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연금
이준이 피식 웃으며 한샘을 옥병 속으로 밀어 넣은 뒤 손가락을 튕기자, 또 다시 무형의 화염이 병의 입구를 막았다.
옥병 안에서는 끊임없이 한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옥병을 다시 저장 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풍존자 선생님. 이제 어떡합니까?”
이준이 머뭇거리며 풍존자에게 물었다.
“이번 일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돼. 놈들이 약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일이 더욱 어려워질게야. 너는 일단 기다리거라. 내가 흑명성으로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키도록 하마. 놈들의 전력을 확인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을게야.”
“하지만 시간이 지체된다면…….”
이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리자, 풍존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중주에서도 약선 그 친구 수준의 연금술사는 흔치 않아. 영혼의 궁전이라 해도 그를 쉽게 죽이지는 못 할거야.”
풍존자의 마음 역시 이준 못지않게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준과 달리 그는 아직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투존 강자다운 태도였다.
“이제 나는 먼저 성운각으로 돌아가 놈들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겠다. 자네는 어쩌겠느냐?”
풍존자가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중주 중앙으로가서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이제 대회가 일 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연금술 경연대회? 하하, 그것도 좋지! 약선 그 친구도 그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었지. 게다가 순위권에 든다면 별의 불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자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겠어.”
이준은 웃으며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투종부터는 1성을 올리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혼의 궁전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올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가장 빠르게 실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잠시 후, 풍존자가 말없이 저장 반지에서 오래된 옥을 하나 꺼내 이준에게 건넸다.
“이 성옥(星玉)을 가지고 있거라. 이후에 내가 이 물건을 통해 너를 찾으마.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난다면 이것을 깨뜨리거라. 그럼 내가 즉시 찾아가 너를 도와주마.”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옥을 건네받은 뒤 저장 반지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풍존자 선생님.”
이준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풍존자는 웃으며 이준의 어깨를 잡았다.
“약선이 너에게 그 수련법을 물려준 것을 보니 널 얼마나 아꼈는지 알겠구나. 한샘도 그것을 탐냈지만, 약선은 끝내 그 놈에게 수련법을 넘기지 않았지. 참으로 잘한 일이야. 한샘같이 간악한 놈에게 그 수련법을 넘겼더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선하구나.”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로가 얼마나 자신을 아꼈는지를 떠올리자, 또 다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그에게 약로는 피만 섞이지 않았지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성운각에 돌아가는 즉시 흑명성에 있는 분전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리고 약선과 친분이 있는 강자들 중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할테니, 자네는 자네 할 일을 하고 있게. 내 생각대로라면, 반드시 약선을 구할 수 있을게야.”
성운각은 중주에서도 손에 꼽는 세력이었지만, 영혼의 궁전에 맞서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영혼의 궁전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지 못 했으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 모아야 했다.
성급하게 굴었다가는 약로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운각마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풍존자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시간이 없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 보마. 그리고 봉연 그 아이를 조심하거라. 그 아이는 아직도 너를 의심하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혹시라도 봉황 마수족과 맞부딪히게 된다면 곧바로 성옥을 깨거라.”
이어지는 풍존자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예를 표한 뒤 임동수와 함께 독수리의 등에서 뛰어내려 지상으로 향했다.
이준과 임동수가 멀어지자, 풍존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주 서부지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약선……. 내 이번에는 반드시 자네를 구하고 말겠네.”
곧이어 거대한 독수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날개를 펄럭이며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한편, 풍존자와 헤어진 이준과 임동수는 가까이에 있는 산정상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준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드디어 풍존자를 찾았다. 이제 아버지와 스승을 구할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투종이 되면서 스스로 악마의 반점을 없앨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단번에 독소를 모두 빼낼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천천히 독소를 태워가며 그 안에 담긴 염력을 활용해 실력을 높이면 그만이었다. 목숨을 위협하던 맹독이 실력을 올리기 위한 보물이 된 것이다.
“이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연금탑은 어느 도시에 있죠?”
임동수의 질문에 이준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사실 그는 연금탑이 중주 중심에 위치하는 것만 알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 했기 때문이다.
풍존자에게 물어봤어야 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이런 중요한 질문을 잊고 말았다.
이에 임동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이준을 바라봤다.
“하아……. 설마 그것도 모르면서 대회에 나가겠다고 한 거야? 연금술사의 탑은 연금성에 있어. 연금성을 중심으로 반경 삼, 사백 키로미터 정도는 모두 연금탑의 세력 범위에 속해있지. 하지만 여기서 연금성까지 가려면 공간 통로를 활용해도 한달은 걸릴걸?”
“그럼 연금성까지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이준은 씩 웃으며 임동수를 바라보았다. 길잡이 없이 무턱대고 연금성까지 찾아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하지만 운 좋게 이곳에서 임동수를 만났으니,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아직 대회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미리 가서 아라를 찾아야 했다.
“알겠어.”
임동수는 흔쾌히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탑에서 열리는 그 연금술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거지? 헤헤, 류지안의 가문 역시 그 구역에 있는데.”
“류지안 선배요?”
익숙한 이름을 듣자 이준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녀석이 널 보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었어. 지금은 그 놈이 가주가 됐거든. 뭐, 가문의 늙은이들은 그 놈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기는 하지만…….”
“가는 길에 잠시 보고 가는 것도 좋겠네요.”
말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별똥별처럼 먼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 *
이곳은 오묘하게 다른 세계.
멀고 긴 하늘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늘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 안개에 갇혀있었고, 천지의 에너지는 다른 곳보다 몇 배는 짙었다.
서슬 퍼런 기세로 우뚝 솟아오른 빼곡한 산들이 받치고 있는 푸른 하늘에서는 드문 드문 별똥별들이 지고 있었다.
바다처럼 펼쳐진 구름 아래로는 거대한 검처럼 매섭고 험준한 산봉우리가 가득했다.
구름이 자욱하게 낀 산 정상에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둥근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청색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눈을 감고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여인은 마치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산봉우리에 가득한 천지의 에너지는 끝도 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인이 눈을 뜨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부신 금빛 화염이 타오르다 사라졌다.
“영로, 그만 나오시지요.”
낭랑한 목소리가 적막을 뚫고 산봉우리에 울려 퍼지자, 그녀의 등 뒤에서 늙수그레한 사내의 그림자 하나가 솟아났다.
“아가씨의 감지 능력이 갈수록 예리해지는군요. 이제 이 늙은이 실력으로는 감히 속일 생각조차 하지 못 하겠습니다.”
노인의 아첨 섞인 농에 여인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뒤 새하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바쁘시지 않다면 제가 잠시 수련을 방해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의 정체는 바로 이은의 명에 따라 이준을 보호하고 있던 세형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서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당연히 이준이 꿈에도 그리던 ‘이은’이었다.
“가문 내의 일이라면 듣고 싶지 않네요.”
이은이 하얀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손가락을 휘젓자, 자욱한 구름이 살아있는 것 마냥 움직이며 한 남자의 얼굴을 그려냈다.
“글쎄요……. 그 얼굴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래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인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최근에 들었던 소식에 따르면 중주 북부지역에 이준이라는 젊은 아이가 나타났다고 합…….”
후욱!
그 순간, 안개로 만들어졌던 얼굴이 사라지며 이은의 가녀린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세형이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그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장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고계에서 나가겠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 위로 반짝이는 빛을 내뿜는 두 개의 물체가 지나가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제 북부 지역 끝부분까지 온 것 같아. 하지만 이 속도라면 최소 2, 3개월은 더 가야 연금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천풍성으로 가자. 그곳에 중주 중심으로 향하는 공간 통로가 있어. 그 공간 통로를 활용하면 한 달이면 중부로 갈 수 있을 거야.”
앞장서서 날아가던 임동수가 고개를 돌려 이준에게 말했다.
이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아라와 못만난지도 이미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연금성에 도착해야 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얼굴을 가리는 것이 좋을 거야. 사대각 대회 이후 봉연보다 네가 더 유명해졌으니까. 게다가 네 몸에 있는 그 봉황의 피 때문에 봉연이 아직도 너를 찾고 있을거야.”
임동수의 말에 따라 이준은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얼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면을 꺼냈다.
풍존자 역시 봉황 마수와 얽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으니, 우선은 신분을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도시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서 가자, 거의 다 왔어.”
* * *
그대로 20분 정도를 날아가자, 공간 통로가 있다는 천풍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에 들어간 이준은 바로 공간 통로로 가지 않고 경매장을 돌며 마수의 불꽃을 구매했다.
그가 이번에 구매한 마수의 불꽃은 모두 세 개로, 천지의 불꽃에 비하자면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물건이었다.
임동수는 돌아다니며 마수의 불꽃을 사는 이준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딱히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을 모두 구매한 이준은 임동수와 함께 천풍성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이준은 엄청난 크기의 칠흑 같은 공간 통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천풍성의 공간 통로는 이전에 보았던 공간 통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기였다.
“천풍성의 공간 통로는 투존 강자 두 명이 함께 만든 거야. 오랜 시간동안 공간 폭풍이 생기지 않고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지. 덕분에 천풍성 사람들은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지.”
놀란 눈으로 공간 웜홀을 바라보는 이준의 모습에 임동수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가자, 시간이 많지 않아. 더 늦는다면 오늘내로는 출발하지 못할거야.”
임동수는 빠르게 바위 위로 올라가 그 공간 통로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통행료를 지불한 뒤 이준과 함께 공간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