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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498화 (498/818)

제498화. 들통난 정체

“네 이놈, 얼굴에 있는 그 물건을 당장 치우거라!”

광장에 있는 사람들 역시 이준과 풍뢰각 사이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자가 정말 이준이라면, 시체가 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때, 임동수가 이준의 곁으로 다가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달려들까?”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임동수와 자신의 실력으로는 나정필은 커녕 비천도 이길 수 없었다.

“괜찮아요. 나한테 맡겨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준이 얼굴에 붙여둔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뺌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지막한 천둥소리가 울리며 비천의 몸이 사라졌다가 은빛 섬광과 함께 광장 위에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이준은 곁에 서있던 임동수를 밀어냈다.

퍽!

다음 순간, 번개를 두른 비천의 손이 이준의 등을 관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준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잔상?”

자신이 공격한 것이 이준의 잔상임을 확인한 비천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곧바로 고개를 들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달 못 본 사이에 실력이 제법 늘었구나.”

“몇 달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더 급해지셨군요.”

말을 마친 이준은 대범하게도 비천을 무시하고 투존인 나정필을 가리켰다.

“기왕 이렇게 된거 투존의 실력을 보여주시지요. 풍뢰북각의 각주가 저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준의 당돌한 태도에 관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정필을 도발하다니, 이건 담이 큰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준의 행동은 결코 무의미하게 투존 강자를 도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서 나정필이 직접 손을 쓴다면 풍뢰북각의 각주인 비천이 새파란 애송이를 당하지 못 할 것 같아 투존이 직접 나섰다는 소문이 돌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정필이 직접 손을 쓴다면 자신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정필이 그런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해 직접 나서지만 않는다면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투종이 된 이상, 비천을 이기지는 못 해도 달아날 수는 있으리라는 것이 이준의 계산이었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나정필도, 다른 강자들도 나서지 않아야 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비천과 나정필을 도발해 그런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녀석 참으로 교활하군.”

이준의 속내를 읽은 검존자는 가볍게 웃으며 나정필을 바라봤다.

“어린 놈이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구나. 걱정 말거라.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비천이 네 놈을 끝장내 줄 테니까.”

나정필이 자신의 도발에 걸려든 듯하자,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풍뢰각의 다른 각주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각주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각의 각주가 저에게 망신을 당하기 전에 손을 보태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푸하하! 정말 배짱이 두둑한 놈이구나. 걱정 말아라. 이는 북각의 일이므로 서각과 남각은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천둥처럼 큰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는 바로 풍뢰서각의 각주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비천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준을 죽인다 해도 그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풍뢰북각의 각주씩이나 되는 자가 스물을 갓 넘은 애송이를 상대로 손을 쓰는 것 자체가 이미 구설수에 오를만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마치 비천 하나라면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듯 모두가 보는 앞에서 풍뢰각의 다른 각주들이 끼어들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고 있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자신이 이준을 놓치고, 다른 각주들이 끼어든다면 풍뢰각은 중주 전체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자신이 직접 이준을 잡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놓쳐서는 안 됐다.

“네 놈이 꾀를 써서 운 좋게 한번 내 손에서 벗어났다고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구나.”

비천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광장 위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사방에서 천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 어서 도망쳐!”

임동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비천은 중주 전체에서 이름난 강자 중 하나였다. 제 아무리 투종이 된 이준이라 해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은 뒤 갑자기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반지 하나를 빼 움켜잡았다.

상대가 비천 하나라면 도망칠 자신이 있었으니, 이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풍존자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준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풍존자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젊은이, 잘 나가다 갑자기 나를 왜 찾는가? 설마하니 이제 와서 나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겠지? 미리 말해두지만, 이것은 자네와 풍뢰각 사이의 일이고, 자네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네. 그러니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말게.”

풍존자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손에 들린 스승의 저장반지를 그에게 던졌다.

만일 약로의 말대로 풍존자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일단 죽을힘을 다해 이 자리를 벗어난 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준이 집어던진 반지를 받아 든 풍존자의 몸이 순간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지를 받아든 풍존자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네……. 살아있었구만. 역시 살아 있었어.”

다음 순간, 풍존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에 나정필을 비롯한 다른 투존 강자들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꿈뻑이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준이 건넨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풍존자가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잠시 후, 풍존자가 눈물을 훔치며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도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말거라!”

풍존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마루에 울려 퍼지자, 산 정상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풍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감히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제자인 모청연마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제법 오랜 시간동안 풍존자를 따라 수련을 해왔지만, 이토록 진지한 표정을 한 스승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지금 풍존자의 발언은 자칫 풍뢰각과 갈등을 빚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준이 건네준 물건이 대체 무엇이기에 천하의 풍존자에게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아는 사람의 제자라고?”

모청연은 천목산에서 이준이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대체 그 ‘아는 사람’이 누구길래 풍뢰각을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정필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이 무슨 뜻 입니까 풍존님?”

나정필의 분노가 서린 목소리에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하하, 풍존자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할 말이 있다면 좋게 대화로 푸시지 않고…….”

검존자 역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천존자는 마음속으로 픽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풍존자가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떠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 자와 무슨 관계 인거지?”

상황이 이쯤 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이준이 풍존자에게 건네준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풍존자의 반응에 공중에 떠있는 이준의 입가에는 뜻 모를 미소가 피어 올랐다.

‘이 사람은 정말로 믿을 수 있겠어.’

잠시 후, 이준이 풍존자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히 예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사제지간 입니다!”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존자의 몸이 사라졌다가 이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풍존자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이마에 있는 불의 낙인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하얀색의 작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얼음불꽃의 정수…….”

이준의 손 위에서 흔들리는 하얀 화염을 보는 순간 풍존자의 눈가에 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이 화염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사경을 헤맬 때 이 하얀 화염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으로 봤을 때, 이 불꽃은 힘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풍존자의 오랜 친구가 직접 이준의 몸속에 넣은 것이 분명했다.

“이 영감탱이, 내가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풍존자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그리움에 이준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를 지켜봤다. 표정과 목소리만으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풍존자님…….”

“그 친구의 제자라면 내 제자나 다름이 없으니 편하게 부르거라. 나의 이름은 풍한이다. 누군가 너에게 스승이 누구냐 묻는다면 내가 너의 스승이라고 답해도 좋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가르쳐주마.”

중주에서 풍존자를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한동안 그에게 제자라고는 모청연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이 역시 그가 원해 모청연을 제자로 들인 것은 아니었기에, 풍존자가 직접 스승이라 부르게 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옛 친구의 제자가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준이 인사를 올리자, 풍존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은 나에게 맡기거라.”

말이 마친 풍존자는 이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나정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정필님, 내 이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상을 하겠소. 그러니 이 아이에게서 손을 떼주시오.”

“이건 풍뢰각과 이준의 일입니다. 하지만 풍존자님께서 손을 쓰신다면, 이건 풍뢰각과 성운각의 일이 되지요.”

나정필은 풍존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풍존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에 이준은 물론이고 나정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준과 달리 나정필은 풍존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놀라움이 더욱 컸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일을 처리할 리가 없었다. 그는 도리나 예의를 중시했으며, 힘을 앞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풍존자는 사대각의 네 투존 중 가장 오래 전에 투존이 된 자였으며, 실력 역시 가장 뛰어났으니, 정말로 전투를 벌인다면 만에 하나 이긴다 해도 풍뢰각 역시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자와 무슨 관계입니까? 왜 그를 지키려 하는 것 입니까?”

나정필이 굳은 얼굴로 풍존자에게 물었다. 사실 그 질문의 답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풍존자님, 이준은 우리 풍뢰각의 번개의 움직임을 훔쳐 배웠으며 번개의 분신의 수련법을 훔쳐갔습니다. 이 자를 용서하면 사람들이 우리 풍뢰각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정필의 질문에도 풍존자의 얼굴은 말라버린 우물처럼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벗인 약로의 제자가 정말로 풍뢰각의 물건을 훔쳤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약로가 그 수련법을 건네주었을 것이다. 아니, 설령 정말로 훔쳤다 하더라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친구의 제자가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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