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승급
“전갈이무기.”
이준의 말에 아라는 맑은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갈이무기라면, 낙신골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아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몇 레벨짜린데?”
“7레벨이겠지, 사람의 형체를 만들 수 있으니까.”
“본 적 있어? 어디에 있어?”
이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가득했다.
“이 낙신골은 온통 독기로 가득하니까. 그만큼 맹독을 가진 마수도 많지. 그리고 전갈이무기는 역시 맹독을 가진 마수니까.”
아라가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가 낙신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전갈이무기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날 보자마자 미친 듯이 쫓아왔었어. 아마 내 안에 있는 강한 독성이 그 놈을 끌어당긴 거겠지.”
“그 녀석 실력은 어느 정도였어?”
“글세, 그 녀석과 싸워본 것은 아니지만 빙부혁보다 강한 것은 확실해. 아마 8성 투성 정도는 될 거야.”
“8성 투종…….”
이준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눈을 내리 깔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8성 투종이라면 한번 부딪혀볼만한 상대였다.
“알겠어. 먼저 치료부터 하자. 네 몸이 다 낫고 나서 그 때 전갈이무기를 찾으면 돼. 만약 그 녀석의 마정석을 얻게 되면 재난독체 문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이준의 말에 아라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조금 더 준비를 해두어야겠는걸.”
말을 마친 이준은 웃으며 바위 위에 올라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아라가 재난독체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어느 정도로 강해질까?
어쩌면 투존이 될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천화존자까지 더해 이미 두 명의 투존이 자신을 도와주는 셈이었다. 거기에 풍존에 하늘 요괴까지 합친다면…….
생각을 마치자, 이준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영혼의 궁전에서 스승과 아버지를 구해내는 것도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전갈이무기의 행적을 알아냈지만, 이준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8성 투종의 실력을 가진 마수이니 만큼 완벽하게 준비해야만 얻고자 하는 마정석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준의 실력은 1성 투종에 불과했지만 아라는 이미 6성 투종이 되어 있었으니 둘이 힘을 합친다면 전갈이무기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찌됐건 상대는 비천과 맞먹는 8성 투종이니,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됐다. 또, 전갈 이무기를 이기더라도 목숨을 끊는데 실패해 놈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언제 다시 마정석을 얻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되는 만큼 한 번에 확실히 놈을 끝장내야 했다. 무엇보다 아라에게는 다시 전갈이무기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반드시 마정석을 손에 넣어야 했다.
이미 사람의 형태를 갖춘 낙신골의 주인 전갈이무기는 지능도 사람과 비슷할 것이니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갈 지도 예상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갈이무기 밑에는 분명 강한 실력을 가진 마수들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일단 전갈이무기와 맞붙게 되면 그 마수들도 상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갈 이무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라의 재난독체를 통제하기 위해서도, 천화존자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도 전갈 이무기는 반드시 잡아야 했다. 게다가 이제 천화존자의 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7레벨 마수의 피 하나뿐이었다.
물론 하늘요괴황족의 시체에서 추출한 피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양이 너무 부족했다. 지금 이준의 손에 남아있는 하늘요괴 황족의 피는 고작 몇 방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정도 양으로는 몸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이에 이준은 이번 기회에 천화존자의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마지막 재료와 아라의 목숨을 구할 마정석을 모두 전갈 이무기에게서 얻어낼 요량이었다.
* * *
부드러운 빛이 비추는 산굴 안에서는 이준이 웃옷을 벗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서는 먹물처럼 짙은 독소 반점이 서서히 요동치고 있었고, 그 반점 주위로는 옅은 청색 빛이 끊임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온도에 반점 속에 들어있던 검은 기체가 밖으로 퍼져 나오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준에게 악마의 반점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반점을 한 번에 모조리 연소시킨다면 실력이 갑자기 급등해 수련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 조금씩 연소시켜 천천히 몸속에 흡수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실력 향상 속도가 조금 더뎌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일반 투종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승급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거대한 에너지를 순수한 염력으로 전환시켜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닥불 옆에서는 아라가 턱을 괴고 수련 중인 이준을 가끔씩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있는 악마의 반점을 볼 때마다 구름제국에서 전필환과 싸웠던 그 날이 떠올랐다.
펑!
아라가 옛 기억을 더듬고 있던 사이, 돌연 낮은 굉음이 산굴 안에 울려 퍼졌다.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동굴 안의 에너지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구석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승급한 거야?”
이 놀라운 상황이 아라는 낯설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이나 겪어본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이준은 이제 곧 2성 투종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4성 투종인 전필환의 필생의 염력을 흡수하고 있으니 그만큼 다른 투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승급이 빠른 것이 당연했다.
곧이어 이준에게서 퍼져 나오는 흡인력이 더욱 거대해지며 청록색 화염이 빠르게 몸 안에서 솟구쳐 나와 천지의 에너지를 망설임 없이 모조리 몸속으로 흡수했다.
낙신골 안은 천지 에너지 속에도 전부 독기가 섞여있어 평범한 강자라면 이곳의 천지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준은 천지의 불꽃을 통해 독성분을 태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가장 순수한 에너지만을 취할 수 있었으니 독기로 가득한 낙신골 안에서도 다른 곳과 다름없이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이준을 바라보던 아라는 느긋하게 일어나서 산골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아라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퍼져 나오며 이준의 흡인력으로 인해 끌려오는 대량의 독안개를 막아냈다.
산골 안의 기이한 현상은 삼십 분 정도 계속 되었고, 크게 요동치던 천지 에너지가 천천히 잠잠해지며 이준의 주변을 둘러싼 에너지 소용돌이도 서서히 투명하게 변해갔다.
남은 에너지가 전부 몸속으로 흡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겨있던 이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서서히 떠졌다. 그 순간, 두 개의 빛기둥이 이준의 두 눈에서 튀어 나와 그대로 거대한 바위를 뚫어버렸다.
잠시 후, 빛나던 이준의 눈이 서서히 잠잠해지며 이전과 같은 눈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기운은 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져 있었다.
이준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손바닥 위의 공간이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공간을 제어하는 힘은 투종 강자들의 상징이지만, 투종은 공간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일 뿐, 투존이나 투성이 되어야만 공간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하하, 악마의 반점이 이런 보물이 될 줄이야.”
이준이 고개를 숙여 가슴팍에 있는 검은 반점을 보며 말했다.
“그것도 네게 악마의 반점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설마 그 반점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잊은 건 아니지?”
아라가 이준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녀의 지적에 이준은 멋쩍은 듯 웃으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선화는 아직 안 왔어?”
“응, 이곳을 떠난 지 벌써 4일이 지났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아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닐거야. 하늘 요괴와 함께 있으니 만약 무슨 일이 생겼으면 내가 알 수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신호도 없는걸.”
이준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루 이틀 정도 더 기다려 보자. 하늘 요괴가 돌아오고 나면 전갈 이무기를 잡으러 가야겠어.”
* * *
하루가 더 지났지만 선화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준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할 무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산골 밖에 울려 퍼지더니 이내 익숙한 얼굴 하나가 허겁지겁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하늘 요괴가 서 있었다.
선화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준과 아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선화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었어?”
“선배, 큰일 났어요. 빙하곡에서 선배와 아라 언니에게 현상금을 걸었어요. 게다가 저희가 아직 낙신골에 있는 걸 아는지 빙하곡의 강자들이 낙신골로 오고 있어요. 이번에 오는 사람들은 투종 최고 수준의 강자들이라고 들었어요.”
선화가 침을 꿀꺽 삼키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투종 최고 수준이라고?”
순간 이준과 아라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젠장, 서두르자. 그들이 우리를 찾기 전에 전갈이무기를 잡아서 천화존자 선생님의 몸을 제련해야겠어!”
독안개가 자욱한 낙신골 깊은 곳에는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가득했고, 거대한 검은색 균열들이 가득 깔려 있는 골짜기 안에서 이따금씩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치명적인 맹독을 가지고 있어 투종 강자라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검은 바위 위에 가볍게 착지해 먼 곳을 둘러보던 이준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라야, 전갈이무기는 어디에 있어?”
그의 말에 아라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재난독체 덕에 그녀는 독안개가 가득한 이곳에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강한 탐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면 이준의 경우에는 사방에 짙게 깔린 독무로 인해 탐지 능력을 평소의 반도 발휘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하얀 손으로 북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야, 저기서 놈의 기운이 느껴져.”
이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의 곁을 바짝 따라오는 요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8성 투종의 실력에 마수의 강인한 육체를 지닌 전갈이무기를 잡기 위해서는 요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선화야, 싸움이 시작되면 넌 최대한 숨어있어.”
이준은 고개를 돌려 선화에게 당부한 뒤 몸을 움직여 아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선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멀리 숨어서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 * *
이준 일행이 전갈이무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사이, 멀리 떨어진 낙신골 입구에는 빙하곡의 투사들이 막 도착한 상태였다.
가장 앞에는 허리가 살짝 구부정한 네 명의 노인들이 서있었다.
네 명 중 가장 이목을 끄는 사람은 바로 가운데에 서있는 장로였다. 백발이 성성한 장로는 백옥으로 만들어진 뱀머리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지팡이에 달린 뱀 머리의 커다란 입에서는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고, 음산한 뱀의 눈동자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세 명의 장로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에너지가 퍼져 나오지 않고 있었고, 푸석푸석한 피부에 흐리멍덩한 눈동자는 평범한 그를 더욱 연로해 보이게 만들었다.
낙신골 입구 주변에는 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저 앞에 서있는 네 사람이 빙하곡의 투종 강자들인가?”
“빙부혁과 빙원구, 빙학 세 장로와 빙하곡 제자들이 전부 재난독녀의 손에 죽었다더군!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노인이 바로 빙하곡의 천이장로 일거야.”
“천이장로? 빙하곡이 정말 마음 단단히 먹은 모양이군.”
그 때, 지팡이를 들고 앞쪽에 서있던 백발의 장로가 흐리멍덩한 두 눈을 뜨며 말했다.
“다 왔느냐?”
“모두 도착하였습니다. 천 장로님의 본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편에 서있던 백색 옷의 장로가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