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화. 투종이 되다
이제는 천목산 전체에 휘몰아치던 에너지 파동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봉연을 비롯한 다른 강자들은 짧으면 3일 길어야 5일을 버티지 못 하고 연못에서 나와 산을 떠났다. 나설아는 연못에서 나온 뒤 두 달 정도 이준을 기다리다가, 2 주 전에 산을 내려갔다.
심지어 이준은 그들이 있던 장소보다 몇 배는 더 진한 에너지가 흐르는 곳에 들어가 두 달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으니 김석 입장에서는 어렵게 찾은 연금술사가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만일 오늘 내에도 소식이 없다면, 연못의 끝으로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그의 몸속에 있는 화독을 빼내려면 반드시 이준이 필요했다. 이에 김석은 다시 한번 화독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피의 못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김곡 역시 김석을 말릴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 밖에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쾅!
바로 그 때, 화산구 주위에서 엄청난 폭음이 일며 주위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허공에 떠있던 에너지가 화산구 안으로 미친 듯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갑작스런 괴현상에 김석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에너지가 모여드는 지점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붉은 색 수면 위에 여러 개의 소용돌이가 생겨나더니 호수의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호수의 중심에는 어느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안에서 누가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분명…….”
“투황이 어떻게 천지의 에너지를 이렇게 흔들어 놓을 수 있단 말 입니까!”
김석의 말에 김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호수의 중심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 설마 투종이 된 것은 아니겠지?”
“설마요. 피의 못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에너지로 정말 투종이 된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허허, 혈담의 끝에 왜 이렇게 오래 머물러 있나 했더니, 정말 투종이 될 생각이었나?”
김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됐든, 이 정도의 에너지라면 주위에 있는 투종 강자들은 모두 저 자가 투종이 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김곡이 혀를 차며 말했다.
김석 역시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피의 못을 바라보았다.
이준에게 아무 일도 없다면, 그리고 정말로 투종이 되었다면 자신의 체내에 있는 천산화독을 제거할 수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니 그로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늘이 점점 더 격렬하게 요동치며 하늘에 짙게 깔린 에너지가 끊임없이 한 점으로 모여 들었다. 멀리서 보면 천목산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 속에 갇혀있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이 변화는 천목산에 있는 강철이빨 부족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천지를 아우르며 허공 위에 떠있는 에너지가 주는 위압감은 강철이빨 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에너지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커지면서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에너지가 연못 안에 가득 차면서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엄청난 기세의 에너지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상 현상에 김석과 김곡의 얼굴이 점차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기운은 단순히 투종이 되었을 때의 그 기운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그저 투종의 벽을 넘었을 뿐 이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에너지가 폭발하지는 않을 텐데…….”
김곡의 말에 김석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피의 못에서 흘러 나오는 에너지는 점점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기이한 에너지 폭풍이 천목산 바깥까지 퍼져나가자, 제법 먼 곳에 있던 투종 강자들 역시 모두 그 기운을 느끼고는 천목산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산 정상에 피어오른 거대한 에너지 폭풍이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햇빛이 쨍쨍하던 산맥의 상공 위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김석과 김곡은 이런 변화에 개의치 않고 한시도 피의 못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피의 못 끝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거의 정점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곧 나오겠군.”
쾅!
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연 엄청난 폭발이 일며 하늘을 향해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오르더니 돌연 천목산 인근에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한 번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뒤, 연달아 물기둥이 솟구치며 거대한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쾅!
잠시 후, 산 전체에 울려 퍼지던 굉음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수면 위의 소용돌이가 사라지고, 하늘을 찌를 기세로 치솟았던 물기둥이 사방에 물을 흩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늘 위에 생겨난 비의 장막은 누군가가 조종하듯 두 갈래로 갈라졌고, 장막 가운데에 통로가 생겨났다.
그 사이로 마른 사내 하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허공을 딛고 걸어 나왔다. 그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날카로운 검처럼 예리했고, 온 천지를 뒤덮을 것처럼 거대했다.
하늘 위에 당당히 서있는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온 천지를 뒤흔들 만큼 강력했다.
투종은 중주에서 진정한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이준의 나이에 투종이 된다는 것은 투기 대륙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모여 있는 중주에서도 충분히 주목을 받을만한 일 이었다.
지금 이준의 등에는 염력으로 만들어 진 청록색의 날개도, 신비한 빛을 내뿜는 뼈 날개도 없었지만, 마치 지면 위에 서있는 것처럼 허공 위에 떠 있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허공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투종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물기둥이 만들어 낸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지만, 단 한 방울도 그의 몸에 닿지 못 했다. 마치 그의 몸 주위에 투명한 장막이라도 둘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준은 한참동안이나 허공에 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준의 모습에 김곡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투종이 된 이준이 왜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인가?
“가면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김곡이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로써는 알 수 없었다.
“저런 것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기다려 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
두 사람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준의 미간 사이에 있는 새하얀 ‘불의 낙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불의 낙인이 생겨난 것은 바로 약로가 잡혀갔을 때였다. 투황이 될 당시, 이준은 이 불의 낙인이 남긴 흔적을 따라 시공을 초월해 약로가 묶여있는 신비한 장소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이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벌어진 일 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은 의식적으로 영혼의 힘을 한껏 끌어 모아 불의 낙인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영혼의 힘이 불의 낙인 속으로 들어가자, 이준의 눈앞에는 어두컴컴한 통로가 나타났다.
이준은 칠흑같이 어둡고 긴 통로를 지나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의 끝에서 뭔지 모를 압력이 느껴졌고, 음산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동을 느낀 영혼의 힘은 점점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통로의 끝으로 나아갔다.
통로의 끝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고, 눈 앞에는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거대한 궁전이 보이고 있었다.
궁전 안에는 검은 색 돌기둥이 가득했다. 돌기둥 위에는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 위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궁전 내에 음침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준은 빠르게 궁전을 둘러보며 그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궁전의 중앙에는 신비한 빛을 내뿜는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제단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체들이 줄줄이 묶여 있었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너무 다급했고 영혼의 힘도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제단 위에 앉아 있는 영혼체들의 몸에는 기묘한 빛을 내뿜는 검은색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쇠사슬은 끊임없이 영혼체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쇠사슬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쇠사슬의 끄트머리에 거대한 검은색 돌기둥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영혼체에서 흡수한 에너지의 목적지가 그곳인 것 같았다.
이 끔찍한 광경에 이준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영혼의 궁전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한 점은, 이 궁전 안에 단 한명의 호위병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저 음산한 기운과 숨 막히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괴이함, 음산함, 죽음의 기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 이준의 영혼체에 갑자기 미세한 파동이 느껴졌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미세한 파동은 점점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에 이준은 빠르게 속도를 올렸지만, 생각처럼 속도를 높일 수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영혼의 힘이 완전히 멈춰 섰다. 무언가가 자신을 막고 있었다. 이에 이준은 멍한 눈빛으로 멈춰선 채 제단 위를 바라봤다.
‘스승님!’
그 순간, 제단 위에 묶인 영혼체 중 하나에 이준의 시선이 멈춰 섰다.
제단 위에 묶여 있는 영혼체 중 하나는 바로 꿈에도 그리던 스승님의 영혼체였다.
약로의 목에는 다른 쇠사슬보다 더 커 보이는 검은색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띠게 수척해져 있었다.
‘이 개자식들이!’
검은 사슬에 묶인 채 영혼의 힘을 흡수당하고 있는 스승의 모습에 이준은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느낀 놀라움과 충격은 금세 살기와 분노로 변했다.
그에게 있어 약로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또 다른 아버지에 가까웠다.
이준이 약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깊이 잠들었던 약로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리며 흐릿한 두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아왔다.
약로가 눈을 뜨자, 이준은 곧바로 영혼의 힘을 응집시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낸 뒤 약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4년 만에 마주한 제자의 모습에 쇠약해진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녀석아. 이미 잘하고 있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구나.”
이준이 영혼의 힘을 응집시켜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약로는 곧바로 그가 투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스승의 다정한 한마디에 이준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승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빨리 구해드리겠습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바로 그 때, 뒤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이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제단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은 이준을 살짝 흘겨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드렸다.
“큭큭, 그 때 그 놈인가? 실력이 늘었군. 그것도 아주 많이.”
보라색 옷의 노인은 광단 안에 갇힌 약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스승님이 받은 고통을 모두 되갚아줄 것이다!”
분노한 이준은 짐승과도 같은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보라색 옷을 입은 노인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주위의 공간이 갈라지며 이준의 영혼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