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화. 합일
강신은 비수를 움켜쥔 채 다시 한 번 이준을 조롱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면 용서해주지. 어때?”
하지만 이준은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쥘 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염력이 뿜어져 나오며 기다란 청록색 장검이 솟아났다. 검은 송곳을 사용하면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염력으로 만든 장검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듯한 이준의 태도에 강신의 눈에는 더욱 짙은 살기가 내려앉았다.
“건방진 놈. 이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늦었다.”
말을 마치는 순간 강신의 몸이 빠르게 흔들리더니 검은 빛이 되어 단숨에 이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챙! 챙!”
강신은 두 자루의 비수로 이준의 목과 등을 노렸지만, 청록색의 장검이 가볍게 그 공격을 막아냈다.
공격에 실패한 강신은 곧바로 음산한 검은색 염력으로 비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비수는 거대한 흑색 구렁이가 되어 이준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폭음이 일며 두 개의 구렁이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것 밖에 안 되다니. 이래서야 황천각의 명예는 회복할 수 없겠는걸.”
염력으로 만들어 진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이준의 목소리에 강신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놈이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강신의 혀가 비수를 핥자, 먹처럼 검은 염력이 체내에서 퍼져 나오며 거대한 검은 기둥이 되어 하늘로 솟아올랐다.
지금 강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염력은 거의 투종에 필적했다. 진정한 투종 강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투황 최고 수준의 강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염력이었다.
강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염력에 관람석에서는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봉연, 모청연, 승용 세 사람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죽어라!”
강신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염력을 폭발시키자, 그의 발밑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독사의 춤!”
다음 순간, 강신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두 개의 검은 비수가 이준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검은 비수에서는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기이한 에너지와 함께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육합자의 검!”
그 때, 이준의 손에 들린 청록색 장검이 그림자를 남기며 그물처럼 그의 몸 둘러쌌다.
땅땅땅땅!
검은 빛이 장대 그물 위에 쏟아지면서 경쾌한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맑은 소리가 날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 파동이 빠르게 퍼져 나오며 단단한 은빛 광장 위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이준이 강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관람석에서 또 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편,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황천존자의 얼굴에서는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단 몇 합 만에 이준의 실력이 강신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준의 실력이 강신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풍존자, 나정필, 검존자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살기를 풍겨대고 있는 황천존자와 달리 풍존자와 검존자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내려 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염력이 폭발하며 이준의 몸이 한 마리 용처럼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해일처럼 거대한 염력은 가볍게 강신이 만든 검망을 뚫고 나갔고, 이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그의 검 끝에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육합자의 검, 합일!”
‘육합자의 검’은 분열, 잠식, 합일의 세 단계로 나뉘는 무투기였다.
하지만 그간 이준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단계 중 오직 ‘분열’ 뿐이었고, ‘분열’ 단계의 강점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에 있었다. 분열 단계 수준의 육합자의 검으로 공격을 할 바에는 태양검을 사용하는 편이 모든 면에서 나았다. 그러나 투종이 된 지금은 육합자의 검의 모든 단계를 사용할 수 있었고, ‘합일’ 수준에 이른 육합자의 검은 공수 모두가 갖추어진 실로 완벽한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전에서 ‘합일’ 단계의 육합자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이준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합일’은커녕 ‘잠식’ 조차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일 단계에 이른 육합자의 검이 태양검보다 더욱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무투기를 사용하자, 청록색 불씨가 춤을 추며 장검의 칼끝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준의 천지의 불꽃이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진짜 화염처럼 보이는 그 청록색 불씨의 정체는 화염이 아니라 한없이 압축된 염력의 결정체였다.
염력을 이 정도까지 압축시키는 것은 그가 투종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투황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이 정도로 염력을 압축시킬 수 없었다.
칼끝에 내려앉은 청록색 불씨는 마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청록색의 장검 끝에서 춤을 추는 불씨를 발견한 순간 승용과 모청연, 봉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녀석……투종 강자였어?”
봉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염력이 압축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 투종이 된 거였어?’
임동수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한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이준은 투왕 최고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투종이 되어 있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준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투황 최고 수준도 아니고 투종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 순간, 그는 이준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강신과의 대결을 받아들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주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 사대각의 대표로 나온 제자들조차 투종이 되지 못했는데, 대체 이준은 무슨 수로 투종이 되었단 말인가?
놀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이미 함성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귀빈석에 앉아 있는 황천존자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머지 세 투존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에 투종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제 갓 스물을 넘어 보이는 청년이 투종이 되었다는 것은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해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일 이었다. 이는 절대로 재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나이에 투종이 되기 위해서는 투존 이상의 엄청난 실력자나 사대각 이상의 거대한 세력이 뒤를 봐주고 있어야 했다.
“엄청나군. 강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야.”
검존자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오.”
황천존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그럼 한번 지켜보지요.”
황천존자의 악에 받친 말에 검존자는 광장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한편, 이준의 칼끝에 모여든 기묘한 화염을 보고 상대가 투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강신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자식이 어떻게……어떻게 투종일 수 있지?’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스승인 황천존자였다. 만일 이준의 손에 패배한다면, 어떤 결과가 눈앞에 닥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사자(死者)의 손!”
강신이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지르자, 그의 검은 염력이 응집되어 거대한 손으로 변화했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손이 나타나기 무섭게 공간이 일그러지며 주위의 모든 것이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사자의 손이라니! 황천각 최고의 무투기 중 하나잖아!”
강신의 무투기를 알아본 몇 몇 사람이 화들짝 놀라 소란을 피우자, 관람석에서 또 다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이준의 칼이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검은 팔과 맞부딪혔다.
쾅!
두 개의 무투기가 맞붙자, 이내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며 주위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두 개의 에너지는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단단한 은빛 나무로 만들어진 광장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모래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쾅!
잠시 후, 또 한 번의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강신의 몸이 은빛 폭풍에 휘말려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커헉!”
처참한 몰골로 구덩이에 처박힌 강신은 피를 토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가 엉망이 된 사지를 움직이는 찰나, 돌연 그의 몸속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이건…… 그 놈의 염력이잖아…….”
* * *
은빛 폭풍이 천천히 사라지자, 이준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아주 제법이구나. 건방을 떨만한 실력은 되는군.”
황천존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살기와 분노가 가득했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준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황천존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광장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 잠깐.”
그러나 이준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강신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직 힘이 남아있나?”
“큭큭……. 생각도 못했네. 3개월도 안 돼서 투종이 되다니. 보아하니 네가 피의 못의 덕을 제일 많이 본 것 같군. 안 그래, 이준?”
강신의 싸늘한 한마디에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멍하니 얼어붙었다.
“이준? 풍뢰각과 한바탕 난리쳤던 그 이준?”
“풍뢰북각 3대 장로의 번개의 진을 무너뜨리고 비천의 손에서 벗어났던 그 이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준을 바라봤다. 설마하니 강신을 이긴 그 낯선 청년이 최근 북부지역에서 떠들썩한 이준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풍뢰각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제 발로 이곳에 오다니,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었다.
“이 녀석이 이준이라고? 미친 거야?”
승용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놈……. 진짜로 오다니.”
심지어 이준에게 사대각 대회에 오면 풍존자를 만날 수 있다고 일러준 모청연조차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이준이었군. 설마설마 했어. 보아하니 우리 풍뢰각이 어지간히도 우스운 모양이군.”
이준을 바라보는 봉연의 한쪽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투존들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가 최근 풍뢰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나정필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천, 이 자가 그 이준이오?”
나정필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준에 의해 체면을 구긴 황천존자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지으며 이준을 바라봤다.
한편 옆에 있던 풍존자와 검존자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침묵을 유지했다. 풍뢰각과 이준 사이의 문제는 외부인인 그들이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정필의 질문에 주먹을 쥔 채 가만히 이준을 바라보던 비천이 이를 악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풍뢰북각의 각주가 이런 애송이를 놓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었다. 헌데 자신을 망신시킨 장본인이 사대각 대회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비천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이준을 찢어죽이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