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피의 못 안으로
한편, 화산 입구에서는 8개의 그림자가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자자 그만. 피의 못에는 여덟 명만 들어갈 수 있는데, 지금 아홉 명이 남아 있소. 실력으로 등수를 매겨 실력이 가장 약한 자가 자진하여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하얀 옷을 걸친 남자는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나설아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그의 말에 몇몇 사람들의 안색이 살짝 굳었으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남자의 시선을 느낀 나설아는 백여우를 품에 안은 채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나 혼자만의 실력으로 이곳에 오는 건 확실히 어렵긴 하지. 하지만 이준이 날 여기까지 힘들게 데려왔는데, 쉽게 돌아갈 수는 없지. 이준이 돌아가라고 한다면 모를까, 네가 뭔데 나에게 돌아가라고 하는 거지?”
나설아의 답변에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이곳까지 온 녀석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봉연과 모청연 등 실력이 가장 강한 네 사람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말없이 화산구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돌아가게 되든, 그 네 사람 중 하나가 돌아갈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면전에서 자신을 무시하자, 나설아의 몸에서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의 어깨 위에 한 남자의 손이 가볍게 얹어졌다.
“분위기가 왜 이래?”
이준이 돌아오자, 봉연을 비롯한 네 강자 역시 화산구에서 시선을 돌려 이준과 나설아를 바라봤다.
“내가 상대할게.”
이준의 서늘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사내는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며 잠시 말을 잇지 못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뒤로 물러날 순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온 게 아닌데, 저 여자가 피의 못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이준이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협감이 섞인 이준의 눈빛에 다른 사람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한 명이 빠져야 한다면 당연히 자기 힘으로 돌파하지 못한 한명이 빠져야지!”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에 이준은 고개를 살짝 밑으로 떨구며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러자 굵직한 천둥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하얀 옷을 입은 사내 앞으로 빠르게 돌진했다.
사내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그림자는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따라붙었고, 이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준의 주먹이 남자의 가슴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컥-!”
남자의 입에선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오며 붕 날아올라 거대한 바위 위로 떨어졌다.
“이제, 8명만 남았군.”
이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축 늘어져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이준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이미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봉연 등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 위에 널브러진 사내의 입에서는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7성 투황을 간신히 넘긴 그의 실력으로는 이준의 주먹을 견뎌낼 수 없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이준은 고개를 돌려 나머지 7명을 향해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8명만 남았네요.”
“흥, 뻔뻔한 놈. 이제 보니 아주 잔인한 놈이구나.”
봉연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자, 이준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하, 약육강식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풍뢰각의 잔인함에 비하면 전 발끝도 못 따라가지요.”
이준의 가시 돋친 한마디에 봉연의 눈빛이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 피의 못이 열리기 전에 비천님의 추격을 뿌리쳤다는 이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고 싶어지는걸.”
“봉연 아가씨가 궁금하시다면, 얼마든지요.”
자신의 위협에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받아치는 이준의 태도는 봉연의 심기를 더욱 건드렸다. 하지만 곧 피의 못이 열릴 테니 지금 이준과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피의 못이 열리면 가장 빠른 속도로 그 안의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봉연은 화산구와 이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 정말로 이준에게 달려들지는 못 했다.
피의 못 내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자들보다 최대한 빠르게 많은 에너지를 모아야 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흡수하느냐 하는 것이 투종이 될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것이니,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봉연이 입을 다물자, 이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설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별일 없었지?”
이준이 웃으며 나설아에게 물었다.
천목산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시종일관 자신을 도와주는 이준의 모습에 나설아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준의 실력이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그의 행동이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어린 시절에 자신이 했던 행동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나설아,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복을 제 발로 걷어찼구나. 혼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을 것을…….’
나설아는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쉬움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혼약을 깨뜨리더라도 조금만 이준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더라면, 기회가 있을 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면, 그랬다면 자신의 스승도 자신도 지금같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렇게 그녀가 지나간 일에 대해 한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렁찬 천둥소리가 구름 사이를 뚫고 퍼져 나왔다.
곧이어 하늘에 떠다니던 오색 빛의 에너지 파동이 멈추더니, 화산구 위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피의 못이 나타나는 건가?”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가 나타나면서 하늘 위에 떠 있던 에너지 역시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묘한 빛깔의 에너지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렁이며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휘이익-!
소용돌이의 회전 속도가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산마루 위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에너지 폭풍의 힘에 의해 거대한 바위에는 팔뚝만 한 금이 쩍쩍 생겨났다.
이준을 비롯한 여덟은 에너지 폭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몸 속에서 염력을 내뿜기 시작하자, 그들의 몸은 마치 대지에 뿌리 내린 거대한 나무처럼 산비탈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소용돌이의 속도가 점점 약해지더니, 중심부에서 강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펑!
곧이어 엄청난 빛이 번쩍이면서 천목산 전체를 뒤덮더니 소용돌이 안에서 ‘펑’하는 소리를 내며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거대한 에너지 기둥이 생겨났다.
쿠웅-!
빛기둥은 굉음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화산구 안으로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폭풍이 일며 화산구 주변의 바위들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젊은 강자들은 10미터 정도 뒤로 물러선 채 가만히 에너지 폭풍에서 뻗어 나온 빛기둥을 바라봤다.
잠시 후, 거대한 빛기둥이 차츰 흐려지더니 오색찬란한 에너지로 넘실거리는 화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이 바로 천산혈담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자, 어서 들어가십시오!”
그 때, 덩치 큰 강철이빨 쥐 두 명과 함께 날아온 김석이 바닥에 착지하며 피의 못이 열렸음을 알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봉연을 비롯한 젊은 강자들의 눈빛이 변하며 번개처럼 화산구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준은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설아의 손목을 잡은 채 화산구 안으로 향했다.
“명심해. 이건 정말 얻기 힘든 기회야.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에너지를 흡수해야해. 단, 피의 못 끝 쪽으로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돼.”
이준이 빠르게 이동하며 나설아에게 말했다.
“응. 알겠어.”
“그리고 피의 못에서 빠져 나온다면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돌아가.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이준은 그렇게 한마디를 덧붙인 뒤 나설아와 함께 빛처럼 빠르게 화산구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화산구 안에는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에너지가 해무처럼 깔려 있었고, 화산구의 중앙에는 신비한 안개로 뒤덮인 붉은 연못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준은 그 곳에서 놀랄 만큼 강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게 바로 피의 못 인가?”
이준이 멍하니 피의 못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봉연 등 다른 사람들은 이미 피의 못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에 이준 역시 나설아의 손목을 잡은 채 더욱 속도를 높여 화산구의 중앙으로 향했다.
엄청난 크기의 화산구라도 지금 이준의 속도라면 눈 깜짝할 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봉연을 비롯한 다른 강자들이 첨벙대며 붉은 색 연못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급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준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최종 목적지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피의 못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여덟 명이 들어가도 어느 정도 공간이 남을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가까이서보니 피처럼 새빨간 연못 안에 고여있는 끈적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으며 기포가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포가 터질 때마다 그 안에서는 핏빛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역시 신기한 곳이야. 이런 에너지는 정말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걸.”
연못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에너지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서 들어가. 아직 투황 최고 단계는 아니지만, 이곳에 들어가면 분명 실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거야.”
이준이 고개를 돌려 나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설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품에 있던 백여우를 혈담 주위에 가볍게 내려 놓은 뒤 진지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고마워. 만일 스승님을 찾고 싶다면 화종을 찾아가봐.”
나설아는 그 말만을 남기고 인어처럼 연못 안으로 들어가 헤엄쳐 들어갔다.
“화종을 찾아가보라고?”
나설아가 혈담 안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준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진율희가 왜 그 세력과 관계를 가지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한결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덟 명의 강자들이 모두 연못 안으로 들어가자 화산구에는 적막이 찾아왔고, 거센 바람 소리만이 웅웅대며 울려 퍼졌다.
연못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에너지가 온 몸으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준은 자신의 청록색 염력으로 핏빛 액체가 흡수되는 것을 막아내며 빠르게 피의 못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연못 안에 가득한 액체는 마치 피처럼 진득거렸고, 그 안에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저항감이 느껴졌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끈적한 액체가 영혼의 힘마저 차단한다는 점 이었다. 마치 숲속에서 만났던 기이한 안개와도 같았다.
영혼의 힘이 액체를 통과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들어선 강자들이 연못 속 에너지를 미친 듯이 흡수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이준은 잠시 멈춰 연못의 끝을 바라보았다. 앞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붉은 색이 아니라 암홍색에 가까웠다.
그 때, 이준의 손 위에 어두운 금빛 색의 쥐 머리뼈가 나타났다. 그는 잠시 머리뼈를 손에 쥔 채 숨을 고른 뒤, 곧바로 핏빛 액체를 가르며 빠르게 연못의 끝자락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