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천황성
자갈이 가득한 광활한 광장. 광장의 중심에는 거대한 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의 꼭대기에서는 몇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검은 공간 통로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휙, 휘익.
그 때, 공간 통로에 격렬한 공간 파동이 일면서 사람들이 튀어 나와 광장으로 떨어졌다.
“겨우 빠져 나왔다! 이 망할 공간 통로,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광장 바닥에 발을 디딘 임동수는 깊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공간 통로를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이곳이 연금성인가요?”
이준이 양손바닥을 문대며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그럼 여긴 어디란 말인가?
“그냥 중주의 중심일 뿐이야. 여긴 중부 지역이고, 연금성은 중부지역 중앙에 있어.”
“중부요?”
“헤헤, 투기대륙의 중심지가 중주라 한다면, 중부지역은 바로 중주의 중심이야. 유명하다고 하는 최고 세력들은 대부분 중부 지역 안에 있지.”
임동수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중부 서남지역이야. 여기서 가장 강한 세력이 바로 음곡과 불의 협곡이지. 물론, 그 두 세력 말고도 크고 작은 세력들이 아주 많이 있지. 류지안의 가문도 바로 이 서남지역에 있어.”
“불의 협곡?”
이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불의 협곡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와 수년을 함께한 천계의 불꽃이 바로 이 불의 협곡의 비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의 협곡과 음곡은 풍뢰각보다 훨씬 강한 세력이지. 특히 불의 협곡은 수백 년간 물려 받아온 구룡불꽃이라는 불꽃으로 유명하지.”
임동수의 말에 이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구룡불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천운이 따라 우연히 그 불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더라도 쓰지도 못할 불꽃 때문에 풍뢰각보다 강한 세력의 추격을 받게 될 뿐이었다.
따라서 지금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구룡불꽃이 아니라 천계의 불꽃이었다.
‘어쩌면 세 개의 천계의 불꽃 중, 나머지 두 개도 얻을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역시 천계의 불꽃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또 풍뢰각 때처럼 될 것 같은데…….’
이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임동수를 향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연금성은 이곳에서 얼마나 멀죠?”
“가깝진 않아. 하지만 중부지역에는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공간 통로가 많아서 6, 7일이면 연금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인 천황성에 류지안의 가문이 있어. 그곳에 연금성으로 가는 공간 통로가 있거든.”
임동수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 됐네요!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요?”
“나쁘지 않지. 지금은 그 녀석이 가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3성 투황이었으니까, 지금이라면 최소 7성 투황은 되어 있겠지. 가자, 우리 속도라면 하루안에 류지안의 가문에 도착할 수 있을거야.”
임동수가 웃으며 말했다.
연금 대회가 시작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그 시간동안 류지안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악마의 불꽃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마수의 불꽃을 수집할 수도 있었으니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말을 마친 임동수는 곧바로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준 역시 그 뒤를 따라 허공을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 * *
천황성은 천북성과 비슷한 크기의 도시로, 연금성으로 향할 수 있는 공간 통로가 있어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었다.
천황성에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중 최고의 가문이라 꼽히는 두 가문이 바로 류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문이 단독으로 공간 통로를 관리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곳의 공간 통로는 어느 가문의 소유도 아니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진정한 실력자는 바로 불의 협곡이었고, 천황성의 공간 통로 역시 그들의 소유였다.
천황성을 지배하고 있는 류씨 가문과 정씨 가문 역시 불의 협곡이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다.
불의 협곡은 두 가문에게 번갈아가며 공간 통로의 관리를 맡겼고, 이를 통해 천황성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불의 협곡은 천황성 주변의 수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중부의 진정한 맹주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있는 곳은 오직 음곡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음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그저 불의 협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한 세력이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 * *
이준과 임동수의 속도로 천황성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으니, 출발한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천황성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황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준은 두 개의 마수의 불꽃을 얻었다. 비록 그리 강한 불꽃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 보단 나았다.
천지의 불꽃이라면 모를까 마수의 불꽃 정도는 그리 구하기 어렵지 않았고, 중주에는 무수히 많은 화염 속성의 마수가 존재했다. 그리고 투종이 된 이준의 실력으로는 마수의 불꽃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개의 불꽃을 정련해 악마의 불꽃의 불씨에게 먹이자, 불씨가 커지며 더욱 강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이곳이 천황성인가요?”
불꽃이 커지는 것을 확인한 이준이 고개를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여기부터는 불의 협곡의 세력권이야. 그러니까 네 비술인 천계의 불꽃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불의 협곡이 풍뢰각만큼 무투기 하나를 가지고 난리를 피우는 곳은 아니지만, 외부인이 자신들의 비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달갑게 여길 세력은 없으니까.”
오는 길에 이준은 천계의 불꽃에 대한 이야기를 임동수에게 알려주었다.
이준이 풍뢰각의 무투기로도 모자라 불의 협곡의 무투기까지 익히고 있다는 사실에 임동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몇 번이나 천계의 불꽃을 숨기라고 당부했다.
“일단 가죠. 이 천황성의 공간 통로의 관리권이 류씨 가문에게 있다면 편하게 연금성까지 갈 수 있겠네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준의 눈에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과거 본원의 3대 강자로 손꼽히던 천재와의 재회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 * *
도시에 가까워지자, 웅장한 장벽이 이준과 임동수의 앞을 막아섰다.
우뚝 솟아오른 성문 사이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황성을 찾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성 안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다란 대로에는 상점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길 위의 새까맣게 깔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와…….”
쫙 깔린 인파에 놀란 이준이 감탄사를 내뱉자, 임동수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은 중주 중부 지역이니까.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고.”
말을 마친 임동수는 곧바로 류씨 가문이 있는 방향으로 이준을 안내했다.
임동수의 뒤를 따라 몇 개의 대로를 지나자, 광활한 장원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원 주위에는 험상궂은 표정을 한 투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네……. 이 대낮에 왜 이렇게 경비가 많은 거지. 잠깐만 기다려봐.”
말을 마친 임동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지나가는 사내 하나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말 좀 묻겠습니다. 류씨 가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임동수에게 붙잡힌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지인인 모양이군. 류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거든. 궁금하면 성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가보시오.”
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에 임동수는 황급히 이준에게 돌아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해. 이번 해는 류씨 가문이 공간 통로를 관리하는 해인데,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가지고 싸움이 벌어졌다는군. 그래서 지금 성 중앙의 광장에서 두 가문이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그럼 그곳으로 가보면 되겠네요.”
이준의 시원스런 답변에 임동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광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우선 가보자.”
* * *
천황성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청색 광장의 중앙에 놓여있는 바위 위에서는 칠흑같이 까만 공간 통로가 서서히 회전하며 공간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광장 주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서는 두 인마(人馬)가 대치 중이었다.
“정영광 족장, 올해는 우리 류씨 가문이 공간 통로를 관리하기로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지?”
좌측에 서 있는 인마의 우두머리는 몸집이 커다란 사내로, 온 몸에서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류지안의 뒤에는 백발의 장로 두 명이 서있었고, 그 곁에는 익숙한 얼굴의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바로 본원에서 이준과 마찰을 빚었던 류지안의 사촌 동생, 류헤이였다.
“하하, 류지안 가주, 가주라고는 하나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친구가 윗사람에게 너무 무례하군.”
류지안과 대치하고 있는 중년 사내의 얼굴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해 한 눈에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강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근 다시 내려진 우리 불의 협곡의 명령이오.”
그 때, 사내의 뒤에 서있던 노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얼룩덜룩한 붉은 반점이 가득했다.
“불의 협곡의 적화 장로?”
노인을 알아본 누군가가 ‘적화’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자,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류지안과 그 뒤에 있던 두 명의 노인 역시 상대가 불의 협곡의 장로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표정이 변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췄다.
“적화 장로님, 이 명령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요? 이전의 규칙에 따르면 지금은 공간 통로의 관리권을 바꿀 시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곡주님께서 연금비약을 제조하는데 도움을 줄 고급 연금술사를 불의 협곡으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하달하셨소. 하지만 지금까지 그에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했기에 고급 연금술사를 데려오는 가문에게 3년간 공간 통로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하신 것이지.”
적화 장로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자색 의복을 입은 한 장로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6레벨 연금술사?”
적화 장로의 말에 류지안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류씨 가문에도 연금술사가 있긴 하지만, 6레벨 연금술사를 모시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6레벨 연금술사라면 불의 협곡같은 중주의 일류 세력에서도 서로 모셔가지 못해 안달인 수준의 실력자였다.
“적화 장로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니 우리 류씨 가문에 며칠의 시간을 더 주시지요. 저희도 6레벨 연금술사를 찾아오겠습니다.”
류지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적화 장로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는 곡주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니 나도 어쩔 수 없소. 오늘 내에 류씨 가문에서 6레벨 연금술사를 모셔오지 못한다면 공간 통로의 관리권은 정씨 가문으로 넘기겠소.”
적화 장로의 냉담한 태도에 류지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루 안에 어디에 가서 6레벨 연금술사를 찾는단 말인가?
“저 빌어먹을 노인네, 분명 정씨 가문에서 뇌물을 받았을 거야!”
류지안에 뒤에 있던 류헤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닥쳐!”
하지만 류지안이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나무라자, 류헤이는 억울하다는 듯 발을 구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