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계승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당진은 천천히 이준과 오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 번째 시합을 마치겠소. 오진, 자네가 졌다네.”
당진의 말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오진은 잠시 멍해졌다가 분을 참지 못 하고 이를 악물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젊은이에게 패배했으니 천계의 불꽃을 넘겨주는 것과는 별개로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준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천계의 불꽃을 사용하지 않고도 8성 투종에게 맞설 수 있었다는 점 이었다.
“오진이 졌으니, 약속한대로 천계의 불꽃을 넘겨주겠네.”
당진의 한마디에 이준의 입가에는 더욱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 곡주님, 감사합니다.”
“이건 모두 자네의 능력에 맡긴 결과일 뿐이라네. 나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지.”
“당 곡주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번 시험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진의 말에 이준은 그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투존 강자 특유의 오만함도 없었고, 보기 드물게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말을 마친 당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대전 앞에 서있는 이 장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장로, 아직 할 말이 남아있습니까?”
그의 말에 이 장로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약속에 따라 시험에 통과하였으니, 저도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곡주님의 뜻대로 하시지요.”
이 장로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자, 당진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모두 돌아가시오.”
당진의 말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불의 협곡 제자들은 이준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자리를 떠났다. 오늘 이준의 활약에 제대로 놀란 것이 분명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터에 서있던 오진은 언짢은 듯 옷소매를 펄럭이며 이준을 노려보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자, 당진의 시선이 이준에게 향했다.
“따라 오너라.”
곧이어 당진이 앞장서서 협곡의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고, 당화윤이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이준 역시 머뭇거리다 급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천계의 불꽃은 불의 협곡 가장 중요한 비술 중 하나라 협곡의 비밀 전각에 보관되어 있거든.”
당진의 뒤를 따르던 당화윤이 이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방금 그 불꽃, 대체 무슨 무투기야? 어떻게 8성 투종의 공격과 맞먹는 위력을 낼 수 있는 거야?”
당화윤의 질문에 앞서가던 당진의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졌다. 그 역시 화련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준은 대충 웃으며 둘러댈 뿐, 정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하하, 무슨 무투기는 아니고……. 그냥 제가 천지의 불꽃을 사용해서 만든 조잡한 기술이에요.”
당화윤은 이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입술을 비죽였다. 계속해서 추궁한다고 이준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앞서가던 당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좁은 길 끝에 무성한 나무 사이에 감춰져 있는 건축물이 하나 보였다.
“이곳이 바로 우리 불의 협곡의 비밀 전각이야.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되어있지.”
당화윤이 이준의 옆에 서며 말했다.
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우거진 나무들을 조용히 훑었다. 빼곡하게 나무가 들어선 숲 곳곳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비밀전각을 지키는 호위병들 인 것 같았다.
“따라 오게, 천계의 불꽃은 우리 불의 협곡의 1급 비술이라 이곳에서만 전달해줄 수 있다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무투기실 앞에 멈춰 서자, 세 노인이 건물 안에서 걸어 나와 당진을 향해 예를 갖췄다.
“장로님들, 문을 열어 주시지요.”
당진이 손을 들며 문을 열 것을 요구하자, 세 장로가 고개를 끄덕인 뒤 동시에 인을 맺었다.
곧이어 세 장로의 손에서 붉은 에너지가 흘러나와 문으로 흘러들더니 거대한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외부의 빛이 차단되며 주위에 어둠이 드리웠다. 이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지런히 정렬된 목제 선반이었다. 선반의 위에는 각각 색이 다른 두루마리들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당진은 그 선반 위의 물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윗 층으로 올라갔다.
당진은 2층을 지나쳐 그대로 건물의 마지막 층인 3층으로 향했다.
비밀 전각의 3층에는 기이한 빛을 내뿜는 족자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이곳의 물건은 함부로 만지면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게.”
당진은 이준에게 주의를 준 뒤 건물의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멈춰선 곳에는 붉은 색 불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당진이 양손을 붉은 장막에 가져다대자, 불 속성의 염력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이 천천히 옅어지며 머리 크기만 한 빨간색 수정 구슬이 나타났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수정 구슬은 잘 익은 사과마냥 새빨간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양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것은 우리 불의 협곡에 전해져 내려온 수정이라네. 이 안에는 완벽한 천계의 불꽃의 수련법이 들어있지. 뿐만 아니라 이 안에는 불의 협곡의 선조들이 이 비술을 개선하면서 경험해온 것들이 담겨져 있다네.”
당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준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당진이 그저 완벽한 수련법이 담긴 족자만 줄 것이라 생각했지, 이런 정보까지 제공해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정보까지 담겨있다면 가장 빠른 속도로 완벽한 천계의 불꽃을 연마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선조들의 경험을 참고해 자신에게 가장 잘맞는 방식으로 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처음부터 약속한 것 아닌가.”
이준이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당진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네의 영혼의 힘을 이 안에 불어넣으면 완벽한 천계의 불꽃을 전승받을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이곳은 불의 협곡의 금지 구역이니 내가 옆에서 지켜보도록 하겠네.”
이 점에 대해 이준은 별 이의가 없었다. 외부인인 자신을 데리고 비밀전각의 가장 중요한 곳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대는 충분한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발을 앞으로 가볍게 내딛은 이준이 두 손을 붉은 수정 구슬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자, 그의 영혼의 힘이 빠르게 수정 구슬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이준의 몸이 강하게 떨이고 머릿속에 꽈르릉-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엄청난 양의 정보가 폭포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이준이 눈을 감은 사이, 그의 영혼의 힘을 흡수한 수정구슬이 거세게 흔들리며 새빨간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준의 옆에 있던 당진과 당화윤은 이런 변화에 놀란 듯 서로 눈을 마주하며 찬 숨을 들이켰다.
수정 구슬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는 전승자가 천계의 불꽃과 얼마나 잘 맞는지에 비례했다.
그리고 현재 불의 협곡 제일의 천재라는 당화윤이 천계의 불꽃을 전승받을 때 나왔던 빛과 지금 이 빛을 비교해보면 반딧불이의 빛과 보름달의 빛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말도 안 돼…….”
3층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자, 당화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어떻게 불의 협곡의 제자도 아닌 자가 이렇게까지 천계의 불꽃과 딱 맞는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전에 없이 밝은 빛을 내뿜는 수정 구슬의 모습에 당진마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준을 바라봤다.
“이준 선생이 우리 불의 협곡의 제자였다면, 초대 곡주님 같은 강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초대 곡주님이요?”
당진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당화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초대 곡주님은 투기 대륙 전체를 뒤흔드는 강자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지고 말았지.”
“강한 사람이었어요?”
당화윤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 역시 불의 협곡의 초대 곡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한 것뿐이겠나……. 그 당시 투기대륙에는 다섯 명의 최강자가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초대 곡주님이었다. 실력은 투성(鬪聖) 최고 단계로 투제(鬪帝)를 한 발짝 앞둔 정도였다고 하더구나.”
“투제라니…….”
당화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투제(鬪帝)’라는 두 글자를 중얼거렸다. 투성(鬪聖)만 해도 전설속의 존재인데, 그 위인 투제라니……. 정말로 그런 수준의 강자가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럼 나머지 네 명의 최강자는 누구예요?”
“매우 오래된 일이라 나머지 네 명의 정보는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고족, 영혼의 궁전, 연금탑이 그들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지.”
“모두 지금 투기대륙에서 가장 강한 세력들이네요. 나머지 한 분은요?”
“글쎄……. 모르겠구나. 그 분의 세력은 중주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름만큼은 아직도 전해지고 있지. 그 분은 초대 곡주님과 형제와도 같은 사이로, 천계의 불꽃 역시 그 분이 만든 것이라고 하더구나.”
“천계의 불꽃이 그 다섯 명의 최강자 중 한분이 만든 것이라고요?”
이어지는 당진의 설명에 화윤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세월이 너무 오래 되어 확인해볼 수가 없구나.”
당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분의 이름이 뭐죠?”
“이현이라고 하더구나. 그 시대에 불의 협곡은 영혼의 궁전조차 두려워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대 곡주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세력이 크게 약해지고 말았지.”
말을 마친 당진은 아쉽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현…….”
당화윤은 그 이름을 입으로 읊조리다 돌연 눈을 감고 수정구슬에 손을 얹고 있는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준 역시 성이 ‘이’ 씨인데, 설마 그 이현이라는 분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화윤의 말에 당진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넘치는데,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버지의 웃음 섞인 한마디에 당화윤은 혓바닥을 삐쭉 내밀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녀 역시 그저 해본 소리였을 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초대 곡주님하고 비교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요? 투성 최고급 수준의 강자였다면서요.”
당화윤 역시 이준의 재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투성 강자와 비교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허허, 글쎄다……. 어찌됐든 이 아비는 단 한 번도 이런 수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본적이 없다. 이 나이에 7레벨 연금술사에 투종이라니. 게다가 8성 투종인 오진 장로와 맞설 정도의 무투기를 가지고 있으니 장차 투성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것 같구나.”
당진이 아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준을 불의 협곡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듯한 당진의 표정에 당화윤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8성 투종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하지는 못 했다.
“허허. 게다가 수정구가 내뿜는 빛을 보거라. 마치 천계의 불꽃이 이 선생을 위해 준비된 무투기라도 되는 것 같지 않느냐. 솔직히 말해 곡주로써 이런 인재를 어떻게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당진은 아쉽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이준을 바라봤다.
아무리 아쉬워도 이준은 외부인이니, 비밀 전각에 혼자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화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자리에 주저앉아 이준이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