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화. 음파진(音波陳)
그렇게 30분정도가 지나자, 안개가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미궁에서 나갈 거야.”
곁에서 또 다시 나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설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에 의해 짙게 껴있던 안개들은 격렬하게 요동치며 걷혀가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자 주위의 광경이 점점 뚜렷해졌다.
곧이어 이준과 나설아의 시야에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가 들어왔다. 두 사람이 위치한 곳은 산기슭이었고 양쪽으로 나있는 험준한 산길에는 큼직한 이빨을 가진 거대한 쥐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강철 이빨 부족이야. 괜히 자극하거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
나설아가 거대한 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알았어.”
“산 중턱쯤부터 천산대야. 그 다음부터는 강철 이빨 부족이 설치해둔 관문이 있고, 이 관문을 통과한 자만이 피의 못으로 들어갈 수 있어.”
나설아가 한 손으로 백여우를 끌어안은 채 산 중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산대?”
이준은 눈빛을 반짝이며 나설아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이곳이 바로 승용이 말했던 천산대였다.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관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야. 이곳으로 온 것만으로도 이미 약자가 아니란 사실은 증명됐겠지만, 어쨌든 관문을 돌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나설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가보자. 다른 사람들이 8개의 자리를 모두 차지해 버리기 전에!”
말을 마친 이준이 빠른 속도로 산 중턱을 향해 뛰어나가자, 나설아가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 * *
천목산 중턱에는 암석을 깎아 만든 광활한 평지가 있었고, 그 평지 옆으로는 천목산 정상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놓여있었다. 돌계단 앞으로는 쥐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한 강철 이빨 부족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돌계단 앞 평지에는 이미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혼자 온 사람도 있었고 두 명이나 세 명씩 짝을 지어 온 사람도 있었다.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천산대로 들어오는 입구를 향해있었다. 이제 시간이 되면 미궁이 닫힐 것이고, 미궁이 닫히면 관문 깨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20여명의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풍뢰각의 봉연! 역시 먼저 와 있었어.’
봉연 역시 옆에 있는 사람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천산대의 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둥-
거대한 종소리가 천산대에 울려 퍼지며 작은 체구의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노인은 천산대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되었소. 관문 깨기를 시작하겠소.”
그 때,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 같은 속도로 누군가 천산대로 뛰어 들어왔다.
“조금 늦었네요. 설마 탈락인가요?”
봉연은 넉살 좋게 웃고 있는 이준을 힐끗 쳐다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뒤늦게 천산대에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이준과 나설아였다.
두 사람의 출현으로 천산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이준과 나설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이준은 얼마 전 풍뢰각과 큰 마찰을 일으켜 제법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봉연과 승용 같은 강자들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은 밤낮없이 전속력으로 달렸는데 자신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늦었던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천산대에 있는 이준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천목산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그들에 비해 이준이 늦은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나설아를 만나며 어느 정도 지체된 시간도 있으니 말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몇몇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봉연이었다. 그녀와는 이미 한번 겨룬 적이 있었고, 풍뢰북각과의 문제 때문에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봉연 역시 이준을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다. 최근 천태자까지 나서 그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상태였으니, 그녀가 이준을 잡아 북각에 넘기면 앞으로 각주 자리를 둔 쟁탈전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곳이야말로 이준을 사로잡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만약 그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천목산을 벗어나게 된다면 또 다시 강력한 영혼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될테니, 그 전에 그를 잡아야 했다.
“제 발로 찾아왔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여주도록 하지.”
물론 이준은 이런 봉연의 속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적어도 같은 연배의 사람들 중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다음으로 이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만검각의 승용과 황천각의 강신이었다.
이준과 시선이 마주친 승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강신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준이 승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거둬들이려는 그 순간, 눈가에 누군가가 밟혔다.
푸른색 옷을 입고 큰 눈을 가진 여자였다. 아마 천산대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얼굴엔 어딘가 모를 천진난만함이 걸려있었다. 각종 고수들로 가득한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듯 했다.
“저 여자를 조심해.”
이준이 여자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본 나설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누군지 알아?”
이준이 물었다.
“성운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니까.”
“성운각? 설마 모청연이 저 아이야?”
4대 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 대해선 이준도 들은 바가 있었다.
“맞아. 4대 각 중 성운각의 제자들이 숫자는 가장 적지만 실력은 가장 뛰어나지.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한게 바로 저 아이야.”
이준이 모청연을 주시하자 그녀도 알아차린 듯 이준을 보며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이에 이준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이준과 나설아가 천산대에 들어서자, 돌 계단위에 서있던 키 작은 노인은 두 사람을 살짝 흘겨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강철 이빨 부족의 족장인 김석이라고 합니다. 다들 이곳까지 온 것을 보아하니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 같군요. 천목산의 규칙에 대해선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요? 우리가 설치한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만 8개의 자리를 모두 차지할 수 있습니다.”
김석의 옆으로는 다른 쥐들에 비해 몸집이 훨씬 더 큰 거대 쥐가 있었다. 마치 인간처럼 똑똑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 이미 6레벨에 도달한 듯 했다. 아마도 이 두 마리의 쥐가 강철 이빨 부족을 대표하여 피의 못으로 들어갈 2명의 후보자인 듯싶었다. 저들이 투종이 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다면 이들은 강철 이빨 부족의 핵심 인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산대에는 김석의 힘없는 목소리만이 울려 펴지고 있었다. 겉보기엔 굉장히 약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 노인을 얕보지 않았다. 피의 못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며 위엄을 떨쳤던 인물이 바로 이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김석을 바라보던 이준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상을 입었나?’
“크흠…….”
김석이 천산대를 둘러보며 가볍게 기침을 한 뒤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그의 뒤로 보이는 돌계단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돌계단이 들썩거리는 것이 아니라, 소름이 돋을 만큼 많은 숫자의 거대 쥐들이 계단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관문 깨기는 한 가지 종목으로 이루어지므로 별로 어렵진 않을 것이오. 바로 우리 강철 이빨 부족의 음파진을 뚫고 산 정상에 도착하면 합격이오.”
김석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이준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나설아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강철 이빨 부족의 주요 공격 기술은 음파거든요. 이런 방대한 무리의 쥐가 내뿜는 음파라면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할지라도 버티기 힘들 거예요.”
김석은 인간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제 5분의 준비 시간을 주겠소. 준비 시간이 끝나면 음파진이 작동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실력에 달렸습니다. 물론 규칙에 따라 8명이 뽑히게 될 것이고, 만약 부족하다면 남는 자리에 대해서는 제비뽑기로 정할 것이오.”
말을 마친 김석은 더 이상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염력으로 귀를 막고 내 뒤를 잘 따라와.”
이준이 빽빽하게 들어선 쥐떼들을 보며 나설아에게 말했다.
“강철 이빨 부족의 초음파는 염력을 뚫을 수 있을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 그리고 일단 초음파가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환상이 보이기 시작할 거야. 음파진이 작동되면 나는 신경 쓰지 마. 내 실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야.”
하지만 나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데?”
“압도적인 염력으로 버티거나 그대로 강행 돌파하는 방법 밖엔 없어. 아마 똑같은 음파 계열의 무투기가 있다면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만, 평범한 소리 무투기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음파 기술이라…….”
나설아의 말을 들은 이준의 눈이 반짝였다.
황금사자의 포효는 꽤 높은 수준의 소리 무투기였으니, 이대로라면 강철 이빨 부족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준이 고민 하고 있는 사이, 김석이 두 눈을 천천히 뜨며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관문 깨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석이 말을 마치자, 천산대에 순간적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돌계단에 몰려있는 수많은 거대 쥐들의 눈빛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쥐들의 눈빛은 돌계단의 입구를 향해있었고 털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져 있었다.
살벌한 눈빛의 마수들을 보자, 그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 했다. 숫자도 숫자지만, 음파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1시간 남았소. 1시간 내에 정상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김석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갔다. 잠시 후, 두 그림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김석 앞에 섰다.
“해골파 소속 호야, 호성 입니다.”
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파는 천목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문파로, 풍뢰각과 비교할 만큼 큰 세력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이름난 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은 4성에서 5성 투황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라면 꽤 높은 실력자에 해당되겠지만 이곳에선 명함조차 내밀지 못 하는 평범한 실력이었다.
김석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체내에서 염력을 발산하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택한 전술은 아마도 강행돌파인 듯 싶었다.
두 사람이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수 천, 수 만 마리의 쥐 마수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며 기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찌익-
곧이어 영혼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가 울부짖는 것만 같은 섬뜩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