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단련
김곡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이준이 필요로 한 약재를 모두 구해왔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이준은 김곡의 놀라운 일처리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이준은 화독을 빼기 위해 김석과 함께 천목산 중턱에 위치한 강철 이빨 부족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오두막 안에는 신비한 약재를 녹여 만든 액체가 담긴 커다란 약솥 하나가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김곡이 구해온 약재가 담긴 목함이 놓여 있었다.
김석이 오두막의 중앙에 자리를 잡자, 약 솥에 담긴 뜨거운 액체가 이준의 손짓에 따라 그의 몸 위에 부어졌다.
곧이어 이준은 자신의 저장 반지 안에서 새빨간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 김곡에게 건넸다.
“이 연금비약을 드십시오.”
김석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신 뒤, 연금비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연금비약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뼈 속 깊이 파고 들었던 화독이 맹렬한 기세로 날뛰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김석의 몸을 뒤덮고 있던 끈적한 약물이 그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치이익-
잠시 후, 쾌쾌한 냄새가 나는 회색 액체가 김석의 모공에서 천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회색 액체가 몸 밖으로 빠져나오자, 김석은 고통스러운 듯 이를 악문 채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독을 빼내는 과정에 동반되는 고통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걱정 마세요. 정상적인 겁니다. 곧 괜찮아 질 겁니다.”
괴로워하는 김석의 모습에 김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자, 이준이 손을 들어 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온 뒤, 이준은 목함 안에 담긴 약재를 녹여 액체로 만든 뒤 그것을 김석의 몸 위에 들이 부었다.
“으윽……!”
두 번, 세 번, 그렇게 서로 다른 약재를 녹인 뜨거운 액체가 연달아 자신의 몸에 뿌려지자, 김석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액체가 부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회색 액체가 끊임없이 밖으로 빠져나왔고, 이준은 청연의 불꽃을 사용해 계속해서 그 화독을 불태웠다.
그렇게 약 8시간이 지나자, 약재가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김석의 체내에 있는 화독은 아직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닷새 안에 대부분의 화독이 빠질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제가 제조한 약물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 매일 두 시간씩 석 달 정도 그 약물을 몸 위에 부은 뒤 염력을 사용해 남은 화독을 빼내시면 됩니다.”
작업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천목산에 찾아와 주십시오.”
김석은 이준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준의 말로는 아직 석 달은 더 있어야 화독을 모두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미 몸 속에 있는 화독이 모두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이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실 이준에게는 김석에게 밝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각인 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투왕의 염력을 얻어 실력을 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석의 몸에서 화독을 빼내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염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어. 어쩌면 7성 투종의 염력을 공짜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걸…….’
* * *
그 후로 한동안 이준은 매일 김석의 천산화독을 빼주었다. 하루 10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독소를 빼자, 김석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성심껏 약속을 지키는 이준의 태도에 김석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하게 그를 대했지만, 지금은 평생을 함께 지내 온 친구이자 선생처럼 대했다.
게다가 이준은 아직 투종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연금술사로서는 김석도 고개 숙일 만큼 대단한 실력이었다. 투기대륙의 모든 이들이 뛰어난 연금술사와 친분을 가지려 얼마나 애를 쓰는지 생각해보면, 김석이 자신보다 실력도 부족하고 연배도 한참이나 어린 이준을 선생처럼 모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며칠 동안 김석의 몸속에 있는 화독을 흡수하면서 이준의 정신과 몸은 빠른 속도로 피폐해져 갔다.
심지어 지금 이준의 몸에는 화독뿐 아니라 악마의 반점 안에 봉인된 독까지 있었으니, 천산화독의 독을 흡수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아라가 만들어준 봉인이 아니었다면 화독과 가슴에 새겨진 독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진작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 * *
오두막 안에서는 쉴 새 없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고, 화염이 들끓고 있는 커다란 대야 안에는 약수를 흡수하고 있는 김석이 앉아 있었다.
이준이 화독을 빼준 덕에 김석의 안색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안개가 잠잠해지며 대야 안에 있던 약물이 맑게 변하기 시작했다. 물에 녹아있던 약성분이 모두 김석의 체내로 흡수된 것이다.
치료를 마친 이준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청록색의 화염을 회수했다.
“이준 선생,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네.”
김석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이준은 빙긋이 웃으며 저장 반지 속에서 옥병 두 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저는 이제 떠나야할 것 같습니다. 이 옥병에는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물과 연금비약이 담겨 있습니다. 독소를 제거하는 방법은 이미 잘 아실테지요. 그 방법이라면 2, 3개월 안에 화독이 모두 깨끗하게 사라질 겁니다.”
“내일 가야 하는 것인가?”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각 대회가 곧 시작하니 풍존자를 찾기 위해 풍뢰각으로 향해야 했다. 이번에 풍존을 만나지 못한다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투존 강자를 또 언제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영혼의 궁전에서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히 움직여야만 했다.
이준의 굳은 의지를 보며 김석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천목산으로 날 찾으러 오게. 이곳에서는 아무리 비천이라 해도 어떻게 하지 못할게야.”
김석은 비록 마수이지만, 정이 많은 자였다. 강철 이빨 부족의 실력은 풍뢰각 보다 뒤쳐졌지만,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니 믿을만한 사람인 듯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해지면 선배님을 믿고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 * *
불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방 안, 이준은 양반 다리를 한 채 침대에 앉아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웃옷을 입지 않은 이준의 가슴팍에는 먹같이 까만 반점이 있었고, 그 곳에서는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반점 주위에는 기이한 문양이 가득했다. 아라가 만들어준 봉인은 화독으로 인해 눈에 띄게 크게 약해져 있었고, 이제 정말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악마의 반점’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투존 강자의 도움을 받는 것. 둘째,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은 뒤 세 개의 불꽃을 융합해 그 힘으로 독소를 불태우는 것.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두 가지 방법 모두 불가능했다.
그러나 투종이 된 지금은 예전처럼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힘만으로도 악마의 반점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청록색 화염이 몸속에서 요동치다 빠르게 그의 가슴팍으로 모여들더니 까만 반점을 둘러싸고 활활 타올랐다.
지금 그의 실력으로 한 번에 독소 반점을 없애는 것은 무리지만, 오랜 시간을 거쳐 천천히 독소를 연소시킨다면, 분명 희망이 있어 보였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화염으로 독소 반점 주위에 있는 봉인을 둥글게 둘러싼 뒤 천천히 검은색 반점을 조여 들어갔다.
화염이 봉인에 부딪히자, 타오를 듯한 열기에 봉인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한 번에 반점을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독소를 빼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곧이어 이준의 몸속에서 수년간 잠복해있던 독소 반점이 크게 요동치더니 엄지손가락 크기의 검은 조각으로 갈라졌다가 회색 연기로 변했다.
회색 연기에서는 역겨울 정도의 독향이 뿜어져 나왔지만, 천지의 불꽃으로 인해 회색 연기가 흰색으로 변하며 그 매캐한 악취 역시 깔끔하게 사라졌다.
음산한 느낌을 풍기는 검은 반점을 바라보던 이준은 청록색 화염의 온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다시 한번 검은 반점을 공격했다.
그러자 천지의 불꽃에 포위당한 검은 반점이 세차게 요동치며 봉인 밖으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악마의 반점이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하자 부식성이 강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며 사방을 둘러싼 화염에 미친 듯이 부딪혔다.
쉬익- 쉬익-!
검은 안개는 화염에 부딪히기 무섭게 쉭쉭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독소는 청연의 불꽃에 의해 대부분 연소되었다.
독소가 빠져 나가고, 대신 이준의 몸속에는 강한 염력이 생겨났다. 그 염력은 움직임 없이 청록색 화염 가운데에 머물러 있었다.
몸 속에서 느껴지는 강한 염력에 이준은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독소 반점을 완전히 연소시킨다면, 최소 3성 투종까지 한 번에 실력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준은 염력을 조종해 빠르게 자신의 몸으로 흡수시킨 뒤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 독소를 빼내기 시작했다.
한 번에 독소를 연소시킬 수는 없었지만, 이 과정을 오랜 시간 걸친다면 몸속의 시한폭탄 같았던 독소 반점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이제보니 전필환 그 노인네가 아주 좋은 선물을 주었군. 하하하!”
* * *
이준은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천지의 불꽃으로 독소를 연소시켰다.
어느새 하늘에 가득했던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조금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밤에 흡수한 염력덕인지 눈에서는 밝은 빛이 번쩍이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가슴에 있는 독소 반점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만족하지 못한 듯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 내내 제법 많은 독소를 연소시켰지만, 그것은 악마의 반점의 일부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소시킨 독소에서 얻은 염력으로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투종 단계에서는 1성을 올리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수련한다면 이 실력이 되기까지 최소 3, 4개월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독소를 연소시키며 얻어낸 염력으로 하룻밤 만에 3, 4개월 치 염력을 모두 흡수했으니, 아주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투종에게 있어 1성의 의미는 투황 단계의 1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주에서는 투종의 계급을 1성에서도 초급, 중급, 고급, 최고급 4단계로 구분하고 있었다. 이준은 이 독소 반점 속에 있는 염력을 흡수하고 나면, 1성 중급 정도의 실력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휴, 역시 힘들군. 하긴, 서천우 대장로님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였는데도 1성을 올리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알겠어.”
현재 몸속의 염력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적응기를 마쳐야 다시 염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투종인 이준에게는 악마의 반점이 폭발하지 않는 이상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독소 반점은 이준의 염력 창고가 되었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군. 곧 사대각대회가 열리겠어…….”
의복을 꺼내 입고 침대에서 일어난 이준은 물건을 정리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