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강신
이준은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나설아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운남종이 해체될 때의 일들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자신이 너무 어렸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멍하니 이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토록 따뜻한 이준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어찌해야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자신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고마워.”
나설아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황색 옷을 입은 세 남자 중 하나가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하지만 이준은 세 남자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설아를 휘감고 있는 검은 기운들을 유심히 관찰할 뿐이었다.
“암흑 속성의 염력이라……. 꽤 보기 드문 실력이군.”
곧이어 나설아의 손목을 잡은 이준의 손에서 화염이 솟구쳐 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투기를 덮쳤고, 이내 검은색의 투기가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준이 검은색 투기를 없애는 것을 본 황색 옷 남자의 눈이 점점 더 휘둥그레 변해갔다.
속박에서 벗어난 나설아는 손을 쥐었다 펴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이준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나설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그러나 이준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검은 송곳을 휘두르자, 황색 옷을 입은 남자들의 장창이 모두 박살나고 말았다.
검은 송곳에서 뿜어져 나온 경악할만한 힘에 화들짝 놀란 사내들은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뒤로 몸을 날렸다.
이에 차가운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던 이준이 갑자기 검은 송곳을 땅에 내리꽂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눈앞에서 이준이 사라지자, 세 사람은 몹시 당황한 듯 허둥지둥 자신의 등 뒤를 방어하려 했다. 그 때, 갑자기 새카만 그림자가 튀어나오며 세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 위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갑옷 위로 전해지는 엄청난 힘에 세 사람은 선혈을 토하며 줄이 끊어진 연 마냥 날아가 몇 그루의 나무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멈췄다.
이준은 너무나도 쉽게 3명의 4성 투황을 제압해 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만큼 성장한 이준의 모습에 나설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무시했던 그 어린 소년이 이제는 따라잡지 못 할 정도로 너무 멀리 가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편, 황색 옷을 입은 세 사람은 마치 새우처럼 등을 굽힌 채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뱉어 내고 있었다.
짝짝-
그 때, 갑자기 나무 위쪽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준을 노려보던 남자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법이군. 이준이라 했나? 풍뢰각과 한판 붙었다던 그 놈이 바로 너군?”
눈가에 흉터가있는 사내에게서는 좀 전의 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이준, 조심해. 저 자는 엄청나게 강하니까.”
나설아의 조언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기에도 눈 앞의 사내는 확실히 방금 전에 쓰러뜨린 세 명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이 왜 널 공격하는 건데?”
“천목산 안쪽에는 한번 들어가면 에너지 폭풍이 끝나기 전까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 있어. 하지만 내가 데리고 있는 이 백여우는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그래서 이 백여우를 빼앗으려는 거야.”
앞쪽에 미궁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미궁 안쪽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영혼탐지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시간을 허비한다면 피의 못에는 도달할 수 없다.
“난 네 년의 백여우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그게 필요한건 저 세 친구들이지.”
사내가 널브러져있는 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출발하기 전 지령파에 오래 알고지낸 친구가 저 친구들을 미궁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거든. 하지만 나의 방법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으니 백여우를 가져가 저들이 미궁을 지나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백여우는 넘길 수 없으니 썩 꺼져.”
나설아의 설명을 듣고 백여우가 있어야 피의 못에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이준은 곧바로 사내를 바라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나 강신은 겨우 그 정도로 쉽게 물러갈 사람이 아니다.”
“강신? 황천각의 강신?”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설아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준, 그냥 백여우를 넘겨주자. 저 자는 투종 계급의 강자들과 싸우고도 살아남은 사람이야.”
나설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백여우가 있어야 미궁을 지날 수 있다며. 걱정 마. 내가 해결할 테니까.”
하지만 이준은 상대가 투종 강자와 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 강자라는 말에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나설아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여우가 필요하다면 실력으로 빼앗아보든지.”
이준이 검은 송곳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큭큭, 승용이 뒤로 가면 더 재미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더니 그게 바로 너였나?”
강신이 웃으며 팔을 들어 올리자, 검은 기운들이 솟아나 그의 손을 감싸기 시작했다.
“좋아. 어디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신의 몸이 사라졌다가 이준의 앞에 나타나 그의 심장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펑-
그러나 이준 역시 그리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검은 송곳을 들어 올리자, 강신의 주먹과 검은 송곳이 맞부딪히며 굉음이 일었다.
“주검의 손길!”
하지만 강신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검은 송곳을 피해 모인 칠흑과 같은 어두운 기운들이 검은 손바닥 모양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이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강신의 공격은 빠르진 않았지만 매우 기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피하기가 어려웠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이준은 곧바로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검은 손바닥을 향해 불길에 휩싸인 주먹을 뻗었다.
펑-
이준의 주먹이 검은 손바닥에 맞닿자, 검은 손바닥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지의 불꽃?”
상대의 주먹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열기에 강신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천지의 불꽃은 암흑속성 염력의 천적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신이 뒤로 물러서자, 이준은 검은 송곳을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은 뒤 싸늘한 얼굴로 강신을 노려보았다.
강신의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의 능력 앞에선 별 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대가 천지의 불꽃을 가진 것을 확인한 강신은 잠시 고민하다 이를 악물고 자리를 떴다.
“빌어먹을. 과연 승용이 주목할 만 하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 어디 네 놈이 천산대까지 올 수 있나 보자고.”
이준은 강신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설아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강신은 중주에서도 이름을 날린 강자로,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 중에 그와 비등한 실력을 가진 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투종 강자들과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물론 투종 강자라 해도 황천각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그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투종 강자에게 단번에 제압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이 평범한 투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런 자가 겨우 몇 합을 겨루고 꽁무니를 뺏으니, 이준의 실력이 얼마나 성장한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한편, 깜짝 놀란 나설아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이준은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있는 세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꺼져.”
이준의 짤막한 한마디에 세 사람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강신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아나 버렸다. 강신도 도망가 버린 상황에 그들이 이준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도 피의 못으로 가는 거야?”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준이 헛기침을 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응…… 아직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일종의 훈련이라고나 할까…….”
나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준은 어색한 듯 애꿎은 손바닥을 계속해서 긁으며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왜 혼자 있는 거야?”
이준의 질문에 나설아 역시 어색한 듯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뗐다.
“스승님께선 폐관 수련중이시라 혼자 수련도 할 겸 나온 거야.”
“그래……? 잘 지내고 있나보네.”
이준이 눈을 피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나설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스승님 말이야?”
이에 이준은 또 다시 한참을 쭈뼛거리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너도.”
나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보다시피 잘 지내고, 스승님도 잘 지내고 계셔.”
“아직 중주 북쪽에 있는 거야?”
당시의 일에 대한 잘못이 어느 쪽에 있든, 운남종이 이준의 손에 의해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운남종의 종주였던 진율희는 자신의 대에서 수 천 년을 이어온 종파가 무너진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하고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준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처음부터 진율희는 잘못이 없었다. 시작은 나설아와 자신 사이의 문제였고, 이후로는 운산과 자신의 문제였다. 그리고 제자와 친구, 스승과 친구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바로 진율희였다.
나설아는 이준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스승님의 명이니까.”
이준의 입에서 또 다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 어쨌든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나도 피의 못으로 갈 건데, 괜찮다면 같이 가도 좋고.”
“그래도 될까? 내 실력으로는 짐만 될 텐데…….”
“아니야. 난 이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같이 있어준다면 큰 도움이 될거야.”
이준이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젓자, 백여우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던 나설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두 사람은 그렇게 일행이 되어 또 다시 산을 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없이 산을 오르던 나설아가 숲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미궁이야. 천연 미궁은 산기슭 아래쪽에 있어.”
나설아의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누군가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하지만 저기부터는 강한 마수 부족들의 영역이라 상당히 위험해.”
“마수 부족? 강한 자들이야?”
이준이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철이빨’이란 이름을 가진 부족인데 평균 레벨은 겨우 2, 3레벨에 불과하지만 개체는 무서울 정도로 많아.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놈들이 부족의 핵심을 이루고 있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족장은 7레벨 수준에 달하는 실력자라고 하던데, 인간으로 치면 6성 투종 정도는 될 거야.”
“그렇게 강한 마수 부족들이 천목산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째서 인간이 피의 못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
이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나설아가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피의 못 때문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적이 있었어. 그 때 인간이 강철이빨 부족을 이겼거든. 그래도 천목산의 특수한 지형 때문에 너무 강한 실력자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 결국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을 보게 됐지. 그래서 지금은 10개의 피의 연못 중에 여덟 개를 인간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마수들이 사용하고 있어.”
“8개?”
생각한 것 보다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열 개로도 모자란데, 여덟 개라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경쟁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