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모청연
음파가 요동치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염력을 쥐어짜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었다.
“컥…….”
하지만 비틀거리며 10미터 정도를 올라가던 두 사람이 갑자기 입에서 새빨간 선혈을 쏟아내며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결국 시작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몇 번이고 선혈을 토해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실패입니다.”
김석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한쪽으로 걸어갔다.
“다음은 누가 도전해보겠소?”
김석이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네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마도 숫자로 밀어붙일 심산인 듯 했다.
김석은 어림도 없다는 듯 돌계단이 있는 쪽을 향해 입을 삐쭉였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음파진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결과는 역시나 실패였고, 네 사람 역시 앞선 둘과 비슷한 위치쯤에서 피를 토하며 계단을 내려오고 말았다.
“실패했소. 다음은…….”
김석이 귀찮다는 듯 사람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 * *
이준은 뒤쪽에서 조용히 도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파진의 난이도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도전했던 자들 중에는 음파의 성질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음파는 음파진을 뚫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무투기가 역류하는 바람에 더 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래도 음파를 이용했던 사람은 도전자들 중 가장 먼 거리를 간 사람이었다. 조금만 더 강한 음파를 내뿜을 수 있었더라면 아마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도전이 이어질수록 점점 강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음파진에서 버티는 시간도 늘어났다. 아직 실패가 이어지고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때, 또 한 사람이 입구 쪽으로 튕겨져 나왔다.
방금 전에 실패한 사람은 7성 투황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상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음파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좌절감이 피어오를 무렵, 마침내 봉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현재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최강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만약 그녀마저도 음파진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봉연이 앞으로 나오자 김석은 약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풍뢰각 봉연이 김석 선배님을 뵙습니다. 가주께서 김석 선배님께 안부 인사를 전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각주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조만간 시간을 내어 꼭 풍뢰각에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소.”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봉연이 눈길을 돌려 빽빽이 들어서있는 쥐들을 쳐다보았다.
“시작하시게.”
김석이 돌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봉연이 무서운 속도로 산 정상을 향해 튀어나갔다.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으로 보아 속도로 승부를 볼 생각인 듯 했다. 그녀의 엄청난 속도에 모두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찌익-찍-
예리한 음파가 급속도로 퍼지며 봉연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음파가 몸에 닿자, 봉연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잔상이 생겨나 음파를 상쇄해버렸다.
봉연의 공포스러운 속도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쐐액-
곧이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봉연이 산 정상에 놓여진 푸른 바위에 내려앉았다.
“봉연, 관문 통과.”
시종일관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석의 얼굴에도 감탄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봉연이 관문을 통과하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계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특히 승용, 강신, 모청연 등은 봉연에게 경쟁심을 느꼈는지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준은 소란스러워진 천산대를 둘러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잘 따라와.”
“뭐? 나, 나는…….”
나설아는 계단을 오르지 않으려 했지만, 이준은 이미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설아와 함께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승용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걸어 나왔다. 승용은 돌계단 끄트머리에 있는 봉연을 한번 쳐다보고는 김석을 향해 예를 갖췄다.
“만검각 제자 승용이 김석 선배님을 뵙습니다.”
김석은 고개를 끄떡이며 승용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는 마치 잘 벼려진 검처럼 예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사를 올린 승용이 손으로 등에 맨 파란색 대검을 가볍게 두드리자, 대검이 스스로 뽑혀 나오며 검기를 내뿜었다.
다음 순간, 승용이 땅을 밟고 가볍게 몸을 날려 자신의 대검 위에 올라탔다.
검을 밟고 서있는 승용의 모습에 이준은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승용은 손가락과 발바닥을 통해 염력을 내뿜어 검이 허공에 떠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염력 통제 능력이군. 조금만 삐끗하면 그대로 떨어질 텐데. 아니 그보다, 어렵게 검 위에 올라타느니 그냥 날아가는 편이 낫지 않아?’
이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설아가 입을 열었다.
“저건 만검각의 어검술(御劍術)이야. 최고 경지에 오르면 매우 빠른 속도로 검을 조종해 날 수 있지. 만검각의 독문 기술이야. 나도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지만.”
나설아는 과연 중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네.”
중주에 기인과 강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의 특이한 기술을 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검에 올라탄 승용의 그림자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땅에서 대략 9, 10미터 정도 상승했을 때, 돌연 발 아래 있던 검이 유성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찌익- 찌익-
검이 돌계단의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또 다시 하늘과 땅을 집어삼킬 듯한 음파 공격이 시작됐다. 이러한 공격은 마땅한 방어 수단도 없었으며 만약 그대로 받게 된다면 몸은 물론이고 내장과 혈관, 영혼까지 상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살벌한 음파 공격에도 승용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푸른색의 검기를 뿜어냈다. 음파와 승용의 푸른색 검기가 맞부딪히자, 극렬한 파동이 일어났지만, 그의 몸에 닿지는 못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승용은 어느새 산 정상에 올라가있었다.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성공이오.”
승용이 산 정상에 도착한 것을 본 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 도전자 나오시오.”
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란 그림자가 이준의 앞으로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황천각의 강신이라 합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리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준을 향해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강신은 꾸물거릴 것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산 정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이내 새카만 염력으로 몸을 감싼 채 허공을 가로질러 정상으로 향했다.
강신이 돌계단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자, 또 다시 음파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강신은 자신의 염력을 이용하여 음파들을 완전히 상쇄시키며 가볍게 정상에 도달했다. 그의 속도는 두 사람보다 느렸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음파진을 돌파했다.
이에 천산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염력이길래 이토록 강한 음파조차도 상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성공이오.”
김석이 또 다시 산 정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도전자 나오시오.”
그러나 이준은 여전히 앞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때,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가볍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성운각 모청연이 김석 선배님을 뵙습니다.”
김석은 모청연을 찬찬히 살핀 뒤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실력이 늘어 가시는구려. 맨 처음 그대의 가족들이 풍존 고영찬을 그대의 스승으로 맞이한 것은 꽤 훌륭한 결정이었던 것 같군.”
“풍존?”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모청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풍존의 제자라고?
중주 대륙으로 건너오며 이준은 어떻게든 풍존을 만나려 했었지만, 그와 관련된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풍존의 제자라니!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모청연은 성운각 사람이니 고영찬이 그녀의 스승이라면 고영찬 역시 성운각 사람이란 걸까?”
풍존의 소식을 알게 된 이준은 너무 기뻐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풍존이라면 틀림없이 스승을 구하는데 힘을 보태줄 것이다.
이준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모청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계단 위로 올라서더니 여유롭게 한걸음씩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곧이어 귀를 찢을 듯한 음파 공격이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그대로 자기들끼리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모청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략 10분 정도를 계속해서 가볍게 걸어 정상에 도착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그녀의 걸음걸이에 산 아래 있던 다른 강자들은 돌처럼 굳은 채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 했다.
“성공이오. 다음 도전자 나오시오.”
이제까지 총 4명이 산 정상에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이준과 나설아를 포함하여 총 10명 정도가 아직 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피의 못 자리는 아직 4개가 남은 상태였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이준이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나설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이준이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잠시 후 나설아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이준에게 집중되었다. 이미 산 정상에 도착한 네 사람도 각자 다른 심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의 진정한 실력은 바로 이 음파진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준입니다. 김석 선배님을 뵙습니다.”
“자네가 천태자를 따돌렸다는 그 자라고?”
이준이 멋쩍은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석은 흥미롭다는 듯 연신 웃음을 지었다.
“음파진은 사람이 많을수록 강해지는데, 정말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갈 것이오?”
김석이 나설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설아의 실력으로는 음파진을 뚫을 수 없었다. 김석 정도의 눈썰미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준이 대답하기도 전, 나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안 되겠어. 그냥 혼자 가, 나는…….”
“괜찮습니다. 제가 이 친구와 이 친구의 스승에게 빚을 진 게 조금 있어서요.”
말을 마친 이준은 나설아의 손목을 낚아챈 뒤 곧바로 돌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이 돌계단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수많은 쥐들이 눈을 뜨며 온 몸에 털을 곤두세운 채 강력한 음파를 만들어냈다.
“잘 따라와!”
눈을 부릅뜬 채 주위에 있는 쥐들을 보던 이준은 가볍게 발을 굴러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는 나설아가 체내에 있는 모든 염력을 끌어 모아 최대한의 속도로 이준의 뒤를 따랐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이준과 나설아에게 집중되었다. 지금까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단신으로 관문을 돌파했다. 강철 이빨 부족의 음파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위력도 강해졌다.
두 사람이 함께 도전한다면 버텨야 하는 음파의 강도는 한 사람일 때보다 두 배에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이미 성공한 봉연 등의 인물이라도 버텨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혼자라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뻔했다.
찌익- 찌이익-
음파의 습격을 받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움찔하며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