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낙신골
“이후 아라 언니가 숨어있던 곳을 빙하곡에게 들켜버려서 빙하곡 강자와 싸움이 벌어졌어요. 어떻게든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 너무 큰 부상을 입어버려서……. 정말 죄송해요.”
말을 마친 선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아. 네 잘못은 아니니까. 아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어?”
“네, 하지만 지금 그곳은 빙하곡의 강자들에게 포위돼서 전 아예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선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가 어디야?”
“낙신골이요.”
“역시 거기구나.”
“아라 언니가 빙하곡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크게 다쳐서 쉽게 얼굴을 비추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낙신골의 지형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벌써 몇 개월째 온 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 언니를 찾아내고 말거예요.”
선화가 말을 마치자, 이준의 시선이 북쪽을 향했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가야겠네.”
“제가 길을 안내할게요! 낙신골에 들어가서 아라 언니를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제가 알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낙신골로 출발하려던 이준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선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맞다, 보람이는?”
“보람 선배는…….”
그의 물음에 선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연금성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실종됐어요.”
“실종됐다고?”
“실종이라고도 할 수 없죠. 갑자기 무슨 느낌이 와서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편지만 남기고 가버렸어요.”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보람은 줄곧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고 싶어 했었지만 끝내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중주에 와서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젠장, 그래도 왜 하필 이런 때……. 게다가 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그녀가 본 모습을 찾는 것은 이준 역시 바라는 일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따지고 있어봐야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아라를 찾아야 했다.
“에휴, 아무 일 없길 바라야지. 일단 낙신골로 가보자.”
이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뒤 선화를 붙잡고 다시 몸을 움직여 북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 * *
연금성 북쪽에 위치한 낙신골은 연금성의 위험지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로, 곳곳에 독안개가 가득한 불모지였다.
평소에는 누구도 황량하기 그지없고 독안개만이 가득한 이곳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재난독체를 가진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고 빙하곡이 나서면서 낙신골은 근 몇 달간 전에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중주에 있는 사람들은 재난독체에 대해 뿌리 깊은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재난독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중주 전체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일단 재난독체가 나타나면 늦느냐 빠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폭발을 일으켰고, 주위에 있던 생명들은 모두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이런 재난은 재난독체 숙주의 의지에 따라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재난독체의 독기가 퍼지는 범위 내에 있으면 투종 강자조차 살아남기 어려웠으니 사람들이 재난독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재앙 앞에서 재앙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졌느냐 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때문에 중주에서는 재난독체가 나타나는 즉시 주위의 강한 세력들이 힘을 모아 재난독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이번에 재난독체를 없애기 위해 앞장선 것은 바로 빙하곡이었다.
물론 그들이 재난독체를 없애는데 앞장선 것은 재앙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난독체의 특별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을 알더라도 빙하곡을 말릴 사람은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지금 연금성에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 바로 이 재난독체와 관련된 문제였다. 특히 빙하곡에서 아라에게 현상금을 건 이후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현상금을 노리고 빙하곡을 찾아오고 있었다.
* * *
꽃잎성에서 낙신골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이준의 속도라면 선화를 데리고도 하루면 낙신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높게 솟아오른 산등성이 위에 착지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이 발아래로 펼쳐졌다. 평원에는 악마의 흉악한 입처럼 갈라진 검은색 균열이 여기저기 가득했고, 땅 밑에서부터 먼 곳으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검은 빛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평원 위에 깔린 거대한 바위들 중 어떤 것들은 마치 돌산처럼 솟아 올라와 거무스레한 색을 띠고 있었고, 하늘에는 검은색 연기가 가득했다. 그 검은색 연기는 산골에서 피어오르는 독안개가 쌓인 것으로, 마치 먹구름처럼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평원의 끄트머리에는 아라를 찾기 위해 온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낙신골로 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사방에 독이 가득하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지만 아라라면 자기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겠어.”
한참 동안 평원을 바라보던 이준이 입을 열자, 선화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낙신골의 하늘에는 독안개가 가득해서 지상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낙신골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지금 빙하곡의 강자들이 지키고 있어요.”
“빙하곡 강자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야?”
“아라를 찾는 빙하곡의 장로는 빙원구, 빙부혁 두 명이라고 들었어요. 저번에 아라 언니와 겨뤘을 때의 상황으로 보면 그 두 명을 제외하고도 최소 투종 강자 네 명도는 더 따라왔을 것 같아요.”
“투종이 6명이라…….”
투종 여섯이라는 말에 이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낙신골에 들어가면 아라가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어?”
“네.”
“알겠어. 우선 낙신골로 가서 아라를 찾자.”
말을 끝낸 이준은 선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뒤 그대로 산봉우리 밑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낙신골 밖에 도착했다.
낙신골의 입구는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검은 바위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고, 입구 주위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가자.”
바닥에 착지한 이준은 선화를 내려놓은 뒤 그대로 입구를 향해 걸어갔고, 선화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빙하곡 제자들은 장장 백 미터에 달하는 길이로 죽 늘어선 채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낙신골을 통과하는 무리를 훑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장로가 가만히 앉아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던 백색 옷의 장로는 이준과 선화가 지나가자 무슨 느낌이라도 받은 것처럼 돌연 번쩍 눈을 떴다.
이번 일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지만, 그 중 진정한 강자라고 할만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그런 수준의 강자들은 빙하곡이 내건 현상금 따위에 혹해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
이런 이유로 하얀 옷을 입은 장로는 투종인 이준이 나타나자 속으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금세 이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투종이라고는 해도 겨우 1성 투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목숨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준과 선화는 빙하곡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낙신골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외딴곳에 도착해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아라가 있는 곳이 어디야?”
이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따라오세요.”
잠시 후, 선화가 저장 반지에서 옥병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옥병을 열자, 날개 달린 작은 쥐 한 마리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이건 아라 언니가 특별히 제련해둔 날개 쥐예요. 이게 우리를 언니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거예요.”
선화가 그 작은 쥐를 놓아주자, 놈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낙신골 서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빨리 따라가야 해요.”
이준은 선화를 안은 채 빠르게 몸을 날려 그 작은 쥐의 뒤를 따라갔다.
낙신골 안은 온통 독안개로 가득했지만, 이준은 그 독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몸속에 있는 천지의 불꽃이 낙신골의 독 안개를 몰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반시간 정도를 날아가자, 낙신골의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독안개 역시 점점 짙어져 갔지만, 천지의 불꽃 덕에 독으로 인해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게 막힘없이 앞으로 날아가던 도중에 앞서가던 쥐가 갑자기 멈춰 섰고, 이준은 잽싸게 쥐를 잡아 선화의 품에 안겨준 뒤 거대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이준과 선화 앞에 나타난 것은 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그리고 독안개가 가득 퍼져있는 그 절벽 주위에는 십여 개의 하얀색 그림자가 어수선하게 퍼져 있었다.
그때, 그 십여 개의 그림자 중 하나가 절벽 위에 있는 한 동굴을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재난독녀, 얌전히 빙하곡으로 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잠시 후, 동굴 안에서 눈처럼 새하얀 백발의 여자 하나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동굴 안에서 걸어 나온 하얗고 가녀린 형체를 보자, 시종일관 굳어있던 이준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아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준의 시선이 곧바로 허공 위에 떠있는 장로에게로 향했다.
백발이 성성한 장로는 하얀색 꽃이 그려진 새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고, 몸 전체에서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6성 투종이군.”
상대의 실력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시선을 돌려 골짜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면에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백의를 걸친 빙하곡의 제자들이 가득했고, 구석진 곳에 장로로 보이는 노인 둘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좀 전의 6성 투종 강자와 실력이 비슷해 보였고 그 뒤에 있는 자는 2성 투종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작정을 했군…….”
이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적의 전력을 살피고 있을 때, 뒤에 있던 선화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 저 두 사람이 바로 빙하곡의 장로 빙원구, 빙부혁이에요. 조심하세요.”
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두 장로를 바라봤다. 7레벨 연금비약을 만들며 더욱 강해진 요괴라면 6성 투종을 능히 제압할 수 있었고, 거기에 천화 존자의 도움을 받으면 이 정도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난독녀, 넌 이미 우리 빙하곡의 얼음의 힘에 중독되어 있다! 우리가 해독제를 주지 않으면 한 달 안에 체내에 남은 얼음의 힘이 너의 몸을 모두 얼려버릴 것이다!”
하늘 위에 떠있던 그 장로가 차가운 눈빛으로 동굴 앞에 서있는 아라를 향해 외쳤다.
“나와 함께 빙하곡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의 유일한 살길이다.”
동굴 앞에 서있던 아라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차가운 눈으로 장로를 훑어보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 몸이 얼어붙기 전에 이 몸을 없애버려야겠구나. 너희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독한 년. 좋다, 네 발로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직접 너를 잡아 빙하곡으로 데리고 가겠다.”
말을 마친 순간 백색 옷의 장로 앞의 공간이 왜곡되면서 고드름이 빽빽하게 솟아났다.
쉭쉭쉭!
장로가 가볍게 소매를 흔들자, 무수한 고드름이 순간 격렬하게 진동하며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가 동굴 주변 십 미터 이내를 모조리 둘러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고드름을 보며 아라 역시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너무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이미 빙원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투종 강자 두 명이 함께 달려든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설령 죽는다 해도 절대로 재난독체를 넘겨줄 수는 없어.’
곧이어 짙고 탁한 보랏빛 기운이 아라의 몸속에서 솟아나 날아오는 고드름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하지만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고드름에 의해 탁한 보랏빛 염력으로 형성된 아라의 에너지 보호막이 빠르게 얇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