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거래
‘거참, 내가 내 앞길을 막았군.’
이준이 느꼈던 음파진의 위력으로 봤을 때, 자신보다 먼저 통과한 셋의 실력이라면 관문을 돌파하고도 남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도착한 세 사람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음파진을 뚫고 천산대에 오르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황금사자의 포효를 사용하면서, 본의 아니게 그 뒤로 도전한 자들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만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파진을 이겨내려면 마찬가지로 상당한 실력이 필요했다. 지금 앞에선 세 명의 실력은 모두 7성 투황급으로, 결코 얕볼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이준의 시선이 돌계단 위에 서 있는 새로운 도전자에게로 향했다. 이 자의 실력은 6성 투황 정도에 불과했으니, 음파의 진을 통과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산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미 체내의 염력을 모두 사용한 사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해내며 진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시험이 끝났으니 성공하지 못한 자들은 이곳에서 천목산까지 데려다줄 자를 기다리시오.”
마지막 도전자가 나가떨어지자, 김석이 그들을 바라보며 시험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에 실패한 사람들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커다란 쥐 마수가 한 마리가 나타나 돌계단의 입구를 걸어 잠갔다.
잠시 후, 김석이 번개 같은 속도로 천산대 위로 날아왔다.
음파의 진을 돌파한 아홉은 김석이 올라오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천목산에서 강철이빨 부족의 미움을 산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오시오.”
김석의 말에 사람들은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천목산의 정상에서는 하늘을 가득 메운 에너지 파동을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온 하늘을 뒤덮은 채 은은하게 퍼지는 에너지 파동은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색찬란한 에너지 파동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며 끊임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늘 위를 뒤덮고 있는 에너지 파동 밑에서 김석의 뒤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화산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화산구에서는 살을 태울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연기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산구의 중심에는 마그마처럼 시뻘건 색을 띠고 있는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보였다.
“이곳이 바로 피의 못입니다. 아직 에너지 파동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았지만, 곧 산의 모든 에너지가 이 화산구로 모여 들면서 혈담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김석의 말이 끝나자, 또 다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곳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몇 십 년 동안 수련을 쌓아야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을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누구나 탐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피의 못 안에는 엄청난 화독이 존재합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더 심해지니, 3일이 넘어가면 반드시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독이 체내에 퍼져 너희의 스승은 물론이고 연금술사라도 어쩔 수 없을 것 입니다.”
김석의 설명에 자리에 있던 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새빨간 연못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이준은 피의 못이 아니라 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김석의 몸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의 숫자는 총 9명이니, 이 중 한 명은 피의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김석이 눈을 지그시 뜨며 천천히 말했다.
“누가 포기할지는,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김석의 말이 끝나자, 아홉명의 후보자가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서로를 훑으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 김석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나를 따라오너라.”
김석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준을 향해 꽂혔다.
이준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김석은 이미 입구 맞은편에 있는 산비탈에 도달해 있었다. 이에 이준은 어쩔 수 없이 나설아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빠르게 김석의 뒤를 따라갔다.
이준이 산비탈에 도착했을 때 김석은 뒷짐을 진 채 하늘 위를 떠다니는 오색 빛의 에너지 파동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미로의 진에서 자신을 김곡이라 소개했던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이준이 도착하자, 김곡이 다가오며 넌지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자네를 이곳에 불렀는지 알겠는가?”
“김석 선배님의 부상 때문 아닙니까?”
이준이 김석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며 되물었다.
“하하! 이것 보십시오. 이 녀석은 절대 평범한 연금술사가 아닐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이준의 답변에 김석은 천천히 몸을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내 몸속에 화독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단 말입니까?”
과거 김석은 화독을 빼내기 위해 6레벨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으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6레벨 연금술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 했는데, 불과 스무살을 조금 넘은 청년이 한 눈에 자신의 상태를 알겠다고 하니 영 믿음이 가질 않았던 것 이다.
“예. 보입니다.”
이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김석이 이준을 향해 조금 다가서며 물었다.
“그럼 내 몸의 상태를 한번 봐줄 수 있습니까?”
“네, 한 번 보겠습니다.”
이준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거절하지 않고 돌상 앞에 앉으며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돌의자를 가리켰고, 이에 김석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김석의 팔뚝을 잡고 천천히 눈을 감자, 영혼의 힘이 빠르게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김석과 김곡은 그동안 연금술사를 찾으러 사방을 돌아 다녔지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만한 연금술사를 찾지 못했었다. 헌데 오늘 예상치 못하게 뛰어난 연금술사가 나타났으니, 반신반의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기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화독이 이미 골수까지 깊게 퍼졌습니다. 이렇게까지 퍼진 것은 저도 처음 봅니다. 빼내려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이준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김석을 바라보았다. 만일 김석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면, 화독이 온 몸에 퍼져 이미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이전에 유망한 연금술사들에게 들었던 결과와 같은 이준의 대답에 김석과 김곡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힘들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화독을 빼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흥분한 김석이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설마 천산화독을 빼줄 수 있는 것 입니까?”
김석의 물음에 이준은 조용히 웃으며 시선을 돌려 화산구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김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화독만 확실하게 빼준다면, 반드시 자네가 투종으로 진급하도록 도와주겠네!”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준의 시선이 다시 김석을 향했다. 이준의 눈빛은 마치 석양을 그대로 가져온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이준의 답변을 들은 김석은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김곡과 눈을 마주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피의 못에 들어간다고 누구나 투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투종이 되기 위해서는 투황 최고 수준에 이르러야 하지요. 당신은 9성 투황이 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으니, 피의 못에 들어간다 해도 투종이 될 가능성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석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군요?”
“천목산 정상의 화산구에는 산맥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있지만, 피의 못에는 더욱 방대한 에너지가 응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피의 못 전체에 모두 같은 수준의 에너지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석이 거대한 화산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맥의 에너지가 천산혈담 안에 있는 빨간색 액체에 모여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중에서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에너지가 모여 있는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화독이 아주 가득한 곳이기도 하지요.”
순간 김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선배님 체내의 화독이 설마 그곳에서 생긴 것입니까?”
이준의 질문에 김석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의 실력으로도 그 화독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9성 투황 밖에 되지 않는 제가 버틸 수 있을까요?”
이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석에게 물었다.
“다른 이라면 천산혈담의 끝에 절대 다다를 수 없을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천지의 불꽃이 있지 않습니까. 천지의 불꽃을 가진 사람이라면 방법이 없진 않지요.”
김석의 지적에 이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천목산에 들어온 후로 천지의 불꽃을 사용한 적이 없건만, 상대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놀랄 것 없습니다. 우리 강철 이빨 부족은 몸속의 에너지를 탐지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마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를 피의 못의 끝으로 보내 그 곳의 에너지를 빌려 투종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까?
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 곳은 우리 강철이빨 부족이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며, 그 곳을 발견하기까지 수많은 자가 죽었습니다. 설사 봉연 같은 자라 할지라도 혈담의 끝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요. 어떻습니까?”
김석에 말에 이준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면, 그때 독을 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김석이 잠시 망설이다 어두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로 내 체내에 있는 화독을 빼낼 수 있는 것 입니까?”
“하하, 천목산은 강철이빨 부족의 본거지 아닙니까. 게다가 두 선배님 같은 강자가 있는데 제가 어찌 약속을 어기고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김석은 고개를 돌려 김곡과 눈을 마주치고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다만……. 약속은 꼭 지켜주십시오. 만일 저를 속인 것이라면 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위협 섞인 김석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거래가 성사되자, 김석의 손끝에 신비한 금색 빛이 모여들더니 곧바로 이준을 향해 날아왔다.
“피의 못에는 우리 강철이빨 부족이 만들어 둔 결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사용해야 그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이준은 빠르게 날아온 빛을 잡아 손 위에 있는 물건을 바라봤다. 김석이 보낸 것은 어두운 금빛 색을 띠는 쥐의 머리뼈였다.
“감사합니다. 이 곳에서 투종이 되기만 한다면, 반드시 몸속에 있는 화독을 빼 드리겠습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이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군요. 곧 에너지 파동의 힘이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에너지 파동이 연못 안으로 빠르게 들어갈 때가 바로 진입하기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이준은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린 뒤 몸을 돌려 빠르게 화산구로 날아갔다.
이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김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쉽군. 화독만 아니었더라면 그 에너지는 모두 강철이빨 부족의 것이 되었을 텐데…….”
김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김곡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족장님의 실력으로도 그 곳에서 이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다른 이라면 목숨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화독이 온몸에 퍼진 채 돌아왔지만, 나 역시도 10년 만에 5성 투종에서 7성 투종이 되었다네. 본래대로라면 7성 투종은커녕 6성 투종도 될까말까 한 시간이지. 그러니 손해라고만 할 순 없네.”
말을 마친 김석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산구를 바라보았다.
“후…….”
김석의 입에서 쓰디쓴 한숨이 새어나왔다. 천목산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 속의 진귀한 에너지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할 수는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