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풍뢰산
이준이 밖으로 나오자 오두막 앞을 지키고 있던 강철 이빨 부족의 마수 하나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준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은 뒤, 말없이 계단을 밟듯 허공을 딛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간 이준은 천목산을 바라보다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직도 자신이 날개없이 하늘을 거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김석과 김곡이 급히 허공 위에 떠있는 이준에게 날아왔다.
“이제 가는 것인가?”
김석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동안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이준의 말에 김석과 김곡은 그를 더 이상 만류하지 못 하고 그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정말이지 큰 은혜를 입었네. 무슨 일 있으면 잊지 말고 우리 두 늙은이를 찾아주게나.”
이어지는 김곡의 말에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주 지역의 정보통이라고 불리는 강철 이빨 부족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그에게도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하하, 바빠 보이니 더 이상 붙잡아 두지 않겠네. 조심히 가시게나.”
김곡이 웃으며 말했다. 그 역시 김석과 마찬가지로 지난 며칠 사이 이준과 한결 가까워져 이제는 그를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준은 웃으며 두 투종 강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빛처럼 김석과 김곡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이준이 천목산을 벗어나는데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 뼈 날개까지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나 빨라질지 궁금했지만, 은랑왕이 했던 말이 줄곧 머릿속에 박혀 있어 차마 날개를 사용하지는 못 했다.
천목산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산 정상에 멈춘 이준은 저장 반지에서 해골성에서 사온 중주 북부의 지도를 꺼내 펼쳤다.
모청연의 말에 따르면, 이번 사대각 대회는 풍뢰각의 총본산인 동각에서 열린 다고 했다. 그리고 지도에 따르면 동각의 위치는 중주의 동부가 아니라 북부에서 제법 가까운 중주 중부 지역의 동쪽 변방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거리면 5일은 걸리겠는걸…….”
이준은 작게 한숨을 쉬며 지도를 저장 반지에 넣었다. 투종이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동각에 도착하는데만 족히 보름은 걸려 도착하기도 전에 사대각대회가 끝나버렸을 것이다.
“대회가 끝나기 전에 도착하려면 어서 서둘러야겠어.”
* * *
풍뢰각 동각은 중주 전체에서도 인정받는 강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문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풍뢰각이 수립될 당시, 풍뢰각은 산전수전을 모두 겪으면서도 동각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지금의 풍뢰각이 중주 전체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사실 이 시절 풍뢰각이 중주의 온갖 세력들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나갔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대각 대회는 말 그대로 대륙에 있는 사대각이 모여 개최하는 대회로, 연금탑의 연금술 경연 대회와 비할 수는 없지만, 중주에서는 나름 성대한 행사 중 하나였다.
이 사대각 대회의 주인공은 나이 든 강자들이 아닌, 바로 각 세력을 대표하는 젊은 강자들이었다. 중주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였기 때문에 새로운 강자를 양성하는 것은 사대각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회에 참가하는 풍뢰각의 봉연, 만검각의 승용, 황천각의 모청연 등은 모두 중주에서 꽤나 명성을 날린 인물들이었다.
물론, 중주대륙의 숨은 인재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날 지는 누구도 모를 일 이었다. 매번 사대각 대회가 열릴 때마다 대회 개최지에는 많은 세력과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강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사대각이 주인공이지만, 외부에서 온 자들도 참가 할 수 있었다. 물론 대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사전 심사를 거쳐 선발된 자들만 참가할 수 있다. 실력도 없으면서 겁없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젊은 강자들 사이에서 열리는 경기 중, 이 4대각 대회에 참가하는 자들은 실력이 꽤 높은 편이다. 심지어 나이가 있는 강자들도 이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사대각 대회의 개최지는 지난 대회의 최종 승리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됐다. 지난 대회의 최종 승리자는 바로 풍뢰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번 개최지가 풍뢰동각으로 결정된 것이다.
* * *
풍뢰산 밖, 하늘 위에서 한 줄기의 빛이 별똥별처럼 지상으로 떨어졌다. 산 정상으로 떨어진 빛은 바로 이준이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니 개미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거대한 한 산을 바라보았다. 산 안에서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곳에서 느껴지는 번개와 바람의 힘에 이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이곳이 바로 풍뢰동각이 위치한 곳인가……. 아직 늦지 않은 것 같군.”
산 마루에서 내려온 이준은 산 주위에 늘어선 빼곡한 인파를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회는 벌써 시작했으려나…….”
이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갑자기 저장 반지에서 얇고 투명한 껍질로 제작된 무언가를 꺼내 얼굴 위에 올렸다. 그러자 이준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이준인지 모를 정도였다.
이 물건은 이준이 구름제국에 갈 때 아라가 그에게 줬던 것으로, 신분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물건이었다.
이준은 골치 아픈 일을 피하기 위해 위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자신과 풍뢰각 사이의 문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 이었다. 만일 당당하게 이곳에 나타난다면, 풍뢰각이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동각 안에는 풍뢰각의 최강자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고, 풍뢰각의 각주인 나정필까지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됐다. 투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나정필 같은 강자를 마주하기엔 아직 한참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풍뢰산에 온 이유는 오직 풍존자를 찾는 것, 그것 하나뿐 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다면 스승을 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스승의 목숨이 위험했으니 하루라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준의 마음이었다.
이준은 바뀐 얼굴을 살짝 만져본 뒤 곧바로 사람들로 가득한 산 아래로 향했다.
떠들썩한 인파 속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음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에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거야! 동각에 다 들어갈 수는 있는 거야?”
“오늘 대회가 열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이번 최종 승리자는 어디서 나오려나?”
“글쎄 모르지! 봉연, 승용, 강신, 거기다 모청연까지. 쟁쟁한 인물들은 모두 모여있으니까! 게다가 그 네 명은 얼마 전에 천목산에 있는 피의 못에 갔다 왔다고 하니 틀림없이 더 강해졌을 거야!”
“그 네 명 모두 투황 최고급 실력인데다 모두 투종 강자와 가까운 사이잖아! 투종이 된 사람도 있지 않을까?”
“꼭 그 넷 중 하나가 승자가 되리라는 법은 없지! 중주에 숨은 인재가 몇이나 되는지 누가 알겠소.”
“하하, 요즘 떠오르는 젊은 강자라면 그 이준이라는 자 아니겠어?”
“쳇, 그 이준이 아무리 강해도 이곳은 풍뢰각 총본부야.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지.”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이준의 이야기를 끝으로 조용해졌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리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설마하니 중주 전체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졌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영혼의 궁전이 소문을 듣고 자신을 찾아내지는 않을까 하는 점 이었다.
산의 입구 주위에서는 풍뢰각의 제자들이 질서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공까지 통제하며 일부 초대 손님을 제외한 사람들의 비행을 막고 있었다. 신분을 들키면 안 되는 이준 역시 걸어서 들어가야만 했다.
산에 들어가자 이준은 인파 사이를 벗어나 외딴 밀림을 지나 목적지로 향했다.
‘만일 정말로 풍존을 만난다면, 먼저 멀리서 지켜본 뒤 접촉을 해야겠어. 스승님이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모든 일은 조심할수록 좋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스승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것이 당연했으니, 이준은 우선 풍존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산을 오르자 산 중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는 검은 빛을 띠는 짙은 구름이 자욱했고, 구름 안쪽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번개 속으로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풍뢰동각이 위치한 곳은 바로 풍뢰산의 정상이었다. 대회가 임박한 탓인지 동각 주위는 철통같은 경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도 염력 날개가 달린 투왕급 이상의 강자들이 산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회장 입구의 돌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은 대회 관람자 입구, 오른쪽은 대회 참가자 입구였다.
돌길 앞에는 백 명에 가까운 풍뢰각 제자들이 무장한 채 버티고 서있었다. 매서운 얼굴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사람들은 함부로 소란을 피우지 못했다.
입구 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두 노인이 서있었다. 천목산에 갈 때, 봉연을 데리고 왔던 두 노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설마 날 알아보진 않겠지?’
이준은 긴장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풍뢰각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두 장로가 나와 엄격하게 선발하는군. 이번 대회는 상당히 수준이 높겠어.”
앞에서는 사람들이 두 노인과 이번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풍뢰각의 규칙은 모두 다 잘 알고 계시 듯,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춰야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첫째, 3성 투황 이상의 실력을 갖춘 자. 둘째, 30세 이하의 젊은 강자. 셋째, 우리의 공격을 다섯 번 버틴 자. 만일 대회를 구경 온 분들이라면 왼쪽의 돌길로 올라가십시오.”
홍포를 입은 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엄격한 선발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의 돌길을 선택했다.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사람들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갔다. 그의 목적은 풍존자를 찾는 것 뿐,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체를 들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실력이 좋은 젊은이 몇 명은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 같이 장로가 팔만 휘둘러도 나가떨어졌다. 3성 투황이라 해도 이제 막 3성 투황이 된 자들은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두 장로는 약한 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거기, 잠깐!”
하지만 이준이 돌길에 발을 얹는 순간, 풍뢰각의 두 장로 중 하나가 이준을 가리키며 외쳤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이준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준의 얼굴을 훑던 장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참가할 자격이 되어 보이는데, 어찌 참가하지 않는 것인가?”
장로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준에게로 꽂혔다. 장로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 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대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찾을 사람이 있어 온 것뿐입니다.”
정체를 들킬까 걱정된 이준은 최대한 짤막하게 답한 뒤 몸을 돌려 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건방진 놈이군.”
옆에 서있던 장로 하나가 산을 오르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며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자가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거요?”
“모르겠소. 저 자가 돌길을 밟으니 주위의 불속성 에너지가 파동을 일으키더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소.”
이에 이준을 불러세웠던 장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착각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