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불의 협곡
한편 증수의 얼굴에서는 점점 더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 역시 6레벨 연금술사이니 상대의 실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준의 영혼의 힘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과거 연금탑의 장로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불과 약관을 조금 넘어 보이는 청년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7레벨 연금술사?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증수가 손을 모으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웅장한 영혼의 힘이 모여들어 무형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영혼의 힘이 응집되어 두꺼운 영혼의 장벽을 내리쳤다.
쾅!
두 영혼의 힘이 맞부딪히자, 무시무시한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파도처럼 광장 전체로 퍼졌다.
그 순간, 광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부르르 떨리며 바닥이 갈라졌다.
우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증수의 영혼의 장벽에 금이 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파편을 뿌리며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푸흡!”
영혼 장벽이 부서지자, 증수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며 선혈을 토했다.
6레벨 연금술사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광장 전체에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광장 위에 서있던 사람들은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증수를 바라보며 너무 놀란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청년이 6레벨 연금술사인 증수를 쓰러뜨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정말 7레벨 연금술산가봐.”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광장 안은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7레벨 연금술사라면 불의 협곡이 아니라 투기대륙 최고의 연금술사 조직이라는 연금탑에서도 한자리를 꿰찰 수 있는 실력이었다.
하물며 서른도 되기 전에 7레벨 연금술사가 된 자라면, 연금탑의 장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영광을 비롯한 정씨 가문의 투사들도 입을 떡 벌린 채 증수를 바라보며 마른 침을 꿀꺽 집어 삼켰다.
7레벨 연금술사라니……. 그런 자를 적으로 돌린다면 정씨 집안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었다.
“7레벨 연금술사…….”
류지안의 뒤에 있던 두 명의 노인 역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7레벨 연금술사라니……. 정말로 저 분이 가주님의 친구입니까?”
두 노인의 질문에 류지안의 커다란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 두 노인은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류지안이 가주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준 덕택에 두 사람이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가주로써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질 것이 분명했다.
“제 친구가 아니라면 7레벨 연금술사가 무엇 때문에 이런 문제에 끼어들겠습니까?”
두 장로는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7레벨 연금술사와 교분이 있다면 류지안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가문의 보배라고 할 수 있었다.
“선배님들, 그럼 이제 류씨 가문에게 공간 통로의 관리권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준이 소맷자락을 흔들자, 하늘을 뒤덮고 있던 영혼의 힘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준의 말을 들은 적화 장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는 증수를 바라보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습니다. 이제 천황성의 공간 통로는 3년간 류씨 가문이 맡아 관리하면 될 것 같군요.”
적화 장로의 선언에 정영광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 불의 협곡의 장로인 적화의 판정에 의문을 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분에 겨운 표정으로 류지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반면, 류지안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준의 도움으로 인해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넘겨받았을 뿐 아니라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까지 탄탄해 졌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적화 장로님, 감사합니다.”
적화 장로는 웃으며 이준에게 다가가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7레벨 연금술사라면 나이와 무관하게 예의를 갖춰야 했다.
“허허, 선생님의 존함을 아직 모르는군요.”
“임현입니다.”
이준은 웃으며 적화 장로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혹시 스승님이 누구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적화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이 천재적 자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가르칠 스승이 없다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께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그저 산속에서 은거중인 노사라고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준이 대답을 피하자, 적화 장로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협곡의 장로라 할지라도, 7레벨 연금술사의 기분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류지안 가주. 오늘부터 3년 동안 천황성의 공간 통로는 류씨 가문에게 맡기겠소. 약속한 때에 약속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앞으로 3년 동안은 정씨 가문에게 관리권이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적화 장로가 류지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간 통로의 관리권은 류씨 가문의 것이었지만, 그 곳에서 얻는 수입의 일부를 반드시 불의 협곡에 바쳐야 했다.
“허허, 일단 공간 통로의 관리권 문제는 해결이 난 것 같으니, 선생님께 부탁을 좀 드려도 될런지요?”
말을 마친 적화 장로는 손을 비비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임무는 고레벨 연금술사를 불의 협곡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7레벨 연금술사에게 건방지게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상대의 의중을 물은 것이다.
이준 역시 불의 협곡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고레벨 연금술사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헌데 불의 협곡에서 고레벨 연금술사를 찾아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요?”
“허허, 곡주님께서 높은 레벨의 연금비약을 하나 제련하고 싶어 하시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뛰어난 연금술사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신다면, 공간 통로의 관리권과는 별개로 선생님에게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연금비약 제련?”
불의 협곡의 곡주라면 분명 풍존보다 강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 필요로 하는 연금비약이라면 ‘최소한’ 7레벨 이상의 물건일 것이다. 이에 이준은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레벨 연금술사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7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은 6레벨 연금술사인 증수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을 도와줄’ 연금술사라는 것을 의미했다.
“불의 협곡의 곡주님 역시 연금술사입니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비약을 제련하는 것은 대부분 본인의 실력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도와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곡주님은 연금술사가 아니지만 화염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서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아 연금비약을 제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야.”
그 때, 류지안이 이준에게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류지안의 설명에 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음……. 혹시 그런 일이 가능한 게 구룡불꽃 덕분인가? 어쨌든 연금술 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불의 협곡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구룡불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부가 될거 야. 운이 좋다면 천계의 불꽃의 남은 부분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준에게 천계의 불꽃은 매우 중요한 무투기였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천계의 불꽃과 천지의 불꽃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투종이 된 지금, 그 비술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비천같은 강자와도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 불의 협곡으로 가볼까요?”
이준의 답을 듣자, 적화 장로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온몸이 빨갛게 물든 거대한 새가 광장 밖에서 날아왔다.
“그렇다면 저는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적화 장로는 그 말을 남기고 하늘로 날아올라 거대한 새 등 위로 안착했다.
“이준, 너 정말 불의 협곡에 갈 거야?”
거대한 새의 등 위로 올라가는 적화 장로를 보며 임동수가 급히 물었다. 불의 협곡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술을 이준이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지금 불의 협곡에서 이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리하게만 행동한다면 완전한 천계의 불꽃을 얻어내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번 초청으로 불의 협곡에 가게 된 연금술사가 적지 않다던데, 다들 실력이 만만치 않을거야. 하지만 불의 협곡 곡주가 연금비약 제련에만 성공한다면 분명 보수도 대단하겠지.”
류지안이 웃으며 불의 협곡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사실 이준은 보수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완벽한 천계의 불꽃을 손에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동수 선배는 천황성에서 기다려주세요. 일 끝내고 바로 돌아올게요. 그리고 류지안 선배, 부탁할 일이 있어요.”
이준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내 힘이 닿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류지안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최근 중부 지역에서 아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와 관련된 소식이 있는 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선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는 가문도 알아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라와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아라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부 지역에 있던 류씨 가문이라면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선화의 가문을 돕기로 했지만 그녀와도 떨어져 버렸으니 만일에 대비해 그녀의 가문이 어디인지라도 알아두어야 했다.
“아라?”
류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단 사람을 시켜서 알아볼게. 하지만 선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가문은 찾기가 어렵겠는걸. 중부 지역에 크고 작은 가문이 엄청나게 많은데, 거기서 선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가문을 알아낸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어.”
“그녀의 가문은 아마 연금탑의 장로직을 차지한 적이 있을 거야. 지금은 그 자리를 다른 가문에게 내주었을 거고.”
“뭐?”
순간 류지안의 표정이 흔들렸다. 한 때나마 연금탑의 장로직을 차지한 가문이라면 절대로 평범한 집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위가 많이 좁혀지겠네……. 알았어. 나에게 맡겨. 네가 돌아올 때까지 잘 알아봐둘게.”
류지안의 답변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류지안의 도움을 받는다면 적어도 이 넓은 중주 바닥을 발로 뛰어다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대화를 마친 이준은 곧바로 임동수와 류지안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조심히 다녀와!”
임동수의 인사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보인 뒤 그 거대한 새 위에 올라탔다.
“하하, 준비 되셨습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곧이어 거대한 새가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뱉으며 빠르게 북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구룡불꽃, 천계의 불꽃…….
이준은 그 두 단어를 몇 번이나 속으로 읊조리며 조용히 눈앞에 펼쳐진 새파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