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호흡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네? 설마 그게 약속한 사과는 아니겠죠? 아니면 제가 풍뢰각식 사과법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건가요?”
이준이 빈정거리며 나정필을 바라보자, 봉연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이준과 나정필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야.”
봉연의 사과를 들은 이준은 더 이상 말조차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풍존자의 뒤로 물러났다.
“하하, 이미 경기결과가 나온 것 같군요. 약속대로 오늘 이후 이준과 풍뢰각 간에 있었던 문제는 없던 일로 해야지요?”
나정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풍뢰각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것을 자신이 깨뜨릴 수는 없었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 우리 풍뢰각에서는 더 이상 자네를 쫓지 않겠네. 너와 우리 풍뢰각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언쟁하지 않겠네.
다만 풍뢰각의 비전 무투기가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간다면, 그 때는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네.”
나정필의 위협 섞인 말에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 하시지요, 각주님.”
“역시 풍뢰각주님은 도량이 참 넓으십니다. 게다가 제자의 실력이 이리 대단하니 이번 4대각 대회의 우승자 자리도 풍뢰각의 차지겠군요. 제 제자는 봉연에 비해 아직 많이 부족하니 이번 대회는 여기서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풍존자가 한마디를 덧붙이자, 나정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니, 이제 와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풍존자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사대각 대회의 우승자 자리를 순순히 넘겨주었다는 점 정도였다.
풍존자의 말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검존자와 황천존자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용은 절대 봉연의 상대가 될 수 없고, 강신 역시 시작하자마자 이준에게 당해버렸으니, 차마 누가 입을 열 수 있을까.
비록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도 없는 허울뿐인 자리였지만, 사대각대회 우승자 자리를 넘겨받은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대회가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후에 시간이 있다면 다시 들리죠. 그럼 이만.”
풍존자는 나정필에게 인사를 남긴 뒤 가볍게 팔을 휘둘러 바람의 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사방에서 돌풍이 불어닥쳐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가자.”
풍존자는 모청연과 함께 독수리의 등 위에 올랐고, 이준 역시 임동수를 불러 그 뒤를 따랐다.
곧이어 독수리의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하늘을 가르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
거대한 독수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검존자와 황천존자 역시 제자와 함께 신속하게 번개산을 떠났다.
사대각의 나머지 각주들이 모두 떠나자, 나정필의 얼굴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네가 느낀 것이 확실히 고대 봉황 마수의 기운이 맞느냐?”
“확실합니다. 하지만 왜 찾아내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봉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너는 돌아가 봉황 마수의 황족에게 이 일을 알리 거라. 그렇다면 네 가문에서 이준을 잡으려 하겠지.”
봉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물감을 뿌린 듯 짙은 남색 하늘 위로 강한 바람이 일며 거대한 독수리가 번개처럼 스쳐갔다.
이준은 양반 다리를 하고 독수리 등에 앉은 채 이미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진 풍뢰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때, 이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며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에서는 청록색의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풍존자가 갑자기 이준의 옆으로 다가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준의 손 위에 피어오른 화염 속에서는 짙은 에너지를 머금은 청홍색 액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풍존자, 모청연, 임동수 세 사람은 모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연이 고대 봉황의 피를 찾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준이 그 피를 이화 속에 숨겨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색이 짙다니, 역시 고대 봉황 마수의의 피야. 이 정도면 최소 투존급 이상의 마수였을텐데…….”
열기를 내뿜는 청록색 화염 속에 떠다니는 청홍빛 피 세 방울을 바라보던 모청연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이 청홍빛 피가 얼마나 진귀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청연의 말에 풍존자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이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봉황 마수 중에서도 원로급에 속하는 존재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보물이 어떻게 이준의 손에 있단 말인가?
“투존 계급 봉황마수의 피라면 봉황마수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이번 일은 어디 가서도 말하지 말거라.”
“그런데 왜 네 얼굴색이…….”
이준의 얼굴을 확인하던 임동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준의 몸은 마치 불에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뜨거웠고, 얼굴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마냥 핏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 방울 말고 몸속에 더 많은 피가 남아있는 모양이구나.”
풍존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떡하죠?”
임동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봉황 마수의 피 안에는 그들의 힘이 담겨 있어요. 보통 사람이 그걸 한 번에 대량으로 몸 안에 들였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죠……. 만일 한 번에 모두 흡수하려 들었다가는 몸이 터져서 죽을지도 몰라요. 빨리 몸 안에 있는 피를 모두 빼내야 해요.”
모청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풍존자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빼낼 수 없다. 천지의 불꽃 속에 피를 숨긴 덕에 봉연의 눈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봉황 마수의 피가 이미 모두 녹아 이 아이의 몸에 들어간 것 같구나.”
이미 몸 안에 흡수된 봉황 마수의 피는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해도 함부로 빼낼 수 없었다. 억지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준의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아야겠구나.”
풍존자는 그렇게 말하며 이준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 사이 이준의 피부는 점점 뜨겁게 달아올라 어느 새 불에 달군 인두마냥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으윽…….”
있는 힘을 다해 몸속의 고통을 억누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마수의 시체에서 다섯 방울의 피를 추출했었다. 지난 번 아카데미에서 연금비약을 만들며 한 방울을 사용했고, 지금 남은 것은 네 방울 이었다. 조금 전에 세 방울이 빠져나왔으니, 이제 몸속에 남아있는 피는 오직 한 방울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방울의 피가 이준의 온 몸을 헤집고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준은 이를 악문 채 정신을 집중해 미간에 있는 새하얀 문양에서 영혼의 힘을 끄집어낸 뒤 그것으로 온 몸에 퍼져있는 봉황 마수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아나갔다.
하지만 봉황 마수의 피안에 담긴 에너지는 고집 센 야생마처럼 미쳐 날뛰며 영혼의 힘에 저항했다. 투종이 되지 못했더라면 그 에너지를 갈무리하기는커녕 혈관 속에서 미쳐 날뛰는 에너지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채 몸 안을 떠도는 난폭한 에너지를 한 군데로 끌어 모으기 시작한지 대략 10분 정도가 지나자, 체내에 퍼져있던 청홍색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여 손바닥만 한 에너지 덩어리가 되었다.
마침내 몸 안에 떠도는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이자, 청록색 화염이 뿜어져 나와 그 에너지 덩어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곧이어 불그릇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며 혈액 안에 담긴 에너지를 서서히 무력화 시켰고, 연기가 된 청홍색의 에너지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천지의 불꽃에 의해 정련된 청홍빛 연기는 천천히 이준의 뼈, 경맥, 근육, 세포 속으로 스며들었다.
‘역시 이 안에 담긴 에너지는 정말 엄청나군. 이걸 연금비약으로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준은 감탄하면서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피를 흡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청연의 불꽃이 없었다면 몸속은 이미 미쳐 날뛰는 봉황 마수의 에너지에 의해 갈가리 찢기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몸 안에 흡수되는 에너지로 인해 이준은 자신의 몸이 마치 마수의 그것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상승하는 체내의 힘을 견뎌내야만 했다.
마수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봉황 마수의 힘은 인간에게 허용된 한계치를 넘는 것이었다. 자칫하다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몸이 터져버릴 수도 있었다.
‘몸이 터진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 청홍빛 연기는 몸을 강하게 만드는데는 더할 나위 없는 영약이었지만, 과욕을 부렸다가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다.
이준은 청록색의 불그릇에 정신을 집중한 채 청홍빛의 에너지 덩어리에 에너지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지금 그 안에는 약 삼분의 일 정도의 에너지가 남아있었지만, 그것마저 흡수하려 들었다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터질 것 같았다.
순간 등 뒤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이 상황에서 이 피를 정련하지 않는다면 체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혈관을 몽땅 찢어놓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연기로 만들어 몸 안에 흡수하려 들었다가는 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이준이 고심하는 사이에도 불그릇에서는 청홍빛 연기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이 찢겨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길, 어떻게 하지?’
이준의 혈색이 서서히 정상을 되찾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청연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스승님, 지금 이 아이가 봉황 마수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것 입니까?”
풍존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간이 봉황 마수의 에너지를 무리해서 흡수했다가는 몸이 터져버릴 텐데…….”
이어지는 모청연의 말에 이준을 바라보던 임동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바로 그 때, 이준의 몸에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젠장,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건 폭발의 징조인데…….”
그 순간, 풍존자가 이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에 모청연은 황급히 풍존자의 팔을 붙잡았다.
“스승님, 지금 이 상태에서 다른 에너지가 들어간다면 이 자리에서 폭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두면 이 아이가 죽는다.”
풍존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스승님, 안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함부로 손을 댔다간 정말 일이 커질 수도 있어요! 저 아이가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모청연의 말에 풍존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렸다.
“조금 더 기다려보고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땐 내가 손을 쓸 수밖에 없다.”
“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녀석, 겁이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정말 엄청난 짓을 하네요. 봉황의 피 속에 있는 힘을 흡수하는 것은 봉황 마수의 황족들이나 가능한 일인데 인간이 이런 짓을 하다니.”
독수리가 거대한 날개를 허공에 펄럭이자, 주위에 강한 바람이 일면서 공기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 이준의 몸은 몇 번이나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