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젊은 강자들의 싸움
“번개의 움직임은 제가 중주 밖에서 경매로 산 물건입니다. 훔쳤다면 이렇게 당당히 이곳에 왔겠습니까?
번개의 분신도 풍뢰각 사람들이 제 말을 믿지 않아 싸움을 벌이던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것이지 결코 훔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천이 되찾아갔지요.”
이준이 나정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정필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이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연신 한숨을 내뱉을 뿐,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후……. 어쨌든 이번일은 이준과 풍뢰북각이 먼저 일으킨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비천님에게 이 일을 넘기겠소.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이기고 지든, 풍존자님과 저는 둘 다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요. 어떠십니까?”
나정필의 제안에 풍존자는 고개를 돌려 아래에 있는 비천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천에게 이 아이가 상대가 될 리가 없잖소. 약하고 어린 자를 괴롭히는 건 좋은 일이 아니오.”
풍존자의 반박에 나정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풍존자님은 도대체 어찌하고 싶은 것인지요? 우리 풍뢰각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저 놈을 놓아 주라고 하시는 것 입니까? 그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하,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연배가 훨씬 높은 비천님이 직접 손을 쓴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젊은 강자를 불러 저 자와 겨루게 하는 건 어떻소?”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이번에도 검존자가 웃으며 중재안을 내놓았다.
“검존자님의 말은, 봉연과 이준을 싸우게 하란 말이오?”
나정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봉연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감춰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검존자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봉연을 바라봤다.
이에 나정필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풍존자와 한판 붙어야할지도 모르니, 검존자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럼 봉연 네가 나서 보거라. 만일 이준이 진다면, 이후 풍뢰각의 무투기를 사용하지 못 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고, 봉연이 진다면 이준과 풍뢰각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하겠소.
어떠합니까? 물론, 이 결투의 전제 조건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른 이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이오.”
나정필은 말을 마치며 이준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는 이미 이준의 몸에 실력이 막강한 영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 챈 상태였다.
이 말에 풍존자는 선뜻 답을 하지 못 하고 이준을 바라봤다.
그 역시 봉연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존자가 고민하는 사이 광장 구석에 있던 봉연이 사뿐히 걸음을 옮겨 이준에게로 다가갔다.
“설마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봉연의 뻔한 도발에 이준은 피식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비천을 도발하고 스승의 반지를 건넨 것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지, 그의 힘을 빌어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 풍뢰각의 다른 각주들에게 이 문제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두지 않았던가.
물론 상황이 잘풀려 풍존자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상대가 비천에서 봉연으로 바뀐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비천을 상대로는 도망치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했지만, 봉연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오랜 친구를 위해 기꺼이 풍뢰각과의 전쟁까지 감내하려는 풍존자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예쁘장한 여자 분에게 손을 쓰려니 마음이 아파서요.”
이준이 두려워하는 내색이 없자 풍존자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의 대범함을 칭찬했다.
그 동안 이준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체의 도움을 받아 풍뢰각의 추격을 피해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풍존자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정필은 이준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이 결투는 오로지 이준 혼자만의 힘으로 치러야 했다.
“조심하거라. 내가 보기에는 피의 못에 다녀온 이후 봉연 저 아이 역시 투종이 된 것 같구나. 그리고 아마 같은 등급 내에서는 저 아이보다 강한 아이를 찾기 어려울 것이야.”
풍존자가 이준의 귀에 머리를 가까이하며 조용히 말했다.
“막아내지 못할 것 같다면 굳이 맞대응 할 필요 없다. 봉연의 재능은 이 늙은이가 본 젊은 아이들 중에 가장 뛰어나니,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다면 그냥 포기하거라. 만일 나정필이 끝내 너를 해치려 한다면 내 목숨을 걸고 너를 구해주마.”
풍존자의 말에 이준은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강신은 피의 못을 다녀온 후로 준투종이 되었지만, 봉연은 단번에 투종이 된 모양이었다. 이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풍존자가 말한 ‘재능’이라는 말이 단순히 투사로써의 재능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최선을 다해 눈앞의 상대에 맞설 뿐이었다.
이는 자신의 호승심 때문이 아니라, 풍존자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준이 자세를 잡자, 광장에는 점점 긴장된 분위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봉연은 최근 들어 중주 북부 지역 젊은 층 사이에서 가장 강한 젊은 강자로 손꼽혔으며, 사대각의 제자 중에도 감히 그녀에 비할 자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풍뢰각 내에서 2성 투종 장로와 겨뤘을 때도 패배하지 않았다.
물론 승리한 것도 아니지만, 그 때 그녀는 투황 최고 수준에 불과했으니 투종이 된 지금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준 역시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천북성에 나타나 홍 씨 가문의 인재 홍신을 이기고 심운과 홍천효, 두 투종 강자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풍뢰각 삼대 장로가 이끄는 번개의 진을 무너뜨리고, 북각주 비천의 손에서 도망쳤다.
이는 봉연보다 결코 못하다고 할 수 없는 전적이었다.
물론 이준의 옆에 있는 강한 영혼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실력도 없는 자가 영혼체의 힘을 빌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준과 봉연의 싸움은 어쩌면 지금 시대의 젊은 강자 중 진정한 최강자를 가리는 싸움일지도 몰랐다.
* * *
비천은 나정필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세 투존이 내린 결정을 투종인 그가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면서도 일단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나정필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이준과 풍존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풍존자가 왜 갑자기 이준을 감싸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자식, 도대체 풍존이랑 무슨 관계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정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비천을 바라봤다.
“봉연이 자네 대신 손을 쓸테니 너무 화내지 말게.”
“심운 장로가 저 놈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설마 이 일을 이렇게 넘기려는 건 아니겠지요?”
비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성운각과 전투를 벌여 우리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자네 말대로 그냥 넘기지 않겠네.”
나정필의 싸늘한 한마디에 비천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풍존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설사 성운각과 풍뢰각이 전쟁을 벌여 풍뢰각이 승리한다 하여도 그 타격이 너무나 커 더 이상 사대각 중 하나의 자리를 유지하게 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약간의 부상은 피할 수 없지요. 풍존자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정필이 음산한 기운이 도는 눈빛으로 이준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각주님 그 말은…….”
“내가 이미 봉연에게 기회가 보이면 강하게 대응해도 좋다고 일러두었소.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나정필의 말에 비천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 * *
한편, 광장 위에서는 봉연이 말없이 이준을 바라보며 그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이준의 기운은 천목산에서 봤을 때보다 확실히 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왜 풍존자님이 널 지켜주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겁도 없이 이곳까지 온 것이라면, 그건 너무 바보같은 선택인 것 같군.”
청아한 봉연의 목소리가 광장 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준은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천천히 청록색의 염력을 내뿜을 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체에, 이번에는 풍존자님까지, 남의 힘을 빌어서 잘난 척 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봉연의 비아냥 섞인 도발에 이준은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로 눈을 위로 들어 그녀를 바라보다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봉연 아가씨가 이렇게 시끄러운 여자인지 몰랐네요.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돼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죠? 걱정마세요. 그렇게까지 심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 순간, 예쁘장한 봉연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지며 두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기대하지요.”
이준의 말이 끝나자 봉연의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고, 맑고 커다란 눈망울이 눈꺼풀에 의해 덮어졌다.
그녀가 두 눈을 감는 순간, 광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봉연이 천천히 두 눈을 뜨자, 살기로 가득한 두 눈에서 풍뢰각 특유의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봉연의 두 눈이 은색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자, 돌연 진청색으로 된 염력 소용돌이가 형성됐다.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는 은색의 번개가 끊임없이 번쩍이며 보는 이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거대한 염력 폭풍에서 퍼져 나오는 위압감에 광장에서 이를 지켜보는 무수한 사람들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폭풍 속에서 나오는 흡입력에 의해 단단한 은빛 광장이 끊임없이 갈라지기 시작하며 지면이 뒤흔들렸다.
하지만 이준의 몸은 마치 바닥에 붙은 듯 폭풍의 강한 흡인력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풍뢰각의 풍뢰염력인가…….”
폭풍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짙은 바람 속성 염력을 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두 개의 염력이 이토록 완벽하게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람의 날카로움과 번개의 강한 힘이 완벽히 융합된 풍뢰염력에서 나오는 위력은 평범한 염력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게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이상한 힘의 정체였나보군.’
그녀의 염력은 마치 여러 개의 불꽃을 혼합해 만들어낸 자신의 염력과 비슷했다.
아마도 자신보다 실력이 높은 강자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이유가 이것인 듯했다.
슉!
이준이 마음속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있을 때, 거대한 폭풍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두른 진청색의 비단이 튀어나와 이준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허공이 일그러지며 비단이 옆으로 빗겨나갔다.
쉬익!
그러자 폭풍 속에서 강한 바람 소리가 나더니, 비단이 살아있는 뱀마냥 빠르게 방향을 바꿔 이준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이준의 몸이 살짝 흔들리더니,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슉!
그러나 진청색의 비단은 계속해서 사냥감을 쫓는 뱀처럼 이준에게 따라붙었다.
평범한 천 쪼가리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이준은 온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봉연의 염력을 두른 비단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 바위조차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