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옛 벗과의 만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장로님들.”
류지안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두 노인에게 물었다.
“불의 협곡이 고급 연금술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언뜻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럴 줄은 생각도 못했군. 천황성에서 저 자보다 뛰어난 연금술사를 찾기는 어려울 텐데…….”
두 노인이 한 말에 류지안의 낯빛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3년간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넘겨준다면 류씨 가문으로써는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3년 동안 정씨 가문이 류씨 가문을 크게 앞지를지도 몰랐다.
“허허, 류지안 가주,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3년만 지나면 다시 류씨 가문에게 공간 통로의 관리권이 넘어갈텐데, 뭘 그리 걱정하는거요.”
비아냥 섞인 정영광의 말에 류지안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성격대로 행동한다면 가문에 무슨 화가 미칠지 몰랐으니, 이를 악물고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번에는 우리가 진 것으로 하지.”
하지만 류지안이 패배를 시인하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어딘가에서 그를 비웃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천하에 류지안이 이렇게 꼬리를 말다니, 실망인데?”
분노한 류지안이 주먹을 움켜쥐며 뒤를 돌자, 인파를 뚫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손을 흔들며 걸어 나왔다.
“임동수?”
오랜만에 만난 동기의 얼굴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류지안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내려앉았다.
“고마워해, 내가 때마침 널 도와줄 사람을 데려왔으니까.”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누가 왔는지 봐.”
류지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왠 젊은 사내 하나가 계단을 밟듯 허공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투종 강자?”
“선배, 오랜만이네요.”
귓등을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류지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청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이준?”
류지안의 말에 뒤에 서있던 류헤이의 표정도 빠르게 변했다. 하지만 류지안과 달리 그녀는 이준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이준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지안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 그새 투종이 된 거야?”
류지안의 말에 그 뒤에 서있던 사람들 모두 안색이 변해 이준을 바라봤다. 이렇게 젊은 투종 강자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운이 좋았죠 뭘.”
“하……. 나도 실력이 빨리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할 말이 없군.”
류지안이 투왕이던 당시 이준은 아직 투령에 불과했었다. 이후 이준은 빠르게 투왕이 되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투황을 넘어 투종이 되어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배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제가 투왕이었던가요?”
이준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지안을 향해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아, 그랬지. 네 실력이면 당연히 투황 정도는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투종이라니……. 정말 너무하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데 안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됐군. 그나저나 중주에는 어쩐 일이야?”
“연금성에 가려고요. 천황성에 연금성으로 가는 공간 통로가 있다고 해서 가는 김에 선배 얼굴이나 보려고 들렀죠.”
말을 마친 이준의 시선이 정씨 가문의 투사들이 서있는 곳을 향했다.
“그래. 걱정마, 내일 공간 통로가 열리면 바로 이용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 하지만 공간 통로의 관리권은 이미…….”
그 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헤이가 앞으로 나서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의도는 분명했다. 본원 최고의 천재 투사이자 연금술사인 이준이라면 지금쯤 6레벨 연금술사가 되어있을지도 몰랐으니, 그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이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괜찮아, 별 일 아니야. 먼저 돌아가 있어.”
하지만 류헤이와 달리 류지안은 손을 내저으며 이준을 돌려보내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선배, 제가 이전에 선배에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죠?”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류지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준, 이곳은 가한제국이 아니야. 정씨 가문은 운남종 보다도 강하다고. 만일 네가 손을 쓴다면 골치 아파질 거야.”
“하하, 류지안. 이준을 너무 얕보는 거 아냐? 얼마 전 이 녀석이 풍뢰북각주 비천에게서 달아나고 사대각 대회에서 풍뢰각의 봉연을 꺾었다는 소식이 아직 여기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나보지?”
그 때, 옆에 있던 임동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순간 류지안과 그 뒤에 있던 두 장로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풍뢰북각주라면 중주 북부에서 이름난 강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비천의 추격을 벗어나고 중주 최고의 젊은 강자로 소문난 봉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니.
“민망하게 그런 얘기는 대체 왜 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민망함을 느낀 이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류지안은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휴……. 본래 올해는 우리 류씨 가문이 공간 통로를 관리하는 해야. 하지만 불의 협곡에서 갑자기 고급 연금술사가 필요하다며 더 높은 레벨의 연금술사를 데려오는 가문에게 3년간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넘기겠다고 했거든. 그리고 정씨 가문에서 6레벨 연금술사를 데려오는 바람에…….”
“명색이 중부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데 6레벨 연금술사도 데리고 있지 않은 건가요?”
이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 것까지야 모르지. 어쨌든 들리는 바로는 불의 협곡의 곡주가 연금비약을 제조하려 하는데, 고급 연금술사의 도움이 필요하대.”
류지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에 이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거만한 자세로 서있는 보라색 의복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 노인보다 나은 연금술사를 데려오면 공간 통로의 관리권은 3년 동안 류씨 가문의 것이 되는 건가요?”
류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준이 연금술사이며, 아카데미에 있을 때 5레벨 연금비약을 제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면서 만나본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재능이 출중한 이준이 지금까지 아무런 발전이 없을리 만무했다.
류지안은 이준이 지금쯤이면 최소 6레벨 연금술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로 정씨 가문에서 데리고 온 연금술사보다 더 낫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비슷한 수준은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이준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와 적화 장로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로 정씨 가문의 연금술사보다 더 뛰어난 연금술사를 데려온다면 류씨 가문에게 공간 통로의 관리권이 넘어가는 건가요?”
갑자기 나타난 젊은 투종 강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제 아무리 불의 협곡의 장로라 해도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 나이에 투종 강자가 되는 사람은 불의 협곡에서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만일 류씨 가문에서 증수대사보다 더 강한 연금술사를 찾아온다면, 공간 통로의 관리권은 그대로 류씨 가문이 갖게 될 것이오.”
이준의 실력을 알아본 탓인지, 적화장로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있었다.
이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 보라색 의복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며 의미 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소인이 증수대사님과 겨루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가 류씨 가문이 초청한 연금술사라고?”
이준의 말을 들은 적화 장로는 눈을 크게 뜨며 천천히 이준을 훑어보았다.
스물을 조금 넘어보이는 나이에 투종이 됐다는 것은 그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투사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금술사로서는?
염력 수련과 연금술은 모두 넓고 심오한 길이다. 그 중 한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두 가지 길에서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른 자는 중주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이준의 말에 광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었다. 젊은 투종 강자보다도 더 드문 것이 젊은 고급 연금술사였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투종이 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염력 수련에 쏟았을텐데, 연금술사로서도 일류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증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염력은 자네가 나보다 나을지 모르겠지만, 연금술도 그럴까?”
하지만 이준은 증수의 비웃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적화를 바라보며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시합을 해야 할까요? 설마 이 자리에서 연금술 대결을 펼쳐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소. 시간이 아까우니까 말이야.”
증수가 이준의 말을 받아쳤다.
“자네도 연금술사라면 연금술사에게 영혼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영혼의 힘으로 겨뤄보세. 자네는 아직 어리니, 내가 먼저 하겠네. 자네가 영혼의 힘으로 나를 물리친다면 자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
증수의 발언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연금술사와 일반 투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영혼의 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6레벨 연금술사의 영혼의 힘은 투종 강자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말을 마친 증수는 소매를 펄럭이며 뒷짐을 지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작 하시지요.”
무수한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이준의 몸을 중심으로 웅장하고 거대한 영혼의 힘이 폭풍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영혼의 힘은 마치 해일처럼 거침없는 기세로 증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영혼의 힘은 무형무색이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온 대기에 가득 찬 기묘한 에너지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투종이 된 이준의 영혼의 힘은 7레벨 연금술사의 그것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영혼의 힘에 적화 장로마저 입을 벌린 채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7레벨 연금술사?”
영혼의 힘은 연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급 연금비약일수록 강한 영혼의 힘을 요구했고, 뛰어난 연금술사들은 영혼의 힘이 곧 실력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화 장로가 보기에 이 젊은 투종의 영혼의 힘은 명백하게 6레벨 연금술사인 증수의 그것보다 강력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갓 스물을 넘은 자가 투종에 7레벨 연금술사라니……. 7레벨 연금술사는 중주 중부에서도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특히 이렇게 젊은 7레벨 연금술사라면 연금탑마저도 탐을 낼만한 인재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준의 영혼의 힘 앞에 증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반면 증수를 바라보던 적화 장로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역시 증수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하지만 곡주의 명령에 의해 6레벨 연금술사를 초빙해야 했으니 증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마지못해 예의를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젊은 청년이 증수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