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단련된 영혼의 효과
연못의 끝을 향해 나아갈수록 핏빛 액체 속에 들어있는 에너지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암홍색의 액체 속에는 농밀한 에너지와 함께 화독이 뒤섞여 있었다.
아마도 화독의 근원은 피의 못 근처에 있는 화산인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화산의 중심부이자, 가장 많은 화독이 응집되어 있는 곳 이었다.
천계의 탑에도 화독이 있었지만, 지금 이 곳에 비하면 천계의 탑에 있는 그것은 독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천목산의 화산이 언제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 축적되어 있는 화독은 김석같은 투종 강자라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청록색 화염이 이준의 주위를 맴돌자, 엄청난 온도에 의해 주위의 암혹색 에너지가 모두 증발해버렸다. 덕분에 에너지 속의 화독 역시 이준의 몸에 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암홍색 액체를 가르고 한참을 나아가자, 이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금빛 두개골이 돌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머리뼈의 반응을 본 이준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주위를 둘러봤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끈적한 액체를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텅 빈 공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곳이 바로 그 결계인가?”
이준은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 투명한 장벽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대보니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단단한 공간의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손에 쥔 쥐의 두개골을 들어 올려 가볍게 투명장벽을 누르자, 머리뼈가 금빛을 내뿜으며 결계가 잔잔하게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곧 이준의 앞에 딱 한명 정도가 통과할 수 있는 작은 통로가 형성됐다.
통로 안에서 새어나오는 후텁지근한 열기를 느낀 이준은 쥐의 두개골을 저장반지 안에 넣은 뒤 청록색의 화염을 몸에 두르고 결계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통로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고, 약 10미터 정도를 내려가자 자그마한 밀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밀실의 바닥에는 거의 검은 색에 가까운 암홍색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연못 안에 있는 액체는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끈적했다.
암홍색 액체에 가볍게 발을 담그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청록색의 화염과 끈적한 액체가 맞닿는 순간, 두 물질이 격렬하게 뒤엉키며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게 바로 천산화독인가?”
연못 위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를 바라보던 이준의 얼굴이 전에 없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준의 발밑에는 움푹 파인 홈이 가득했고, 크고 작은 구덩이 속에서는 끊임없이 회색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연기 속에는 회색빛의 화독이 가득했다. 아마도 이 연못의 끝은 끓어오르는 활화산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수는 없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밀실 안을 살피던 이준은 암혹색의 액체 안으로 걸어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그의 몸에서는 청록색의 화염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며 화독을 막아주고 있었다.
청록색의 불꽃을 뚫고 전해지는 열기로 미루어보아 천지의 불꽃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것 같았다.
허리를 펴고 눈을 감자,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몸안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뿜어져 나오며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액체 속에 들어있던 회색의 화독은 이준의 천지의 불꽃에 막혀 그의 몸안으로 들어가지 못 했고, 화독이 제거된 순수한 에너지만이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독이 사라진 액체 안에 담긴 에너지의 기운은 실로 놀라운 것 이었다. 엄청난 양의 혈홍색 액체가 몸으로 들어오면서 이준의 몸이 크게 떨렸다.
본래 이렇게 엄청난 에너지를 흡수하려면 적어도 3일 이상이 걸렸겠지만, 이 밀실 안에서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빠른 속도로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 강철 이빨 부족이 그렇게 엄청난 희생에도 이곳을 들어오려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그들도 이준처럼 화독을 빼낼 수만 있었다면 강철이빨 부족의 힘은 이미 엄청나게 강해졌을 것이다.
흡수한 에너지를 몸 속 곳곳으로 흘려보내자, 혈관과 뼈, 근육, 심지어 작은 세포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에너지를 흡수하기를 한참, 이준의 몸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준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몇 년 동안 수련을 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투종 강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화독도 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 했으니, 그에게 이곳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황 최고 등급에 달하려면 아직도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했고, 투종이 되려면 더욱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에 이준은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진득한 액체 속에 담긴 방대한 에너지를 쉴 새 없이 빨아들였다.
시간이 흘러 필요한 에너지가 몸속에 가득 차는 순간, 이준은 투황의 문턱을 넘어 투종이 될 것이다.
* * *
암홍빛으로 뒤덮인 피의 못 끝자락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새빨갛게 뒤덮인 붉은 연못 한 가운데에서는 신비한 청록색 광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청록빛 화염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형체는 바로 이준이었다.
수련상태에 들어간 이준은 이틀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석상처럼 앉아 끊임없이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피의 못에 가득한 에너지는 경맥, 뼈, 근육, 심지어 세포 속까지 흡수되고 있었다.
지금 이준의 얼굴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빨간 액체 안에 담긴 농후한 에너지가 쉴 새 없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면서 체내의 염력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준의 실력은 이미 9성 투황 최고 등급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투종 단계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아직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이준의 검은 머리칼이 점차 빨갛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이준에게 있어 자신의 머리칼이 빨갛게 물들든, 파랗게 물들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피의 못에 담긴 에너지 때문이었고, 이 에너지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심신의 안정이었고, 그 다음이 몸속의 강한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었다.
* * *
끈적한 핏빛 액체가 가득한 연못에서 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흘러 어느새 10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미 빨갛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은 점점 더 짙게 물들어 갔지만, 이준은 여전히 불상처럼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준은 투종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10일 전과 비교하자면 적어도 2, 3배 이상은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투종 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피의 연못 덕택에 투종이 되는 시간이 다소 단축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반년 정도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점성을 띠는 핏빛 에너지는 여전히 쉴 새 없이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겼던 두 눈이 서서히 열렸다. 며칠 만에 떠진 그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수련을 지속할수록 점점 ‘번개의 분신’이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분신이 이 정도로 강해졌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곳의 에너지가 영혼에도 효과가 있단 말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눈부신 빛이 그의 미간에서 뿜어져 나왔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분신이 나타나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연못에 가득한 핏빛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붉은 에너지가 분신의 몸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너지 속에 있는 화독이 불꽃에 타 사라지는 소리였다.
“다행이군, 구름불꽃이 없었다면 분신에 화독이 침투했을 거야.”
화독이 제거되는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암홍색 액체에 담긴 농후한 에너지가 분신 안으로 흡수되자, 은빛으로 빛나던 번개 분신이 빠르게 핏빛으로 물들었다.
색깔이 변해버렸지만, 영혼이 연결 되어 있는 이준은 분신의 힘이 놀랄만한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번개 분신이 2레벨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뢰각의 사람들이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번개의 분신이 2레벨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억울한 마음에 피를 토하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천태자 비천조차 5년 동안 수련에 매진한 끝에 간신히 번개 분신을 2레벨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으니, 지금 이준의 수련 속도는 참으로 놀랍다고 할 수 있었다.
피의 못이 영혼체에도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은 김석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투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몸속에 흐르는 대하와 같은 에너지를 느낀 이준은 종잡을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며 고개를 돌려 주변에 떠다니는 끈적한 핏빛 액체를 바라봤다.
‘만약 내가 투종이 된다면 천화존자 선생님의 힘을 빌려 비천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게다가 투종 단계에 이르면, 7레벨 연금비약의 제조 성공률도 높아져, 예전처럼 운에 맡길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연금탑에서 열리는 연금술 경연 대회에서 10위 안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투종이 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상상하자,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휴우……. 집중하자.’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분신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투종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어.’
* * *
그 후 이준은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수련에 집중했다.
중주에는 강자들이 넘쳐났고, 투종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목숨을 건사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투종이 되는 것이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수련에 몰두하자,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10일, 20일, 1달, 2달…… 그렇게 78일이 흘렀을 때, 고요하던 피의 연못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 * *
화산의 입구에는 강풍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석정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있다.
“이미 두 달 반이 흘렀군.”
그 사이 피의 못의 수면은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고,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흡수되면서 피처럼 새빨갛던 호수의 색깔도 평범한 호수와 별 다를 것이 없을 만큼 옅어져 있었다.
“설마 저 안에서 죽은 것은 아니겠지?”
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김곡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불안해 마십시오 부족장님. 천지의 불꽃이 있는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이준이 김석이 가르쳐 준 밀실에 들어간 지 벌써 2달 반이 지났다.
그 곳은 화독이 가득해 투종조차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인데,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9성 투황에 불과한 이준이 그 곳에서 벌써 두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으니 김석의 입장에서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