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화. 1성 투종
이준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약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존 강자를 앞에 두고도 당당한 모습에, 그 사이 투종이 된 것까지……. 아마도 자신의 제자는 정신적으로도, 실력 면에서도 큰 성장을 이룬 것 같았다.
어쩌면 이준이 다시 나타날 때는 정말로 영혼의 궁전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강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준이라 했나?”
조용한 궁전 안에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흑 같은 어둠속, 제단 안에 갇힌 약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보라색 옷의 노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보게 진천, 혹시 불안한 건가?”
“약선, 자네 몸 관리나 잘 하게. 전주(殿主)님의 눈에 들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진작 죽은 목숨이야.”
약로는 잠시 멈칫거리다 쇠사슬에서 나는 소리에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또 다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자네처럼 줏대가 없진 않다네.”
“자네처럼 반항하지도 않는 게 가장 어리석은 것이지. 이 투기 대륙에서 자네 와 비슷한 수준의 연금술사라고는 아마 연금탑에 몇 몇 노인네들 뿐이네. 만일 자네가 영혼의 궁전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나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설 수 있을 텐데, 어찌 사서 고생을 하는가?”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약로는 뜻 모를 웃음만을 지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네 그 제자가 정말 이곳에 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보라색 옷의 노인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되묻자, 약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자네도 곧 알게 되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덩해 보이던 노인의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이름이 이준이었던가? 그 놈이 정말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는지 한번 기다려보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궁전에 다시 숨 막힐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 * *
그 시각, 천목산의 정상에서는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졌던 탓인지,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아져 있었다.
잠시 후, 석상처럼 미동조차 없이 하늘 위에 떠있던 이준이 돌연 눈을 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승님, 기다리십시오.”
이번에 만난 보라색 옷의 노인은 이준이 만난 첫 번째 투존 강자였다. 과연 투존답게 위압감 역시 실로 대단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곳에 다녀온 뒤 얻어낸 수확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준을 가장 안심시킨 것은 바로 약로가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상황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당장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스승을 그곳에 둘 수는 없었다. 약로가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버텨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간다면, 그 후의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서 일을 끝내고 풍존을 만나봐야겠어.”
이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투종이 된 이후로 일어난 변화를 느껴보았다. 영혼의 힘을 사용할 것도 없이 자신의 몸이 투황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혈관은 이전보다 10배는 더 확장되었고, 온 몸 곳곳에 염력이 스며들어 희미한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보자, 공간이 왜곡되며 폭풍이 일어났다. 실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놀라운 위력이었다.
“벌써 1성 투종이 된 것 같군. 피의 못의 효과가 생각보다 대단한데?”
투종이 될 때는 비교적 긴 시간 적응기를 거쳐야만 진정한 1성 투종이 될 수 있지만, 피의 못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흡수한 이준은 그 단계를 건너뛰고 진정한 1성 투종이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1성이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투종 계급에서 1성 차이는 그리 작은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투종은 1성을 올리기 위해 수 년, 심지어 10년의 시간동안 수련을 거듭해야 했다.
투종이 된 이후의 변화를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김석과 김곡이 있는 석정을 향해 허공을 딛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허허, 투종이 되었군요. 축하합니다.”
석정 안으로 들어오는 이준을 보며 김곡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계급에 위치하게 된 이준을 더 이상 낮춰 부르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든지 실력에 따라 대우가 바뀐다. 이준은 이전에도 투종 강자와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투황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벽을 뛰어넘어 진정한 투종이 되었으니, 더 이상 그를 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두 선배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투종이 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이준은 두 사람을 향해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만일 두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1년 만에 투종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그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공유한 것 뿐이지요. 그나저나 그 곳에서 두달 반이나 머물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김석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두 달 반이나 저 안에 있었나요?”
“봉연과 다른 이들은 진작 돌아갔습니다. 지금 이 천목산에는 당신만 남아있습니다. 아, 한 분은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다 돌아갔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갑자기 분주하게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설아도 돌아간 겁니까?”
나설아가 돌아갔다는 소식에 이준은 조금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진율희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점 이었다. 시간이 된다면 화종이라는 곳에 찾아가서 진율희와 나설아를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이준의 생각이었다.
“이준 선생, 이제 투종이 되었는데, 그…….”
김석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에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린 이준이 웃으며 먼저 운을 뗐다.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지금 당장 화독을 빼드리겠습니다.”
이준의 말에 김석과 김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김석은 강철 이빨 부족에게 있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강자였고, 그의 부상은 부족 전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도와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천산화독을 빼는 데 필요한 약재들을 가지고 있질 않아서……. 천목산에 화독을 빼는데 필요한 약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약재를 좀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준이 저장 반지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필요한 약재의 목록을 적은 뒤 그것을 김석과 김곡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하얀 종이를 받아든 김곡과 김석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이 천목산에는 약재가 아주 풍부합니다. 우리 강철이빨 부족이 오랫동안 모아왔지요. 오후쯤이면 약재를 모두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곡은 하얀 종이를 손에 든 채 신이 나서 석정을 떠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김곡을 보며 이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제 몸속의 화독만 뺀다면, 우리 강철 이빨 부족은 앞으로 평생 이준 선생을 은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비록 뼈대 있는 다른 마수 부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 부족은 그 어떤 부족보다도 숫자가 많고 발이 넓어 마수계의 정보통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곡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김석이 환히 웃으며 이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김석 형님에게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혹시 고족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고족?”
이준의 입에서 나온 두 글자에 김석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김석의 떨리는 눈빛을 본 이준은 저도 모르게 살짝 주먹을 쥐었다. 김석의 반응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고족(古族)’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고족을 알고 있는 것 입니까? 설마 그들과 싸우기라도 하신 것 입니까?”
‘고족(古族)’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김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족의 힘은 풍뢰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풍뢰각과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실력만 따라준다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족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그들과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저도 들어보기만 했습니다. 그저 이 고족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싶은 것뿐 입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김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고족과 나쁘게 얽혔다면 그 어떤 자라도 살아남을 수 없지요. 고족과 마수, 인간이 중주의 삼대 세력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마수와 인간이 힘을 합쳐도 그들을 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
김석의 반응은 이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은의 가문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대단한 일족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수와도 다르고 인간과도 다르다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네? 그들은 인간도 마수도 아닌 것 입니까?”
“아닙니다. 고족은 분명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투제의 후손이니까요.”
김석의 말에 이준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제의 피?”
“전설에 따르면 투제가 된 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고, 그 후손들에게는 투제의 피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평범한 인류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지요. 물론 투제의 혈통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재능이 뛰어난 수준이고, 그 혈맥 안에 잠들어 있는 투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혈맥 안에 깃든 힘이란 다른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김석은 투제(鬪帝)라는 두 글자를 언급할 때 숨길 수 없는 경외감을 보였다.
“하지만 투제의 혈맥을 가진 종족은 외부인과 함부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특히 그 피를 조금이라도 묽게 하지 않기 위해 평범한 인류와의 혼사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지요. 만일 인류의 다른 가문과 손을 잡거나 피를 섞게 된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엄청나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순수한 투제의 혈맥을 잇고 있는 가문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요. 그들이 바로 고족이라 불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실력은 그 대단한 영혼의 궁전조차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라고 합니다.”
잠자코 상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준은 조심스럽게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선배님은 고족의 총본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중주 동역에 있습니다. 그 곳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고족에게 종속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고족들이 직접 그곳을 관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 대부분의 고족들은 모두 고계에 거주하고 있소.“
“고계요?”
“투성 단계에 이르면 공간을 조종하는 힘이 더욱 발전해 하나의 고립된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범한 투성이어서는 안되지요. 고계는 바로 고족의 투성이 만든 공간입니다.”
김석은 한숨을 쉬며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고계는 고족들 사이에서도 투성을 뛰어넘은 최강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공간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수천 년에 걸쳐 고족의 투성들이 조금씩 그 공간을 확장해 중주 북부지역과 맞먹는 면적의 이공간(異空間)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고계와 투성이라니,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쉽게도 고계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김석이 미안한 표정으로 설명을 마치자, 이준은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써는 고계로 가는 방법을 안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가문의 힘 앞에서 이제 갓 투종이 된 자신의 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은 이 정도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선은 스승님을 구하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