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화. 4대 존자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돌길은 산을 따라 올라갈수록 짙은 구름층 사이에 가려지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준은 급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산길의 양쪽에는 은색 빛이 도는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은색 나무에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어 꼿꼿하게 뻗은 기둥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은빛 나무속에서 느껴지는 강한 번개의 힘은 이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혼 탐지능력을 통해 살펴보니 나무의 꼭대기에서부터 번개의 힘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하늘에 떠있는 그 짙은 구름 속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준은 잠시 자리에 멈춰 그 장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풍뢰산 전체에서 느껴지는 번개의 힘은 아마도 이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곳은 번개속성을 가진 투사들에게 있어 염력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래서 풍뢰각이 이곳을 선택했군.’
이준은 감탄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어디선가 거대한 새의 맑은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오묘한 칠색 빛을 뿜어내는 두루미가 산 정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봉연이군.’
순간 이준의 시선이 거대한 두루미 위에 타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에 고정됐다.
지금 봉연의 몸에는 분명 그녀의 기운을 감춰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투종이 된 이준이 봉연의 실력을 한 눈에 꿰뚫어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역시 사대각의 젊은 강자들 중 봉연이 가장 위험한 것 같군.’
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승용, 강신, 모청연 세 사람 모두 투종 강자와 겨룰 수 있는 히든카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이 정도로 위협적인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어쩌면 이번 사대각 대회의 최후 승리자는 저 여자가 될 수도 있겠군.’
이준은 입술을 살짝 삐죽거리다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의 높이가 제법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날카로운 소리가 이준의 귓등을 때렸다. 순간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소음이었다. 정신을 다 잡고 앞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다.
“…….”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인파에 이준은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방에 우뚝 솟은 은빛 나무 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준이 나무 위로 올라가도 주변의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야가 트인 곳을 찾아 올라간 이준은 산의 정상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넓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바닥은 아마도 온 산을 뒤덮은 이 은빛 나무로 만들어진 듯 은빛으로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광장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아마 이곳에서 평소에 풍뢰각 제자들이 수련을 하는 것 같았다.
풍뢰산 정상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은빛의 거대한 탑이었다. 높고 웅장해 보이는 탑에서는 끊임없이 번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뚝 솟은 탑의 꼭대기는 구름층을 뚫고 들어가 있어 더욱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산 정상에 있는 많은 건축물들은 풍뢰각 제자들이 거주하는 곳인 듯 했다. 이준은 이곳을 한번 둘러보다 거대한 은빛 광장 바로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시야가 탁 트인 광장에는 고급스러운 은빛 나무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는 풍뢰각의 제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봤을 때 평범한 제자들은 아닌 듯 했다.
은빛의 의자 위에는 아직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아마 그 곳에 앉을 사람들은 사대각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인 듯 했다.
광장을 살펴 본 이준은 은색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준이 수련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종소리가 산마루에 울려 퍼지더니 건장한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튀어 나와 산 정상을 둘러쌌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은 그들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역시 모두 훈련이 잘 돼있군.’
종소리에 눈을 떠 이 상황을 바라보던 이준은 생각했다.
쾅!
그 순간, 돌연 거대한 벼락이 구름 속에서 뻗어 나왔다.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줄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며 어느새 은색 나무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위자 위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던 이준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 앉았다.
“비천…….”
“역시 풍뢰각의 사대 각주구나! 중간에 있는 저 자가 말로만 듣던 그 나정필인가?”
빛이 사그러지자, 다른 사람들이 앞에 서있는 네 사람을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네 사람의 각주 중 중앙에 앉아 있는 사내가 바로 풍뢰각의 정점에 선 사내이자 동각의 각주인 ‘나정필’인 것 같았다. 사내는 40, 50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은색 수염이 나있었고, 은색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은색 의복 위에 가득한 번개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은색 의복 위에 새겨진 번개 문양에서는 번개 속성의 에너지가 은은하게 새어나왔다.
비천 역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정필에 비하자면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바로 풍뢰각의 각주 나정필인가……. 역시 엄청나군.’
그는 이준이 실제로 처음 본 진정한 투존 강자였다. 영혼의 궁전에서 본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 역시 투존이었지만, 그 때는 영혼체 상태로 본 것이었으니 이렇게 육안으로 투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휘이잉!
놀라는 것도 잠시, 산 정상에 귀를 찌르는 바람 소리가 울려퍼지며 허공 위에 거대한 검 하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거대한 검을 바라보았다.
“하하, 검존이 오셨구려. 이번 대회에는 첫 번째로 도착하셨군.”
은색 의복을 입은 나정필은 대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검존을 발견하자마자 천둥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검존의 대검 위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 하나가 서있었다. 검존과 함께 도착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만검각의 기대주, 승용이었다.
곧이어 거대한 검이 부르르 떨리며 부서지더니 그 위에 타고 있던 두 그림자가 아래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검존의 옷차림은 아주 수수했고, 인상 역시 평범해 보였지만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절대로 나정필에게 밀리지 않았다.
검존이 나타나자 광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졌다.
“허허, 여전히 성질이 고약하시구만. 저번 시합이 많이 마음에 안들었소?”
검존자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어디선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귀신처럼 산 정상으로 날아와 의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흑색 의복을 입은 노인의 얼굴은 마치 시신처럼 창백했고, 몸 전체에서 음산한 기운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양 눈은 하얀색과 검정색으로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어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로는 역시 황천각의 젊은 제자들 중 으뜸이라는 강신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때는 운이 좋지 않았소. 그래도 풍존자와 채 백합도 겨루지 못한 누구와 비하면 나았지. 그렇지 않소, 황천존자?”
검존자가 흑색 의복을 입은 노인을 힐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검존자의 말에 흑색 의복을 입은 노인의 눈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용의 포효 같은 바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 노인네는 우리 중 가장 빠른데,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구만.”
검존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색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겨났다.
이준 역시 빠르게 시선을 돌려 청색 회오리 바람을 바라봤다.
“풍존자, 드디어 왔군.”
거대한 청색 회오리바람은 이내 무수한 광선이 되어 사라졌고, 곧이어 그 안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드디어 사대각의 투존이 모두 모였군.”
“와아, 정말로 네 투존이 모두 모이다니, 이번 사대각 대회는 아주 알차구나! 어쩐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더라니!”
“하하, 이번 대회는 누가 승리를 가지고 가게 될지 예상이 안 되는군!”
마지막으로 나타난 둘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초록색 옷을 입은 모청연을 본 이준은 역시 낯익은 얼굴에 별 관심 없다는 듯 그 옆에 서있는 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청색 의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상당한 미남이라 젊었을 때의 모습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저 자가 풍존자인가…….”
풍존을 바라보는 이준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스승은 풍존이 자신과 피만 섞이지 않았을 뿐 형제와도 같은 사이이며, 인품 역시 훌륭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닥쳐올 영혼의 궁전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아군이 되어줄 사람은 바로 풍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정필과 검존은 풍존이 나타나자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풍존은 나머지 세 투존보다도 한참이나 선배였기 때문에 같은 사대각의 각주라 하더라도 그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황천존자는 풍존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듯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인사조차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풍존 역시 그런 황천존자의 태도에 대해 딱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풍존은 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황천존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 상황이 아니라면 그와 말조차 섞지 않았다.
네 투존이 모두 자리에 도착하자, 나정필이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을 둘러보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구름 사이로 거대한 번개가 내리치며 광장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늘은 우리 풍뢰각이 주최하는 사대각 대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우리 풍뢰각의 규칙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대회가 개최되는 동안에는 어떠한 소란도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나정필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산 전체에 울려 퍼졌고,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기운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번 사대각 대회에서 사대각의 제자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총 53명이며, 관습에 따라 모든 참가자들이 동시에 대결을 시작해 살아 남은 자가 8명이 될 때까지 진행합니다. 모든 참가자는 광장으로 나오십시오.”
나정필이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종소리가 울리며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젊은 강자들이 빠르게 광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참가자들이 입장하자, 고막이 터질 듯한 함성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산을 통째로 집어 삼킬 듯한 함성 소리에 하늘 위에 짙게 깔린 구름까지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투존들과 함께 은색 의자 위에 앉아 있던 모청연, 승용, 강신 세 사람도 서로 눈을 맞춘 후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세 강자가 올라오자마자 그들과 거리를 벌리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까지 풍뢰각의 봉연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