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1화. 재회
상대에게 모습을 들킨 이상, 이준도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지나던 길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검은 옷을 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았다. 벌써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어린 사내가 이 정도로 빨리 자신과 같은 곳까지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게다가 눈 앞의 상대에게서는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저는 만검각의 승용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만…….”
남자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왼손 손바닥에 대며 이준에게 인사를 올렸다. 중주 북부에서 이름난 강자라면 어지간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눈 앞의 사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만검각?”
만검각의 승용이라면 이번에 천목산을 찾은 이들 중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준 입니다.”
이에 이준은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이준? 이준이라면 얼마 전 풍뢰각을 뒤집어 놓았다는 그 분 이십니까?”
“하하, 그냥 좀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상대가 자신이 이준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자, 승용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사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천산대에서 다시 만나길 빌겠습니다.”
말을 마친 승용은 이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짙은 안개 속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경쟁자와 함께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녀석이 말한 천산대는 뭐지? 처음 와본 곳에서 뭘 알 수가 있어야지…….”
이준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밑에 있는 나무를 발판삼아 빠르게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 *
피의 못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산맥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은 점점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승용을 만난 후에 본 자는 고작 2명뿐이었다. 이준이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6레벨 마수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행히 이준의 인기척을 눈치챌만한 실력자는 아니었다. 이에 이준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곳을 지나쳐갔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 덧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숲 속에 어둠이 짙게 깔리자,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시야가 더욱 나빠졌다. 게다가 밤이 되면서 마수들의 움직임까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길도 모른 채 계속 이동한다는 건 무리였다. 하루 종일 영혼 탐지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한 채 산길을 달리느라 적잖은 힘을 쓴 이준은 잠시 휴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의 못을 찾는다 해도 열 명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멈춘 이준은 연금비약을 한 알을 털어 넣고 나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산을 올라왔지만 자신과 중간에서 마주쳤던 승용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대략적인 방향만 알고 길을 가는 자신과 천목산의 지리를 손바닥 꿰듯 알고 있는 승용이나 봉연 같은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염력을 회복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쉬지 않고 산을 올라야 했다.
* * *
쾅-!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숲 속,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 하나가 마수의 가슴팍을 세차게 내리쳤다. 마수는 엄청난 힘에 밀려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고, 그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후…….”
나무위로 올라간 이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월광석을 꺼내들었다. 월광석에서 뿜어져 나온 부드러운 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이준의 얼굴을 비췄다.
천목산은 이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호랑이처럼 숨어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강한 마수들 때문에 밤에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혼탐지능력이 없었다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이준은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입 속에 던져 넣은 뒤 또 다시 눈을 감고 염력을 회복했다. 컴컴한 밤에 마수까지 상대하며 산을 오르려니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삼십분 정도 정신을 집중한 뒤 이준은 서서히 눈을 떠 에너지의 흐름을 느꼈다. 어느 새 흐릿하게 느껴지던 피의 못의 기운이 조금 더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 *
깊은 어둠이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대부분의 시간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다행히 쉬지 않고 이동한 덕에 이곳까지 오면서 이미 5, 6명을 추월할 수 있었다.
날이 밝아지자, 마수들의 울음소리도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이렇게 강하다니……. 그러니 피의 못 같은 신기한 게 이곳에 있지.”
에너지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 이준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두 개의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이준은 잠시 멈칫하다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괜히 남의 싸움에 끼어들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금속성에 기합 소리가 귓등을 파고드는 순간, 이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낭랑하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설아…….”
* * *
짙게 깔려있던 안개가 치열한 전투로 인해 서서히 흩어지자, 그 사이로 네 명의 사내에게 둘러싸인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갈색의 의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여유롭게 나무에 기댄 채 말했다. 사내의 눈에는 기다란 칼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어서 처리하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밑에 서 있던 세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남자 모두 나무에 기댄 사내와 같은 휘장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같은 세력인 것 같았다.
“어서 저 백여우를 데려오너라. 여자를 죽이는 일이 처음도 아니지 않느냐.”
그들의 앞에는 손에 날카로운 장검을 들고 있는 여자 하나가 서있었고, 어깨 위에는 하얀 털을 가진 작고 귀여운 백여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백여우는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경계하고 있었고, 시종일관 새하얀 털을 파르르 떨어대며 낮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백여우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눈치 챈 나설아는 여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백여우의 털만큼 하얀 손이 검을 꽉 움켜쥐자, 장검에서 맹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꺼져.”
“하하, 겁 없는 년이구나. 그래봤자 5성 투황 정도의 실력으로는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게다. 자 다치기 전에 어서 백여우를 내놔.”
사내의 고함 소리에 나설아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갔다. 4성 투황의 투사들과 1대1로 겨루는 것은 나설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저 나무 위에 앉아있는 자의 실력을 알 수 없었으니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역시 지령파(地靈派)에는 온통 쓰레기 녀석들뿐이구나.”
자신의 세력을 ‘쓰레기’라고 말하자, 세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그들은 모두 지령파에서 손꼽히는 젊은 인재로, 승용 같은 자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명성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순식간에 삼각형 모양의 진형을 만들어 나설아를 둘러쌌다. 곧이어 그들의 몸에서 일제히 짙은 황색의 염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땅의 감옥!”
쿠궁-!
세 사람이 동시에 강한 힘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진흙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진흙 감옥이 생겨나 나설아를 가뒀다.
이에 나설아는 가볍게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지를 뒤덮을 만큼 강렬한 검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진흙 감옥은 산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감옥이 나설아의 손에 의해 빠르게 무너지자 황색 옷을 입은 남자들은 손바닥으로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다음 순간, 흙으로 만들어진 황색 창이 땅속에서 튀어나와 세 사람의 손에 쥐어졌다. 세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바닥에 발을 구르며 나설아에게 날아갔다.
4성 투황이 사방에서 공격해오니 5성 투황인 나설아 역시 손에 들린 장검을 번개처럼 휘두르며 적의 장창을 후려쳤다.
슈욱-!
세 남자는 에너지 소모가 적은 흙속성 염력만을 사용해 나설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나설아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설아 역시 그들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지만, 세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탓에 적의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챙! 챙! 챙!
그렇게 삼 대 일로 불리한 대결을 이어가기를 수 분, 갑자기 나설아의 검 끝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발했다.
펑!!
흙창은 나설아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부딪히기 허무하게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나설아가 손을 쓰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지축이 뒤흔들리며 바닥에서 날카롭고 거대한 기둥이 솟구쳐 나왔다.
결국 이번에도 기회를 놓친 나설아는 재빠르게 튀어 올라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세 사람의 손에는 새로운 흙창이 쥐어져 있었고, 단단한 황갈색의 흙갑옷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흙 속성 공법의 흙갑옷은 내구력이 좋고 방어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역시 5성 투황답게 잽싸군. 하지만 더 이상 봐주지 않는다. 어서 그 백여우를 우리에게 넘겨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웃기고 자빠졌네.”
나설아는 피식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사내들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손을 내뻗자, 여섯 개의 손에서 황색의 염력이 뿜어져 나오며 삼각형 모양을 형성했다.
“대지의 영혼, 토지 융합!”
세 사람이 함께 소리를 지르는 순간, 여섯 개의 빛기둥이 하나가 되어 엄청난 빛을 발산하며 나설아를 덮쳤다.
곧이어 염력 빛기둥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용으로 변했다. 흙으로 만들어진 용은 크게 포효하며 빠른 속도로 나설아에게 돌진했다.
“지령파의 토지융합도 꽤 쓸 만한 걸…….”
나무 위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는 흙의 용을 쳐다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에 나설아는 어깨위의 백여우를 한쪽에 내려놓은 뒤, 재빠르게 청록색을 띠는 염력을 소환해 바람 장막을 형성했다.
쾅-!
흙의 용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장막에 부딪혔다. 청록색의 바람 장막과 노란색을 띠는 흙의 용이 맞부딪히자, 마찰로 인해 주위에 영롱한 색의 빛이 번쩍였다.
하지만 나설아의 장막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고, 흙의 용은 더욱 험악한 기세로 날카로운 이빨을 세우며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설아는 재빨리 장검을 휘둘러 용의 이빨을 막으려 했지만, 정체 모를 흑색 에너지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옭아맸다.
펑!
하지만 흙의 용이 막 나설아를 집어삼키려는 찰나, 짙은 안개를 가르고 무시무시한 염력이 날아들어 거대한 용을 흙더미로 돌려보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눈부신 염력에 나설아를 공격하던 세 사람은 물론이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무 위에 앉아있던 사내가 펄쩍 뛰어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감히 누구냐! 이것은 지령파의 일이다!”
“남자 여럿이서 여자 하나를 괴롭히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잠시 후, 짙은 안개를 뚫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웃으며 걸어 나왔다.
나설아는 고마움을 표하고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짙은 안개 속에서 나타난 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세상이 모두 멈춘 듯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억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