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치료
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천화존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몸을 돌려 발걸음을 몇 발짝 옮기자, 뒤에서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저들의 영혼이다. 가지고 있거라.”
천화존자가 투종의 영혼이 담긴 옥병을 던지자, 이준은 그것을 받아 저장 반지 안에 집어넣은 뒤 빠른 걸음으로 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의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보니 납을 삼킨 듯 마음이 무거웠다.
“먼저 이곳을 떠나자. 그 얼음의 힘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찾아볼게.”
말을 마친 이준은 팔을 뻗어 아라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은 뒤 한쪽에 숨어있던 선화를 하늘 요괴에게 맡기고는 낙신골의 더욱 깊숙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깎아지른 듯한 절벽 주위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매캐한 독안개를 뚫고 풍겨져 나온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준이 자리를 떠나고 한참이 지난 뒤, 백색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공동묘지가 되어버린 골짜기로 날아왔다.
곧이어 백발의 노인 하나가 서서히 거대한 돌 위로 올라섰다.
빙하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그 장로는 밑으로 내려와 놀란 눈으로 바닥에 깔린 시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빙현 장로님…….”
주위에 있던 다른 장로들과 빙하곡 제자들의 표정 역시 그 못지않게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낙신골로 재난독녀를 찾으러 온 빙하곡 제자들을 비롯해 빙부혁, 빙학, 빙원구 세 장로님까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말없이 제자의 보고를 듣고 있던 빙현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들과 장로들의 시체를 수습해라. 즉시 빙하곡으로 돌아가겠다!”
말을 마친 빙현은 바로 몸을 돌려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빙하곡의 제자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앞에 있는 장로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마른 집을 집어삼켰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이길래 수십 명에 달하는 투왕, 투황을 몰살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세 명이나 되는 투종을 죽여 버렸단 말인가.
살인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연금성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 * *
빙하곡 제자들이 뒷수습을 하는 동안, 낙신골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의 산굴 안에 도착한 이준은 아라를 내려놓고 저장 반지에서 월광석을 꺼내 산굴 안벽에 박아 넣었다.
그 사이 선화는 저장 반지에서 부드러운 모피를 꺼내 바닥에 깔아 아라가 쉴 곳을 만들었다.
“아라 언니, 좀 쉬세요.”
아라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부드러운 모피 위에 앉아 옆에 있는 이준을 바라보았다.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투종이 되었다니, 참으로 기절할 노릇이네. 그럼 이제 악마의 반점도 제거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녀의 말에 이준이 씩 웃으며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몸부터 걱정해. 다 죽게 생겨가지고는 무슨…….”
“난 괜찮아. 조금만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아라는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괜찮은 척 고개를 저었지만, 이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쭈그려 앉아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영혼의 힘이 조심스럽게 몸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온몸을 자세히 훑었다.
아라의 몸 상태를 확인하자, 이준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아라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곤란한 것은 그 ‘얼음의 힘’ 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도통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사이에도 아라의 몸속에 숨어있는 얼음의 힘은 끊임없이 냉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피와 혈관을 천천히 응고시키고 있었다.
“선화야, 빙하곡의 얼음의 힘에 대해 알아?”
이준이 고개를 돌려 선화에게 물었다.
“그 얼음의 힘은 빙하곡 특유의 힘으로 투종 강자만이 다룰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일단 얼음의 힘이 사람의 몸에 침투하면 빼내는 것이 아주 어려워서 투종 이상의 강자들도 얼음의 힘을 두려워하죠. 하지만 빙부혁이 말한 것처럼 반드시 빙하곡의 곡주가 있어야만 이 얼음의 힘을 빼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선화의 말을 들은 이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라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은 갑자기 손을 휘둘러 저장 반지 안에서 커다란 나무 대야 하나를 꺼냈다.
이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저장반지 속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나무 대야를 채워갔다.
기본준비를 마친 이준은 저장반지 속에서 온갖 약초들을 끌어낸 뒤 청록색의 화염을 피워 올려 그것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염에 의해 불탄 약초들은 빠른 속도로 형형색색의 가루와 액체로 변했고, 그것들을 나무 대야 속에 뿌리자 투명한 물이 적홍색으로 변하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대야 안에 담겨있던 맑은 물속에 화속성의 에너지가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붉은 색 액체에서는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선화야, 아라가 대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부축해줘.”
마지막 남은 약재가 모두 대야 안에 들어가자, 이준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선화는 아라와 시선을 맞춘 뒤 사뿐사뿐 걸어가 그녀를 부축해 대야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에 있는 에너지를 온몸에 전부 흡수시켜.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으면 돼.”
이준은 작은 소리로 말한 뒤 열 손가락을 튕기자, 열 개의 청록색 화염이 솟아나 나무 대야 안으로 돌진했다.
청록색 불꽃이 나무 대야 안으로 들어가자 수면이 팔팔 끓어오르며 물거품이 생겨났고, 아라의 입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천지의 불꽃이 약의 힘을 더 완벽하게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줄 거야. 얼음의 힘이 확산되는 것도 막아줄 거고.”
이준의 설명에 아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가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수면에 회오리가 생겨나며 적홍색 에너지가 육안으로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적홍색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창백했던 아라의 얼굴에도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그녀의 한쪽 콧구멍에선 강한 한기가 섞인 콧김이 나오고, 또 다른 콧구멍에선 붉은색의 뜨거운 콧김이 나오는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 효과가 있네요!”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선화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 역시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아라의 몸속에 파고든 얼음의 힘이 적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방법을 써도 하루 이틀 만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선화야, 연금성에 대해서는 네가 그나마 알고 있으니 내 부탁 좀 들어줘.”
아라의 몸속에 숨어있던 얼음의 힘이 점점 사라지자, 이준이 고개를 돌려 선화에게 말했다.
“네, 선배. 말씀하세요.”
“낙신골을 나가 약재들을 구해 와줘야겠어.”
이준은 저장 반지 속에서 약재 이름이 빼곡하게 쓰여 있는 하얀색 종이 한 장을 꺼내 그것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천화존자의 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약재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빙하곡의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으니 분명 빙하곡에서 복수를 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특히 빙하곡주는 반드시 투존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천화존자의 몸을 제련해두지 않으면 대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얀색 종이를 받아든 선화는 종이를 한 번 훑으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녀 역시 연금술사였지만, 여기에 적혀있는 약재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선배. 만일 다 모으지 못하면 집에 가서 몰래 훔쳐 오기라도 할게요!”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을 튕겨 하늘 요괴를 불러냈다.
“이 녀석이 널 보호해줄 거야. 하지만 낙신골 입구를 빠져나갈 땐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니 옷을 걸치는 게 좋겠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 역시 이 일이 이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선화가 밖으로 사라지자, 이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음의 힘을 내뿜고 있는 아라를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친구의 목숨을 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정한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아라의 몸속에 있는 얼음의 힘을 빼내는 데에는 대략 사흘 정도의 시간이 소모됐다. 이 사흘 동안 그는 백여 종에 가까운 약재를 녹여 아라에게 흡수시켰고, 이를 통해 그녀의 몸속에 있던 얼음의 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준은 이 얼음의 힘이 매우 골치 아픈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종이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더니, 역시나 그만한 위력이 있었다.
부드러운 빛이 퍼지는 동굴 안, 이준은 바위 위에 앉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약물이 담긴 대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아라의 몸에서는 싸늘한 냉기가 가득 담긴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약물 안으로 떨어진 땀방울은 약물속의 열기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었다.
옅은 수증기가 나무 대야 안에서 계속해서 피어오르며 그녀의 몸에 흡수되자,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작은 입에서 차가운 기운이 응집된 작은 얼음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얼음조각의 크기는 손톱보다 약간 큰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얼음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주위에 곧바로 새하얀 얼음이 가득히 피어났다.
“얼음의 힘을 토해낸 거야?”
이준의 질문에 아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행이야. 생각보다 빼기가 어려워서 이 방법 저 방법 다 시도해봤는데 다행히 잘됐네.”
이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얼음의 힘이 밖으로 나왔으면 이제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다른 부상은 이제부터 내가 치료해줄게.”
“그래, 고마워.”
생긋 웃는 아라의 표정에 이준은 또 다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가한제국에서 독종의 종주가 돼있는 그녀를 만났을 때는 몰라볼 만큼 차갑고 어두운 느낌에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의 그녀는 확실히 자신과 처음 만났던 청산 마을의 ‘소의선’ 아라처럼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 그럼 어서 치료하자.”
밝아진 아라의 모습에 마음이 가벼워진 이준은 거대한 바위에서 내려와 아라의 손목을 잡고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에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보았다.
잠시 후, 이준이 눈을 뜨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아졌어. 이 연금비약을 먹으면 2, 3일 안에 평소대로 회복할 거야.”
말을 마친 이준은 저장 반지에서 둥근 연금비약을 꺼내 아라에게 건넸다.
연금비약을 받은 아라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재난독체는 어떻게 됐어?”
이준이 아라의 안색을 확인하다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폭발할 때까지 2,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
아라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게 괜찮은 거라고?”
이준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성난 목소리로 되묻자, 아라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 안에 네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으니까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야. 설령 그렇지 못해도 네가 이렇게 나를 위해 애써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죽을 때까지 혼자 외롭게 살아야 할 줄 알았거든.”
앞에 있는 이준은 아라의 첫 번째 친구이자, 마지막 친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애를 써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쓸데없는 소릴, 걱정 마. 2, 3개월 안에 전갈 이무기의 마정석을 손에 넣어서 반드시 연금비약을 만들어줄게.”
이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저장 반지 속에는 이미 6레벨 전갈 이무기의 마정석이 있었지만, 가급적이면 7레벨짜리를 구해 연금비약을 만들고 싶었다.
6레벨 마정석으로는 약효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목숨이 걸린 이상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높은 쪽을 택하고 싶은 것이 이준의 마음이었다. 6레벨 마정석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만 사용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