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유씨 가문
대청을 지나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청년은 파란 옷을 입은 여인을 가볍게 훑어본 뒤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라가 어디 있는지 알아?”
이준의 질문에 파란 옷을 입은 여인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파란 옷을 입은 여인의 정체는 바로 이준을 중주로 데리고 온 선화였다.
“미안해요…….”
어두워진 선화의 표정에 이준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라를 돕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을 보니 아라를 도울 마음이 있어도 그럴 힘이 없을 것 같았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우리 유씨 가문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냐!”
그 때, 대청 안에 있던 한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유씨 가문의 노인들 역시 분노한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봤다. 비록 유씨 가문의 세력이 예전만 못하다 해도 이런 무례를 저질러도 되는 곳은 아니었다.
이준을 향해 고함을 친 노인의 실력은 1성 투종 정도로, 분위기를 보아하니 유씨 가문 내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 듯 싶었다.
대청 안에서 유일하게 이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바로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청색 옷의 장로로, 6성 투종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와, 아라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줘.”
장로들의 실력을 대충 확인한 이준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선화를 불렀다.
이에 선화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하다가 이준을 따라나섰다.
“무례하구나! 새파랗게 어린 놈이 어딜 감히!”
상대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자, 그 장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준을 향해 염력을 실은 의자를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그 순간 염력이 실린 나무가 까만 재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이놈이 어줍잖은 실력을 믿고 유씨 가문을 모독하는구나!”
나무 의자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본 장로는 번개처럼 이준을 향해 몸을 날리며 두 손에서 녹색 화염을 뿜어냈다.
“사 장로님, 멈추세요!”
이준을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장로의 모습에 선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하지만 이미 화가 날대로 나버린 사 장로의 말에 선화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사 장로는 본래 거칠고 난폭한데다가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했고, 최근 유씨 가문의 위세가 크게 떨어지며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웬 새파랗게 젊은 놈 하나가 유씨 가문의 회의실에 들어와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니 완전히 눈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선배, 빨리 가요!”
사 장로가 멈추지 않고 달려들자, 선화는 이준의 팔목을 잡아끌고 회의실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최근 유씨 가문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아는 이준의 실력으로는 세 명이나 되는 투종 강자를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은 달아나기는커녕 섬뜩한 표정으로 사 장로를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역시 중주에 온 이래로 온갖 사고들이 끊이지 않아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었고, 아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에 없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으니 사 장로의 행동에 짜증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쾅!
녹색 화염에 둘러싸인 주먹이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순간, 유씨 가문 장로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1성 투종인 사 장로의 주먹이 이준의 손에 의해 너무나도 간단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준의 손에 붙잡힌 사 장로의 녹색 화염이 마치 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순식간에 식어버렸다는 점 이었다.
그리고 현재 사 장로의 공격을 이렇게 간단하게 받아낼 수 있는 자는 유씨 가문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숫자 밖에 되지 않았다.
“적당히 하시죠. 제가 오늘은 좀 급해서.”
이준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그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폭발하며 사 장로의 몸이 저만치 멀리 날아가 거대한 기둥이 부딪혔다.
쾅!
“푸훕!”
사 장로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지자, 거대한 회의실에는 쥐 죽은 듯 적막이 내려앉았다.
놀란 것은 선화도 마찬가지였다. 이준은 분명히 믿기지 않는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
하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1성 투종을 이렇게 간단히 제압하지는 못 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쓰면 1년 만에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사 장로를 날려버린 이준은 바닥에 널브러진 사 장로를 가볍게 흘겨본 뒤 곧바로 선화를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따라 와.”
“거기 서!”
그 때,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노인들 중 두 사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두 사람 역시 투종 강자였고, 방금 전 사 장로라는 사람보다 좀 더 강해보였다.
두 사람은 사 장로만큼 성격이 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호인도 아니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지금 유씨 가문의 회의실에 아무 말 없이 들어와 장로까지 해치고 그냥 돌아가겠다는 건가? 실력이 제법인 것은 알겠다만 너무 오만하군.”
두 장로가 입을 열려는 찰나, 이준이 나타난 이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청색 옷의 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장로가 나서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노인들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일이 있어 선화와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저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있으시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하니 나중에 듣겠습니다.”
“아주 건방지구나!”
이준의 당돌한 태도에 먼저 몸을 일으켰던 두 장로 중 한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청색 옷의 장로 역시 이준의 언행에 불쾌함을 느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선화는 우리 유씨 가문의 사람이네. 자네가 데려가겠다 해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대장로님. 이 사람이 바로 제가 말한 그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도움이 있다면 유씨 가문이 다시 연금탑의 장로석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이에요!”
선화의 말에 그 청색 옷의 장로는 순간 멈칫하다 이내 눈썹을 찌푸리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린 녀석이 선화의 말대로 정말 유씨 가문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넌 조용히 하거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청색 옷의 장로는 담담한 말투로 선화를 제지한 뒤 다시 이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선화의 말대로 우리 가문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유씨 가문이 자네를 대접할 수 있도록 잠시 머물러줄 수 있겠소?”
아주 상냥하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내의 표정은 권유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우선 그 일이 처리되면 생각해 보죠.”
이준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대장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놈이 우리 가문을 돕기 위해 왔다고 해서 참아보려 했건만, 어린 놈이 건방지기 이를 데 없구나. 어디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보자.”
대장로가 살기를 피워대자, 이준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빨리 가요…….”
세 명이나 되는 투종이 나서고, 이준 역시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선화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자네가 정말로 선화의 친구라면 유씨 가문에 머물며 우리와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대장로가 이준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라의 목숨이 지척에 달린 마당에 그런 협박 따위가 이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따라 와.”
다급해진 이준은 아예 그들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준의 행동에 선화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이준의 뒤를 따랐다.
만일 지금 그를 따라나서지 않으면 이준이 성격상 자신의 가문을 도와줄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엄한 놈!”
자신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이준의 태도에 분노한 두 장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3성 투종 두 명이 손을 써도 이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챙!
다음 순간, 눈부신 은빛 섬광 하나가 번개처럼 빠르게 그들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푸훕!”
은색으로 뒤덮인 강철 주먹은 털끝만큼의 염력도 내뿜지 않았지만, 그것에 얻어맞은 두 장로는 그대로 새빨간 피를 내뿜으며 회의실 벽에 쳐박히고 말았다.
일격에 3성 투종 둘을 날려버린 은빛 요괴의 위력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제 봐주지 않습니다.”
이준은 유씨 가문의 사람들을 등진 채 살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에 아라가 죽기라도 할까 걱정된 나머지 그의 신경은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한편, 두 장로를 날려버린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본 대장로는 흥분과 공포로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건…… 요괴인가?”
이준이 말없이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은빛 요괴가 다시 저장 반지 안으로 돌아갔다.
“이제 선화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청색 옷의 장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저 나이에 1성 투종 강자를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6성 투종인 자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요괴까지……. 이 정도라면 실로 무시무시한 배경을 가진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유씨 가문의 대장로 유종길이라 하네. 이름이 이준이라 했나?”
이준의 이름을 묻는 대장로의 말투와 표정은 방금 전까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손했다.
이 정도 인물이라면 틀림없이 유씨 가문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겨 대청을 빠져 나갔고, 선화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갔다.
“대 장로님, 전 이준 선배가 일을 해결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게요.”
지금 이 상황에서 이준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유종길은 더 이상 선화를 붙잡지 않고 가만히 손을 저어 그녀에게 이준을 따라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대 장로님…….”
그 때, 이준에게 크게 당한 사 장로가 유종길에게 다가왔다.
“됐다. 가게 두거라. 어쩌면 정말로 우리 가문이 장로직을 되찾는데 큰 힘이 돼줄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구나.”
“그럴 리가요. 제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해도 우리 유씨 가문이 연금탑 장로석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해줄 실력은 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저렇게 무례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자에게…….”
“지금 우리 주변에는 온통 적들뿐이야.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모두들 유씨 가문이 5대 가문의 자리를 잃으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유종길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은 그저 이준이라는 청년이 정말 선화가 말한대로 대단한 녀석이길 바라야지.”
* * *
선화를 데리고 유씨 가문을 나온 이준은 선화의 팔뚝을 잡고 그대로 성 바깥으로 날아가 성 밖에 있는 산 정상에 멈춰 섰다.
“아라의 일, 알고 있지?”
이준의 질문에 선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라 언니와 주연은 무사히 공간 통로를 타고 몇 개월 만에 연금성에 도착했는데, 웬 투종 강자와 싸움이 붙었어요. 물론 아라 언니가 이기기는 했지만 언니 역시 부상을 입으면서 재난독체가 터져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가 어렵사리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연금성에서 재난독체는 재앙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어요. 예전에 재난독체가 폭발하면서 연금성 전체가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워낙 희귀한 체질이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보니 빙하곡에서 언니의 힘을 탐낸 거죠. 빙하곡에는 독특한 체질을 가진 사람의 영혼을 뽑아내 그 힘을 빼앗는 기술이 있거든요.”
선화의 말을 듣던 이준의 얼굴이 점점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빙하곡이 아라를 곱게 놔줄 가능성은 없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