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용암의 씨앗
당진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얼굴을 숨겼지만 진짜 나이도 분명 지금의 그 모습과 얼마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임현이라는 이름도 가명일 게야.”
“정체를 숨기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어요.”
화윤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준이 연금비약 제련이라는 이유로 당진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홍색 옷의 여자아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한마디하고는 몸을 돌려 대전을 나갔다.
“됐다, 그만 툴툴 거리고 먼저 가서 준비하거라. 오늘 오후에 제련을 시작해야겠구나.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성공할지도 모르겠구나.”
* * *
커다란 협곡에는 새빨간 단풍나무가 가득해 멀리서 보면 마치 산 전체가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협곡의 중심에는 적홍색 화산 암석으로 건축된 넓은 광장이 있었고, 광장 중앙에는 30미터 정도 되는 석대가 있었다.
광장의 주변에는 붉은 옷을 차려입은 불의 협곡의 제자들이 가득했다.
광장 밖 한 편에 세워진 높은 평대는 광장 중앙에 있는 석대보다는 낮았지만 광장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평대에는 당진의 요청에 의해 불의 협곡을 찾은 연금대사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곧이어 네 개의 그림자가 먼 곳에서부터 번개처럼 날아와 석대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네 개의 그림자는 각각 불의 협곡 곡주 당진과 화윤, 그리고 이준과 연금탑의 환 장로였다.
당진이 나타나자 광장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평대를 올려다보았다.
당진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본 후 고개를 돌려 이준과 환 장로에게 시선을 멈췄다.
“두 분, 준비 되셨습니까?”
이준과 환 대사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자, 당진이 정중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제련해야하는 연금비약의 조합표 일부입니다. 제련을 할 때 이 조합표에 써있는 대로 각자 맡은바 소임을 다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당진이 손을 움직이자 두 개의 두루마리가 이준과 환 대사를 향해 날아갔다.
두 사람은 급히 족자를 받아들고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그 안에 기재되어 있는 조합표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두루마리에 속에 적혀있는 내용은 연금비약 조합표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이준의 실력으로도 족히 10분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조합표의 일부가 이렇게 복잡하다니, 전체 조합표는 대체 얼마나 복잡할까.’
“두 분 다 되셨습니까?”
이준과 환 대사 모두 눈을 뜨자 당진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준과 환 대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금비약 제조에는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두 분은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중간에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당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번 연금비약 제조가 실패하면 딸의 목숨이 어찌될지 몰랐으니 그도 전에 없이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연금술사가 아니라서 영혼의 힘을 조종하는 데에 여러분만큼 뛰어나지 못 합니다. 때문에 약재를 제련하는 일은 제가 하지만 약재끼리 융합을 하는 것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말을 끝낸 당진은 고답로 석대 양 쪽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두 개의 돌 의자가 있었다.
“문제없다면 저기에 앉으시지요.”
이준과 환 대사는 서로를 바라본 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돌 의자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당진 역시 다른 쪽에 있는 돌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화윤아,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동안 누구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거라.”
“예, 아버지.”
화윤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석대에서 내려와 불의 협곡 제자들을 불러 모은 뒤 아무도 다가오지 못 하게 경비를 서기 시작했다.
곧이어 당진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커다란 물체가 저장 반지에서 나와 석대 중심에 쿵, 하고 떨어졌다.
커다란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이준과 환 장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석대를 진동시킨 그 거대한 물체의 정체는 바로 커다란 약솥이었다. 약솥은 전체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으며, 약솥의 겉부분에는 마치 화산이 분출되는 것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힘을 가진 약솥이었다.
“화산의 솥이라니. 이것이 당 곡주님의 손에 있을 것이라 생각도 못했군요. 부럽습니다.”
환 대사가 그 빨간색 약솥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당진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손을 휘두르자 빽빽한 약재가 저장 반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상공에 떠다녔다. 얼핏 보기에도 백가지는 넘는 약재가 줄줄이 허공을 수놓은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약재에서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짙은 약 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과연 7레벨 고급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쓰이는 약재답게 하나 같이 진귀한 약재들이었다.
곧이어 당진의 몸에서 은색 화염이 퍼져 나왔다. 신비한 은색 불꽃 안에서는 아홉 마리의 화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다니며 옅은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환 대사님, 이 연금비약을 먹으면 구룡 불꽃의 열기를 버티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당진은 은색 알약 하나를 환 대사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임현 선생님께서는 이 물건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지요?”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영혼은 청연의 불꽃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니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구룡 불꽃의 열기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었다.
당진이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은색 화염이 빠르게 날아가 붉은 솥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큰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준비가 됐다면 시작합시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니 당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약재들이 약솥 안으로 들어가자 화룡들이 연달아 울부짖으며 약재들을 한 입에 집어 삼켰다.
이준과 환 대사 역시 급히 정신을 집중하고 영혼의 힘을 끄집어내 붉은 약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심사를 할 때보다 한층 강해진 구룡 불꽃의 열기에 환 대사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진이 건네준 은색 연금비약이 아니었다면 잠시도 버티지 못할 수준의 열기였다.
“첫 부분의 약재가 거의 다 제련 되었습니다. 융합을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영혼의 힘이 약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준과 환 대사는 정신을 집중해 머릿속으로 조합표를 되짚어가며 융합을 시작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약솥 안을 헤집고 다니던 화룡들의 입이 벌어지며 짙은 약향이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화룡의 입에서 형형색색의 액체와 고체, 가루 같은 것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지금입니다.”
이준과 환 대사는 당진의 명에 따라 약재 하나하나를 분류한 뒤 그것을 자신의 영혼의 힘으로 감싸 융합 작업에 돌입했다.
실수 없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당진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약재를 약솥 안에 쓸어 넣었다.
석대와 멀지 않은 곳의 평대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연금대사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환 대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준의 연금비약 제련술이 이토록 뛰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그들이었다.
천지의 불꽃 덕에 운 좋게 심사에 통과했다고 생각했건만, 이준의 제련술은 확실히 6레벨, 아니 어지간한 7레벨 연금술사의 그것보다도 나았다.
광장 주변에서는 당화윤이 맑은 두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석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 눈이 정확했네. 저 녀석 대체 뭐지?”
7레벨 연금비약의 제조는 매우 복잡한 일이었다. 특히 오늘 제조하는 ‘용암의 씨앗’ 정도 되는 물건이라면 어지간한 연금술사는 조합표조차 읽을 수 없었다.
조합표를 읽는 데는 막대한 영혼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혼의 힘이 약하다면 이렇게 긴 조합표를 읽는 것만으로 탈진하고 말것이다.
석대 위에서는 끊임없이 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 약솥은 마치 활화산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쉬지 않고 약재를 집어삼켜 어떤 것은 액체로, 또 어떤 것은 단단한 고체로, 또 어떤 것은 가루로 만들어 내뱉고 있었다.
구룡 불꽃은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가장 탐내는 불꽃 중 하나였다. 불꽃 자체의 위력도 대단하지만, 아홉 마리의 화룡이 각각 최고급 약솥처럼 약재를 완벽하게 제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진이 연금술사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7레벨 연금술사가 저 불꽃을 가지고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차원이 다른 제련술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연금술사가 아니니 구룡 불꽃을 가지고서도 약재를 제련하는데 그칠 뿐 융합작업을 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구룡 불꽃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약재를 제련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당진의 화염 조종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천지의 불꽃 중 12번째에 해당하는 불꽃의 힘과 가공할 염력,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화염 통제 능력. 과연 중주 전체를 호령하는 불의 협곡의 곡주다운 실력이었다.
* * *
이준의 연금비약 제조 경험은 이곳에 있는 어떤 자들보다 뒤처지지 않았다.
또, 약솥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구룡 불꽃도 청연의 불꽃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그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석대 위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용의 울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준과 환 대사는 모두 두 눈을 감고 온 정신을 집중해 융합 작업에 몰두했다.
약솥 안에는 신비한 빛을 내뿜은 은색 화염과 청록색 화염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쉬익-
그 때, 고요한 청록색의 원 안에서 갑자기 작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청연의 불꽃 사이로 옅은 반점이 있는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첫 번째 융합만 3시간 가까이 걸리다니,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군.”
수 십개의 약재가 한데 뭉쳐 하나의 액체로 변화하자, 이준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임현 선생님, 역시 놀랍군요. 이렇게 빨리 융합을 마치다니.”
그 때, 당진의 목소리가 이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준의 작업 속도는 연금탑의 장로인 환 대사보다도 더 빨랐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진의 칭찬에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곡주님, 운이 좋았습니다. 벌써 두 번째 약재의 제련을 마치셨습니까?”
“하하, 이미 기다리고 있었지요.”
당진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약솥 안에 있는 아홉 마리의 화룡이 입을 벌려 제련이 완료된 약재들을 뱉어내더니 그 중 일부를 이준의 불꽃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냈다.
“용암의 씨앗은 제조는 모두 여덟 단계로 나뉩니다. 아직은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하지만, 두 분의 도움이 있으니 나머지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8단계?”
이제 겨우 첫 단계가 끝났다는 말에 이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옅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앞으로 일곱 단계가 남았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번째 융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융합 작업을 마친 환 대사가 이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 실로 대단한 청년이구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저 나이에 이 정도 제련술이라니.’
곧이어 환 대사의 영혼의 힘이 약솥 안을 훑으며 두 번째 융합작업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