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유혈 사태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두 개 보다는 낫잖아?”
나설아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협정에 의하면 강철 이빨 부족은 천목산에 관문을 세울 수 있고, 목숨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인간들을 막을 수 있어.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인간에게 8개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어있지.”
“그러니까 천목산으로 들어선 이산 강철 이빨 부족에겐 밉보이지 않는 게 좋다 이 말이군. 그 자들이 산 정상으로 향하는 허가권을 쥐고 있으니…….”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단순히 산 정상에 올라가면 피의 못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이, 주위엔 점점 더 짙은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걸어가다 보니 양쪽으로 빽빽한 나무가 들어서있는 길이 나타났다. 길 끝에는 한 사람 정도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문이 나 있었다.
거대한 나무 앞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피의 못으로 향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 때, 사람들의 눈이 나설아의 품에 안겨있는 백여우를 향했다.
“백여우?”
나무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미궁을 통과할 방법을 찾지 못해 모여 있던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설아를 향하자 나설아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 뭘 무서워해.”
이준은 숨을 내쉬며 9성 투황의 기운을 아낌없이 몸 밖으로 방출해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5성 투황의 수준에 머물렀으니 이준의 기운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열 걸음 이상 가까이 다가오는 자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겠어.”
이준이 주위를 흘겨보며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말을 마친 이준은 덤덤하게 노란 나뭇잎이 깔린 길을 걸어 사람들을 지나쳐갔다.
두 사람이 나무 사이에 있는 문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어갔다.
그렇게 문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을 쯤, 누군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다들 함께 덤벼! 백여우만 뺏으면 피의 못은 우리의 것이다!”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상황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너 나 할 것 없이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쿵-
다음 순간,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가장 앞쪽으로 달려가던 사람이 마치 줄이 끊어진 연 마냥 날아가 거대한 나무에 부딪혔다.
푸확-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난 사내의 입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남자는 독기를 가득 품은 눈으로 이준이 서있는 곳을 노려봤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들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던 자가 이토록 참혹한 결과를 맞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이에 이준을 향해 달려들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자리에 멈춰 섰다.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이준이 나무 문을 향해 걸어가며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모두들 서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뭣들 하는 거야! 놈이 이대로 미궁으로 들어가게 놓아둔다면 앞으로 다음 기회는 3년 뒤에나 올 텐데!”
모두의 마음이 흔들리자 누군가가 또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이준의 몸이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가 소리를 지른 사내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모두가 멍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본 남자가 또 다시 소리쳤다.
“다들 뭘 하고 있는 것이오? 놈이 9성 투황이긴 하지만 다 함께 덤비면 어쩔 수 없을…….”
그러나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염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손바닥이 예리한 검 날처럼 남자의 등을 꿰뚫고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화염의 열기에 곧장 살이 익어버려 사내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일격에 사내의 목숨을 끊어버린 이준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자리에 있던 투황들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볍게 상황을 정리한 이준은 빠르게 나설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뒤 번개처럼 나무 사이에 있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펑- 펑-
그 때, 문 아래쪽이 심하게 떨려오는 듯싶더니 염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나무 가시들이 흙을 뚫고 튀어나와 문을 막았다.
문이 막힌 것을 본 이준은 재빠르게 팔을 휘둘러 새빨간 화염을 뿜어내 길을 만든 뒤 곧바로 검은 송곳을 빼들었다.
펑-
나무뿌리를 처리하자 이번엔 수많은 돌 가시가 이준의 발아래에서 솟아나왔다.
“조심해!”
나설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준은 가볍게 손에 들린 검은 송곳을 휘둘러 돌가시들을 부수며 더욱 빠른 속도로 나무 문을 향해 달려갔다.
쉭-
그 순간, 이번에는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염력으로 만들어진 바늘이 이준과 나설아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이준이 검은 송곳을 꽉 쥔 채 춤을 추듯 빠르게 움직이자, 바늘 하나도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곧이어 검영으로 만들어진 새카만 그림자 방패가 둥그런 형태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준과 나설아를 완전히 감쌌다.
이준이 스무 명도 넘는 투황이 전력을 다해 쏟아 부은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막아내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무리 9성 투황이라지만, 각기 다른 속성의 염력을 가진 투황들이 전력으로 사용한 무투기를 어찌 저렇게 쉽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이준이 차갑게 자신들을 공격한 사람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준의 표정에 그의 등 뒤에 있던 나설아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궁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무 시간 끌지마. 몸 조심하고…….”
말을 마친 나설아는 백여우와 함께 조심스럽게 나무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나설아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검은 송곳을 들어 올리며 곧바로 청록색의 염력을 내뿜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송곳이 돌연 눈부신 빛을 발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검은 송곳의 모습에 이준을 공격했던 이십여명의 투황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눈 앞의 젊은 청년은 피의 못을 노리는 수많은 투황들 중 가장 강하다는 승용, 강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사람들이 도망가려는 것을 알아차린 이준이 차갑게 모두를 비웃으며 검은 송곳을 크게 휘둘렀다.
“태양검!”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수십 줄기의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치 용처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녹색빛을 보고 놀란 사람들은 모두들 황급히 염력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펑- 펑- 펑- 펑-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오며 여기저기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염력으로 만들어 진 방어막이 하나 둘 터져나가며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투황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땅의 진동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하자 이준은 고개를 들어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미궁으로 통하는 나무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준이 막 나무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허허. 젊은 친구가 손이 꽤 맵구먼. 허나 이곳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버릴 생각인건 아니겠지?”
뒤를 돌아보자 회색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나무 위에 쭈그려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투종?”
이준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노인을 살펴보았다. 영혼탐지능력으로도 전혀 노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돼……. 투종급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잖아.’
한참동안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을 살펴보던 이준이 오른손 주먹을 왼손으로 감싸며 예를 올렸다.
“강철 이빨 부족의 선배님이시군요.”
천목산에는 투종 이상의 실력자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눈앞의 상대는 분명히 투종이었다. 그렇다면 노인이 외부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천목산에 살고 있는 강철 이빨 부족의 강자라는 의미였다.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은 놀란 표정으로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젊은 친구가 꽤 쓸 만 한 눈썰미를 가졌구먼.”
이준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있는 노인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괜히 밉보여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옥병을 꺼내 그것을 노인에게 건넸다.
“이것은 수련의 비약이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염력 회복에는 이만한 약이 없지요.”
‘수련의 비약’은 5레벨의 연금비약으로, 염력의 회복속도를 높여주는 제법 비싼 연금비약이었다.
수련의 단약이라는 말을 들은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수들에게 있어서 연금비약의 가치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마수들 중에도 연금술사가 있긴 했지만 그 숫자가 인간에 비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염력의 회복속도를 늘려주는 연금비약이라면 꽤 활용도가 높았다.
“껄껄. 참 예의 바른 젊은이구먼.”
회색 옷의 노인은 넉살 좋게 웃으며 이준이 건넨 병을 받아 들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 이곳은 내가 따로 사람을 불러 치우도록 하겠네. “
노인의 기분이 좋아진 듯하자,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노부(老夫)의 이름은 김곡일세. 선생은 무슨….”
김곡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혹시 연금술사인가? 이런 기운은 일반인들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닐 텐데.”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이미 자신이 연금술사인 것을 눈치챈 상태에서 거짓말을 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연금술사라……. 꽤 보기 드문 자로구먼.”
김곡은 이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시게. 백여우를 품에 안은 그 여자와 함께 간다면 어렵지 않게 미궁을 통과할 수 있을게야. 그리고 난 물건만 받고 입 싹 닫아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자네를 신경써달라고 미리 연락을 해놓도록 하겠네.”
노인의 한마디에 이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거듭되는 호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김곡은 점점 멀어져가는 이준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연금술사라……. 우리가 원하는 수준만큼의 실력을 가진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 * *
문으로 들어선 이준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위는 이미 짙은 안개들로 자욱했다. 이 정도로 안개가 짙다면 영혼탐지능력도 거의 무용지물일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그 미궁이라는 것인가? 과연 까다롭군.”
이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때, 손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며 근처에서 나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랄 것 없어. 나야.”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나설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타고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은 분명 그녀가 그곳에 있음을 알수 있었다.
“두리번거릴 필요 없어. 미궁 안에선 사람의 시야가 막혀서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보지 못하니까. 내가 당기는 방향으로 잘 따라와.”
하지만 짙은 안개속에서 손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준은 그렇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오직 나설아의 손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