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마수의 불꽃
공간 통로 안에서 임동수는 저장 반지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은색 배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준 역시 중주에 왔을 때 이 작은 물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임동수의 배는 그 때 받았던 물건에 비하면 썩 좋은 물건 같아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엔 이래보여도 정말 비싸거든! 이 정도도 이백만 골드는 줘야 살 수 있어. 내가 이것 때문에 목숨걸고 6레벨 마수를 둘이나 잡았다니까?”
이준의 표정을 본 임동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하, 하지만 괜찮아. 그 6레벨 마수 둘을 죽일 때 운 좋게 동굴속에서 재미있는 무투기 하나를 얻었거든. 보기엔 우습지만 그 무투기 덕분에 사대각 대회에서도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
임동수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준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사용하던 그 기묘한 무투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참이었다.
“아, 그 무투기!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그 무투기는 대체 뭐죠?”
“박쥐의 움직임.”
임동수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날개를 접은 채 걸어 다니는 박쥐를 떠올려보니, 제법 잘 지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제대로 익히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아주 쓸 만 한 무투기지. 덕분에 내 실력으로도 사대각 대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하!”
임동수의 말에 이준 역시 가볍게 웃으며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불개’를 진화시키는 문제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투황 단계까지는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 했지만, 투종이 되자마자 염력을 회복하는 속도도,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속도도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정도 속도로 천지의 에너지를 모아 승급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염력의 크기가 커진만큼 통제하는 것도 어려워져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염력 수련법을 진화시켜야 했다.
‘곧 연금성에 도착할 텐데……. 그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수련법을 진화시켜둬야 해.’
* * *
칠흑 같이 어두운 공간 통로 안.
두 사람의 양쪽에는 공간의 힘으로 응집되어 만들어진 공간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 은백색의 장벽 바깥에 펼쳐진 어두운 허공을 향해 있었다.
허름한 공간배의 운전을 맡은 것은 임동수였다.
“이 공간 통로를 지나려면 최소 한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 좀 쉬어, 배는 내가 몰 테니까.”
배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자 임동수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준은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는 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마염곡에서 얻은 ‘악마의 불꽃’을 수련해볼 생각이었다.
천천히 족자를 열자, 이준의 영혼의 힘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악마의 불꽃을 수련하는 데 필요한 대량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 통로 안에는 이준과 임동수의 배를 제외하고도 수십 척의 배가 떠다니고 있었다.
배를 운전하는 것은 임동수 한 명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이준은 그에게 배를 모는 것을 맡기고 악마의 불꽃을 수련하는데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다.
첫째 날, 이준의 정신은 온전히 족자 속에 기재된 수련법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전의 ‘악마의 불꽃’은, 세 명이 함께 수련을 해야 하며, 생명력을 쏟아 부어 간신히 천지의 불꽃에 못 미치는 화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로가 발전시킨 이 새로운 수련법은 혼자서도 그것 이상 가는 불꽃을 만들 수 있었으니, 지금의 이준에게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셋이서 하던 것을 혼자 해내야했으니 수련 난이도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아지고 말았지만, 지금 이준의 실력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의 난이도였다.
마로가 개량한 수련법에 의하면, 악마의 불꽃을 만들기 위해 총 세 개의 마수의 불꽃이 필요했다.
세 가지 불꽃을 체내에 융합시킨 뒤 그것을 끝없이 연마하고 압축시키면 그것이 하나로 뭉쳐져 ‘악마의 불꽃’이 되는 원리였다.
듣기엔 쉬워 보이지만 화염을 다루는데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실력자라 해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작업이었다.
마수의 화염 역시 천지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대폭발을 일으켜 몸이 가루가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불꽃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다 해도 염력을 사용해 그 불꽃을 압축하고 다듬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염력이나 불꽃 통제력이 아니라 강력한 영혼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 만큼 그 위력 역시 대단해, 천지의 불꽃을 제외하곤 천하 제일의 불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불꽃이라면 ‘불개’를 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족자 안의 내용을 모두 살핀 이준은 곧바로 자신의 저장 반지 안에서 파란색, 갈색, 빨간색의 화염이 담긴 약병을 꺼내들었다.
“첫째, 이 세 가지 불꽃을 몸속에 융합한다.”
옥병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화염을 바라보던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옥병이 펑 하고 터지며 화염이 튀어나왔다.
이준은 곧바로 입을 열어 세 개의 불꽃을 집어삼킨 뒤 천지의 불꽃으로 그것을 감쌌다. 천지의 불꽃 앞에서는 그 어떤 불꽃이라도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수련…….’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서자, 세 개의 화염이 빠르게 회전하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담금질만 하면 되겠네.’
단숨에 두 단계를 마친 이준은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 단계만큼은 제 아무리 천지의 불꽃이 있다 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 * *
어두컴컴한 공간 통로 속,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이준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임동수는 혹시라도 이준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말 한번 걸지 않고 조용히 배를 몰았다.
그렇게 이십 일이 지나서야 이준의 감겼던 두 눈이 떠졌다.
눈을 뜬 이준이 손바닥을 펴자,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은 화염 하나가 솟아올라 그의 손 위에서 춤을 췄다.
“성공인건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며 영롱한 빛을 뿜는 세 개의 화염을 바라보던 이준은 이내 고개를 들어 뱃머리에 앉아있는 임동수를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남은 시간동안 배를 몰아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마지막 수련이 남아서…….”
“문제없어. 안심하고 수련 하라고. 별 다른 일이 없다면 앞으로 열흘 정도는 더 가야 공간 통로 끝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이곳을 빠져나갈 때 배가 좀 요동 칠거야.”
이준은 가만히 웃으며 다시 화염으로 시선을 돌렸다.
‘융합…….’
이준의 두 눈이 감기며 손가락 끝에서 타오르던 세 개의 마수의 불꽃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 이준의 몸속에서는 청록색 화염이 세 개의 작은 불꽃을 둘러싼 채 요동치고 있었다.
곧이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퍼져 나오며 세 개의 불꽃을 하나로 융화시켰다.
쾅-!
서로 부딪히는 순간, 세 개의 불꽃이 뒤흔들리며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하지만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청록색 화염에 부딪히자, 에너지는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거세게 요동칠 뿐이었다.
계속해서 세 개의 불꽃을 융화시키자, 잔잔했던 화염의 표면이 격하게 요동치며 작은 기포가 끓어 넘쳤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갔다.
화련을 수련하던 과정에 비하면 이 정도는 하찮은 일에 불과했다.
영혼의 힘이 번개처럼 빠르게 마수의 불꽃 안으로 들어가자, 몸속에서 폭발직전의 화산 같은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폭발할 듯 요동치는 화염의 모습에 이준은 더욱 정신을 집중하여 청록색 화염으로 세 개의 불꽃을 옥죄였다.
세 개의 불꽃을 둘러싼 벽이 조여 들며 그 안에서는 더욱 강한 에너지가 분출되었지만, 이준은 힘을 풀지 않았다.
펑!
청록색 화염의 힘에 의해 뒤섞였던 화염은 점점 강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분화한 화산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화염이 폭발하면서 생긴 매서운 충격파가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청록색 불꽃에 부딪히자, 청록색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벽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불꽃의 폭발에 대비 하고 있었던 이준에게는 그 강대한 에너지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곧이어 청록색 화염 속에 갇혀있던 세 개의 불꽃이 흩어져 사라지고 ‘후’하고 불면 사라질 것 같은 작은 불씨가 등불처럼 살랑살랑 나부꼈다.
이준은 가벼운 숨을 내뱉으며 다시 정신을 집중해 그 세 개의 불씨를 하나로 융화시켰다.
작아진 불씨들은 좀 전처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고 얌전히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불꽃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이준은 기쁜 마음을 억누른 채 정신을 집중하여 계속해서 세 개의 불씨를 융합해갔다.
* * *
이준이 불꽃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지 9일, 마침내 공간 통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뱃머리에 앉아 있던 임동수가 다시 한 번 배에 염력을 불어넣자, 배는 관성으로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달 가까이 배를 운전하면서 염력을 크게 소모하진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곧 있으면 공간 통로를 빠져나갈 수 있겠어. 이 녀석은 아직 인가?”
임동수는 이준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 통로를 빠져 나갈 때 공간 파동이 심해질 텐데……. 이 상황에서 염력이 불안정해지면 문제가 생기겠는걸.’
어찌해야할까 생각하던 임동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에이, 몰라!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깨지 않는다면 강제로 깨우는 수밖에 없지.”
임동수는 다시 운전에 집중하여 안정적인 속도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공간 에너지가 점점 강해지자, 임동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공간 통로의 출구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준이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은빛의 둥그런 구멍이 보였다. 임동수는 고개를 들어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임동수가 손을 뻗어 이준의 어깨를 잡으려는 찰나, 그의 몸에서 청록색 화염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당황한 임동수는 또 다시 그 기묘한 무투기를 사용해 재빠르게 이준의 청록색 화염을 피했다.
하지만 참은 숨을 미처 내쉬기도 전에 등 뒤에서 또 한 차례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뒤를 바라보자, 청록색 화염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멈춰라!”
청록색 화염이 임동수를 덮치려는 순간, 이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화염이 얌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쪽으로 비켜선 임동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청록색 화염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준을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깨긴 깼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꼬자, 뼈처럼 하얀 불씨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속에서 퍼져 나왔다.
그 회백색의 불꽃은 이번에 이준이 세 개의 마수의 불꽃을 융합시켜 만들어 낸 ‘악마의 불꽃’이었다.
뿌듯한 눈빛으로 그 작은 불씨를 거두어들인 이준은 눈앞에서 빛나는 은빛 구멍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연금성, 별의 불꽃. 내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