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6화. 음파충돌
이준은 약간 느려졌을 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뒤쪽에 있던 나설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점점 더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귀와 영혼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전해지며 몸 안에 있던 염력이 조금씩 역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찌이이이익- 찍- 찌익-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이준과 나설아는 어느새 절반을 넘긴 위치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준과 달리 나설아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창백해진 얼굴로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콜록…….”
결국 나설아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내에 모든 염력이 고갈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설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나설아를 보며 모두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준이 그녀를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쯧쯧, 멍청하기는……. 결국 자기도 다치고 자신의 사람도 다치게 만드는군.”
산 정상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봉연이 중얼거렸다.
“글쎄,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승용이 말했다.
“흥, 저 자식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승용의 말에 강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흠……. 그래요? 제가 보기에도 아직 비장의 수가 있어 보이는데.”
모청연이 웃으며 말했다.
우르릉-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돌계단 쪽에서 묵직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준의 그림자가 뒤쪽으로 빠르게 튀어나가 나설아를 붙잡았다.
“번개의 움직임? 어디서 풍뢰각의 번개의 움직임을 배운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실력이네요.”
모청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 자식이! 보란 듯이 풍뢰각의 무투기를…….”
이준이 번개의 움직임을 사용하자, 봉연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한편, 이준은 나설아를 품에 안은 채 공중에서 아래에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가. 내 실력으로는 무리야.”
나설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이준에게 말했다.
“걱정 말고 남은 염력으로 귀를 막아. 내가 반드시 피의 못으로 데려가줄 테니까.”
하지만 이준의 표정에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너무나도 확신에 가득 찬 이준의 표정에 나설아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을 집중해 얼마 남지 않은 염력을 쥐어짜내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찌익- 찌지지직- 찌이이익-
또 한 번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있는 이준을 향해 음파가 파도치듯 덮쳐왔다.
그 순간, 돌연 이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곧이어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온 허공을 뒤덮었다.
“이, 이건……. 용족의 울음소리?”
이준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음파가 터져 나오자, 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지금 이준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최상위 마수인 용족의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용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의 혈맥을 이어받은 마수 뿐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음파가 수 만 마리의 쥐들이 만들어낸 음파와 맞부딪히자, 쥐들의 음파 공격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혼자서 수 만 마리의 마수가 만들어 낸 음파를 상쇄했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단신으로 수 만 마리의 마수에 맞서는 이준의 모습에 산 정상에서 여유만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봉연과 강신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쉭-!
마수들이 내뱉은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날카로운 칼날처럼 수 많은 나무를 두 동강 냈다.
하늘 위에서 음파로 인해 폐허처럼 변해버린 숲을 바라보던 이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음파의 힘에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과의 전투에서는 이 정도인줄 몰랐는데……. 마수에게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돌계단 주변에 수많은 강철이빨 쥐들이 벌벌 떨며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이준은 나설아의 허리를 감싼 후 빛처럼 빠르게 산 정상으로 올라가 그녀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산 정상에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이준이 이런 방법을 사용해 관문을 통과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나설아와 함께 관문을 돌파했다. 이는 이준이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강한 음파를 정면으로 물리쳤음을 의미했다.
“허!”
김석은 주변에 축 늘어져 있는 쥐떼들을 바라보며 허탈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하니 투황에 불과한 이준이 음파의 진을 통과하는 것도 모자라 정면으로 진을 깨뜨리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다음 도전자들은 보다 쉽게 진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강철 이빨 부족으로써는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관문 통과. 다음 도전자 나오거라! 너희에겐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김석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한 사람이 빠르게 돌계단으로 다가왔다.
* * *
“괜찮은 거야?”
관문을 통과하는데 성공한 이준은 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저장 반지에서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 나설아에게 건넸다.
“괜찮아, 고마워.”
연금비약을 받아 든 나설아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놀라움과 고마움이 묻어났다. 설마하니 이준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천목산의 꼭대기에는 움푹 파인 구덩이가 많아 보였고, 돌과 나무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얼핏 봐도 상당히 넓어 보였다. 그에 반해 지금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바위를 반으로 잘라놓은 듯 평평했다. 아마도 소문의 ‘피의 못’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는 같았다.
산 정상을 둘러본 이준은 고개를 돌려 봉연과 다른 강자들을 훑어보았다. 마침 봉연을 포함한 네 사람 역시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용과 모청연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봉연과 강신은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대단하십니다.”
눈이 마주치자, 승용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승용의 친근한 태도에 이준 역시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이어 모청연이 이준에게 다가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넌 번개의 움직임을 어느 수준까지 수련한 거야? 내가 아는 번개의 움직임과는 좀 다르던데?”
모청연의 물음에 봉연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모청연, 말에 가시가 좀 있는 것 같다?”
“가시? 무슨 가시? 난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거야.”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 이준은 속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4대각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청연 아가씨, 할 말이 있습니다.”
이준은 두 여자의 신경전에 끼고 싶지 않았지만, 풍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우선 모청연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준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모청연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과 말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봉연과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으로 가자, 모청연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모청연은 더욱 더 소녀처럼 보였다. 이 작은 체구에 그런 엄청난 실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풍존자가 아가씨의 스승님입니까?”
“응.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인데,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따로 불러낸거야?”
이준이 중주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모청연은 뭐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풍존자님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이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모청연의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갔다.
“왜 스승님을 찾는 거지?”
“저는 아가씨의 풍존 선생님 지인의 제자입니다. 스승님의 명에 따라 풍존자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지인? 무슨 지인?”
모청연이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그건……. 후에 알게 되실 겁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준은 자신의 스승이 약로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제 아무리 풍존이 약로와 절친한 사이라고는 하나, 직접 그를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애매한 답변에 모청연은 잠시 입술을 삐죽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준이 나쁜 마음을 먹더라도 감히 풍존자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스승님은 자주 밖으로 나가셔서 평소에는 보기가 어려워. 만일 스승님을 만나고 싶다면 3개월 후 풍뢰동각으로 오도록 해.”
“풍뢰동각이요?”
순간 이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풍뢰동각은 풍뢰각의 총본부였다. 북각의 천태자 비천을 피해 간신히 달아난 지 얼마나 됐다고 풍뢰동각을 스스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3개월 후에 사대각 간의 친선 대회가 있어. 이번 대회는 풍뢰각에서 진행되거든. 성운각도 사대각 중 하나니까 나와 스승님도 그 날 그곳에 있을 거야. 만일 네가 스승님을 보고 싶다면 그 날 풍뢰동각으로 오는 수밖에 없어.”
“삼 개월 후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청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모청연의 눈에 지금 이준의 행동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가려는 건 아니지? 사대각 대회에는 비천뿐 아니라 나머지 두 각의 각주도 온단 말이야. 게다가 동각의 각주인 나정필도 온다고.”
“하하, 그러게요.”
자신의 설명을 듣고도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이준의 모습에 모청연은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아……. 너,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래. 네가 굳이 가겠다면 할 수 없지. 대신 내 탓은 하지 마. 그래도 네가 말한 것처럼 네가 스승님 지인의 제자라면, 아마 스승님께서 너에게 도움을 주실 지도 몰라. 스승님의 말이라면 나정필도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번 모청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때, 바위 위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 두 명이 음파의 진을 뚫은 것이다.
“가자, 시간이 다 됐어.”
모청연은 잠시 바위 위를 바라본 뒤, 다시 이준을 바라보며 한마디 조언을 해주었다.
“아 참. 미리 말하는데, 봉연과 강신을 조심해. 널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
말을 마친 모청연은 빛처럼 빠르게 이동해 바위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모청연의 뒤를 따라 천산대 위로 돌아오자, 봉연과 강신이 싸늘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 * *
이준이 바위 위로 다시 올라왔을 때는 또 한 명의 통과자가 막 관문을 돌파하고 천산대 위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이곳에 올라온 자는 모두 아홉 명이 되었다. 그러나 피의 못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강철이빨 부족의 둘을 제외하면 여덟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중 한 명은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바라보던 이준은 음파의 기운이 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는 것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음파의 기운이 약해 진 거지?”
축 늘어져 있는 쥐떼를 바라보던 이준의 입에서 순간 허탈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태를 보아하니 자신이 했던 행동 때문에 음파진의 힘이 약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