 힘은 다른 용족에 비해 약한 편이기는 하나, 용족 치고는 숫자가 많은 편이라 이놈을 죽이고 뒤탈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쏘아졌으니 상대가 전갈용족이든 순수한 용족이든 덤벼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시작하시지요!”
천화존자에게 시선을 돌린 이준의 얼굴에 음침한 기운이 돌았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요괴의 텅 빈 두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맴돌며 몸에서 반짝이던 은빛이 더욱 밝게 빛났다.
주인의 명을 받은 요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번개처럼 날아 그대로 전갈이무기에게 돌진했다.
섬뜩한 기운을 풍기며 날아오는 요괴를 본 전갈 이무기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염력을 폭발시켰다.
“좋다. 오늘 네 놈들을 전부 시체로 만들어주마!”
대지요괴와 천화존자가 전갈이무기에게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이준 역시 염력을 끌어올리며 독마수들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시작했다.
새카맣게 몰려오는 마수 중 가장 선두에 선 것은 이준을 긴장하게 했던 그 4성 투종급의 마수 둘이었다.
“상상 이상이군. 4성 투종을 둘이나 수하로 거느리고 있는 마수라니.”
이준이 가늘게 눈을 뜬 채 그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맡기고 넌 다른 독마수들을 막아줘.”
“괜찮아?”
아라의 말에 이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두 사람은 이제 막 4성이 된 투종일 뿐이야. 몸도 회복되었으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아.”
아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네 이놈들, 감히 이 곳이 어디인줄 알고 나약한 인간들 따위가 발을 들인단 말이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돌진해오던 마수 무리에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과 아라의 앞에 나타난 두 마수 중 하나는 마치 공처럼 동그랗게 뚱뚱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는 성냥개비마냥 말라비틀어진 것이 꼭 대나무 끝에 사과를 끼워 놓은 것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두 마수의 대조적인 생김새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썩 꺼져라! 아니면 네 놈들의 몸을 뼈까지 녹여 시신조차 찾아볼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
뚱뚱한 체형의 마수가 흉악한 눈빛으로 이준과 아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손 위에 들린 거대한 망치가 허공을 갈랐고, 이내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바닥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반면 곁에 서있던 깡마른 마수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준과 아라를 훑은 후 말없이 전갈이무기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이미 8성 정도의 실력을 가진 세 명의 강자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형성된 공포스러운 에너지가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이놈들은 나에게 맡겨, 내가 알기로는 전갈이무기가 이 마수떼들의 독기운을 빌려 실력을 높인다고 들었어.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저 녀석들을 전부 없애야해!”
아라가 하얀 손을 살짝 움켜쥐자, 보랏빛 염력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왔다.
“건방진 것, 여기가 어디라고!”
아라가 돌진해오자, 몸집이 커다랗고 뚱뚱한 마수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아라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댕!
보랏빛 염력이 망치와 강하게 충돌하는 순간,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망치가 뚱뚱한 마수의 손을 벗어났다.
“아주 괴팍한 아가씨군. 까누, 안 움직여?”
아라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뚱뚱한 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말에 성냥개비처럼 빼빼마른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자루의 기다란 칼을 꺼내든 뒤 번개처럼 아라를 향해 돌진했다.
두 사람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아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휘둘렀다.
그녀가 하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두 마수는 황급히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아라가 가볍게 두 사람을 상대하는 모습을 확인한 이준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마수 떼를 바라보며 청록색의 화염을 두 개로 나누었다.
이준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구름 불꽃이 부르르 떨리며 무형의 파동이 잔잔한 물결처럼 고리모양으로 확산됐다.
무형의 파동이 빠르게 퍼져나가 마수 떼와 부딪히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기세등등하던 마수 떼의 몸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쉭! 쉭! 쉭!
무형의 파동이 다시 확산 되자, 마수 떼가 있는 곳에서 불덩어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며 마수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마수 떼 안에는 지능을 가진 마수들이 많았지만,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가진 강한 마수는 없었기 때문에 구름 불꽃이 퍼져나가기 무섭게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마수들은 실력이 강하다고 해도 지성이 없어 적을 만나면 무턱대고 돌진할 뿐이었고, 구름 불꽃을 뚫고 들어올 만큼 실력이 강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마수 떼를 모두 정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