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대혼전
모두가 봉연이 어디 있는지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거대한 칠색 두루미가 광장 위로 날아와 상공을 빙빙 돌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지간히도 눈에 띄고 싶은 모양이군.’
일부러 마지막에 등장해 바로 광장으로 들어오지 않고 상공 위를 선회하는 봉연의 행동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봉연의 화려한 등장에 관객들은 물론이고 의석에 있던 풍존, 검존 및 황천존자마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허허, 저 아이는 아직도 실력을 감추고 있군요.”
“하하!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 아이의 신분이 특수해 부득이하게 이런 조치를 취한 것뿐입니다.”
검존자의 말에 나정필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나정필님이 이번에도 4대각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 같소.”
풍존 역시 봉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허허, 아닙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입니다. 풍존님의 제자인 모청연 아가씨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이 깨어난다면 봉연이는 절대로 이기지 못 할 것입니다.”
나정필은 손을 살짝 내저으며 겸양을 떨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반면 풍존자는 인자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자리에서 가장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황천존자였다. 강신은 확실히 자신의 가장 걸출한 제자였지만, 봉연과 비교했을 때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황천각은 사대각 대회에서 매번 꼴찌 자리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으니, 황천존자로써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광장의 각 모퉁이에서는 젊은 참가자들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은 하나 같이 각 지역이나 세력에서 내로라하는 인재였으니, 그 중에서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자라 해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중주답군. 흑각성에서는 각 세력에 한 둘 있을까 말까한 젊은 투황들이 이렇게나 많이…….’
자리에 모인 젊은 투황들의 면면을 살피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응?”
그 때, 시선을 돌리던 눈에 무언가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준의 시선이 멈춘 곳은 광장의 한 모퉁이였다. 그 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이준을 등지고 서있었다.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바로 그 때,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한쪽으로 돌렸고, 덕분에 이준은 그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에 이준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손뼉을 치며 놀라워했다.
“임동수 선배?”
익숙한 뒷모습의 주인공은 바로 운남종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임동수였다.
운남종과의 싸움이 끝나고 이준이 산골짜기에 틀어박혔을 무렵 임동수, 임수혁, 류지안 세 사람은 함께 가한제국을 떠났고, 그 후로는 행방이 묘연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한율에 이어 나설아에, 임동수까지, 중주에 오고 나서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참으로 인연이란 오묘한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모두 모였으니, 이제 대회를 시작합니다.”
그 때, 나정필이 광장에 가득 찬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나정필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광장에 무거운 공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53명의 참가자들은 서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견제했다. 우선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53명 중 8명만이 남을 수 있다고 했지만, 사대각의 제자 네 명이 살아남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49명 중 4명이 살아남는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장내에 긴장감이 돌면서 관람석 역시 조용해졌다.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광장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중주내의 젊은 투사들 중에 손에 꼽는 강자들이었으니, 사람들의 기대감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준은 임동수를 발견한 후 줄곧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준이 본 임동수의 현재 실력은 4성 투황 정도로, 다른 곳에서는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임수혁과 류지안은 왜 없는 거지? 분명 그 때 셋이 같이 떠났는데…….”
임동수, 임수혁, 류지안은 모두 이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천재적인 투사였으며, 운남종과의 전투에서 자신을 도와준 인물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말없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 이준은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지난 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챙!
그렇게 이준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광장에 있던 젊은 강자들 중 하나가 무기를 휘둘러 옆 사람을 기습했다. 이에 그에게 공격을 당한 이름 모를 투사는 기다렸다는 듯 염력을 폭발시키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두 사람의 전투를 신호탄으로 긴장된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지면서 형형색색의 염력들이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오십 여명의 투황이 전투를 시작하자, 방대한 염력이 관람석 너머까지 뻗어나갔다.
지금 광장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의 적이었다. 이에 50여명의 투황은 서로의 작은 몸짓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에게 조금만 다가와도 곧바로 상대를 공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손을 잡고 여럿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상황도 나타났고, 운이 없는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광장이 혼란에 빠질수록 관람석에서는 폭발적인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투사들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중주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격전을 벌이는 광경은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광장에서는 폭발음과 금속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앞의 공격을 막아내면 뒤에서 공격을 당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곧바로 눈앞에 주먹과 형형색색의 염력, 그리고 검이나 창 따위가 날아들었다.
만일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경우, 참가자는 스스로 항복을 외칠 수 있었고, 항복을 외친 자는 바로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10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열댓 명 의 참가자가 큰 부상을 입고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대로 남아있는다면 단순한 부상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사대각 대회는 이준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설마하니 이런 대회가 전통적인 1대1 대결 방식이 아닌 이런 개싸움으로 진행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대결 방식에서는 실력뿐 아니라 운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놀라운 것은 임동수가 4성 투황에 불과한 실력으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점 이었다. 자리에 있는 강자들 중 기껏해야 중간 수준에 불과한 실력으로 10분 이상 살아남은 것은 아마도 그가 새로 익힌 기이한 무투기 덕인 듯 했다.
지금 임동수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묘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는 마치 새끼 오리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며 끊임없이 뒤뚱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한심한 움직임이었지만, 투종이 된 이준이 보기에 그것은 번개의 움직임 못지 않은 굉장한 무투기였다.
“어디서 저런 무투기를 구한 걸까.”
임동수의 재미있는 몸동작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하지만 겉보기야 어쨌든, 이만한 강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10분 이상 살아남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선을 돌려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던 이준은 혼란스러운 광장 안에서도 안전하게 서있는 네 사람을 발견했다. 그 네 사람은 바로 봉연, 모청연, 승용, 강신 이었다.
이미 투황 최고 수준에 오른 네 사람은 싸늘한 얼굴로 광장 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자리에 있는 나머지 투황들은 그들이 한수 위라는 것을 인정하듯 그들 주위에 가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남은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광장 안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53명의 참가자 중 11명이 남게 되자, 그들은 광장의 각 귀퉁이로 흩어져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준은 광장 위에 서있는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11명 중에 임동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7성 투황 이상의 강자들이었다. 그가 이런 강자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던 것은 그 우스꽝스러운 무투기 덕분이었다.
게다가 지금 임동수는 어떤 의미에서 사대각의 제자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4성 투황이 이렇게 오래 버틴 것은 사대각 대회에서 처음있는 일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운이 따라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끝나자, 경쟁자들의 시선이 임동수에게 향했다.
곧이어 붉은 옷을 입은 8성 투황 하나가 바닥을 딛고 빠르게 임동수를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런 8성 투황의 공격에 임동수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침착하게 그 기묘한 무투기를 활용해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상대는 사냥감을 물어뜯는 맹수마냥 임동수에게 바짝 달라붙은 채 후퇴하는 임동수를 계속해서 압박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계속해서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준은 사내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붉은 옷의 남자는 몇 번이나 임동수를 공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임동수를 한 곳으로 몰아가기만 할 뿐 제대로 된 공격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이준의 시선이 임동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사내에게 고장됐다.
‘저 자식이 선배를 강신에게로 몰아가고 있어!’
이준이 막 사내의 의도를 알아챈 찰나, 후퇴하던 임동수의 발이 결국 강신의 공격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를 함정에 몰아넣는데 성공한 사내는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물렸고, 그와 동시에 살기가 가득한 검은 빛줄기가 독사처럼 임동수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자……잠깐, 항복!”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임동수는 검은 빛줄기가 자신의 몸을 강타하기 전에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임동수가 항복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흑색 빛줄기는 멈추지 않고 한 마리의 독사처럼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커헉-!”
강신의 공격에 임동수는 선혈을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그 순간, 장내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상대가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한 것도 문제였지만, 강신의 공격이 명백하게 상대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강신의 검은 독사가 물어뜯은 것은 임동수의 어깨가 아니라 목이었을 것이다.
장내에 가득하게 울려 퍼지는 야유에도 강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임동수를 바라봤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강신의 만행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분노한 임동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신은 두 자루의 검은 비수를 꺼내 임동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 뻔뻔한 놈, 네가 황천각 이름에 먹칠 하는 거냐!”
“저게 뭐하는 짓이야!”
계속되는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임동수를 죽이려는 강신의 행동에 관람석 곳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죽는 건가…….’
임동수는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의 실력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강신을 당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