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봉연 아가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에너지 폭풍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일단 에너지 폭풍이 시작된다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피의 못에 도달해야 했다.
나머지 세 각에서도 각자 가장 출중한 실력을 가진 투사들을 파견했으니, 이번 쟁탈전은 꽤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준이라는 사내 역시 조금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썩 대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심운을 죽이고 번개의 진을 뚫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그의 힘이 아니라 그의 몸에 숨어있는 강자의 영혼 덕분이라고 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를 삼일, 드디어 천지의 에너지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본격적인 폭발을 일으키려는 조짐을 보이자, 나무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이준이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오려는 건가?”
구름이 감도는 방대한 산맥 위로 돌연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뒤따라 하늘을 뒤엎을 정도의 방대한 에너지가 폭발했다.
구름을 꿰뚫고 폭발하는 거대한 에너지 폭풍에 하늘에 떠있던 강자들이 일제히 몸을 피했다. 이 정도 규모의 폭발에 휘말려든다면 투종 강자라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에너지 폭풍이 뿜어내는 영롱한 빛줄기에 천목산에 모여든 강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에너지에 이준 역시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에너지의 폭풍 속에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휴……. 정말 엄청난걸?”
이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목산 아래를 굽어봤다. 산 전체를 뒤덮은 에너지 폭풍에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대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작 열 명 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 것도 납득이 갔다.
콰앙.
그 때, 산 아래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한 건가?”
곧이어 청아한 울음소리가 상공에 울려 퍼지며 거대한 칠색 두루미가 날개를 펄럭이며 산으로 날아왔다.
“두 장로님은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피의 못은 투종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동시에 중주의 내로라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풍뢰각의 기대주인 ‘봉연’ 역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젊은 강자 중 하나였다.
봉연은 자신을 향한 시선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도도한 표정으로 칠색 두루미의 등에서 뛰어내려 발걸음을 옮겼다.
쉭-
하지만 봉연이 바닥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봉연이 번개처럼 손을 뻗자, 강력한 흡입력이 그림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던 그림자가 가볍게 손을 흔드는 순간 두 줄기의 에너지가 서로 맞부딪히며 육중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그림자는 두 개의 에너지가 충돌하며 일어난 폭발의 반동을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맙소사, 저 자식은 누군데 감히 봉연 아가씨를 무시하고 먼저 정상으로 향하는거지?”
“하하, 재밌군.”
갑자기 등장한 남자가 자신을 제치고 정상으로 향하자, 시종일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봉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 *
한편, 천목산 위쪽에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품은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풍뢰각 각주의 제자가 확실하군. 소문 그대로 실력도 만만치 않겠는데.”
봉연을 제치고 가장 먼저 에너지 폭풍 속으로 들어간 것은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주위에는 온통 천지의 에너지를 가득 머금은 구름이 가득해 한치 앞조차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잠시 후, 칠색의 그림자 하나가 이준의 뒤를 따라 에너지 폭풍으로 뒤덮인 산길에 들어섰다.
자신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감지한 이준은 빠르게 더욱 깊은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서!”
이준이 달아나려 하자, 칠색 도포를 입은 봉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쾅!
다음 순간, 이준의 눈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사람 머리통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뒤를 돌아보니 봉연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쾅!
그리고 이준이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또 한 번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눈 앞의 나무에 구멍이 뚫렸다.
봉연의 쉴 새 없는 공격에 화가 난 이준은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녀를 향해 염력을 쏘아냈다.
퍼엉.
그러자 육중한 폭발음이 조용한 산맥에 울려 퍼지며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게 깔려 있던 두터운 구름이 흩어지며 커다란 구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음이 들리기 무섭게 천목산 안으로 들어온 다른 강자들이 달려와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구멍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과연 풍뢰각 최고의 기린아답군. 번개와 바람 속성을 동시에 다루다니.”
이준 역시 봉연이 두 가지 속성의 염력을 모두 다루는 모습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금술사가 희귀한 것은 불 속성의 에너지와 나무 속성의 에너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금술사는 불 속성의 에너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고, 아주 약간의 나무 속성의 에너지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봉연은 두 가지 속성의 염력을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그 두 에너지를 완벽하게 융합시켜 사용하고 있었다.
“풍뢰각 번개의 진을 뚫고 비천 장로의 손에서 도망친 사람이 당신이군요. 맞죠?”
“이준? 저 놈이 심운을 죽인 사람이라고?”
“정말? 그 놈이 여기 나타났다고?”
“어디, 어디 있는데?”
봉연의 한마디에 숲 속 이곳저곳에서 이준을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은 최근 중주 북부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이름이었으니, 이 자리에 모인 젊은 강자들 중 대부분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특히 ‘천태자’ 비천에게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중주의 젊은 천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제 그만하고 갈 길 가시죠. 여기서 서로 발목 잡혀서 좋을게 없을 것 같은데요.”
이준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자, 봉연 역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바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방금 전의 짧은 대결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감이네요. 피의 못에서 보죠. 당신이 거기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말을 마친 봉연은 곧바로 나비처럼 날아올라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고, 이준 역시 빠르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 싸우고 둘 다 그냥 가네. 아쉽군. 근데 두 사람이 진짜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긴 하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지금부터 힘을 빼려고 하겠어?”
이에 둘의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다시 흩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 짙은 구름 때문에 지도를 갖고 오긴 했지만 앞을 볼 수가 없어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 * *
구름으로 잔뜩 덮여 있는 숲 속에서 길을 찾지 못 하는 것은 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지도가 아무 소용이 없네. 이렇게 시야가 안 좋은 곳에서 대체 어떻게 피의 못을 찾지?”
어느새 주위에 있던 구름이 점점 더 짙어져 이제는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 사이에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방대한 오색의 에너지 폭풍을 볼 수 있었다.
‘흐음……. 풍뢰각 정도 되면 당연히 피의 못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겠지?’
이준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풍뢰각의 정보력과 실력이라면 아마도 봉연에게 피의 못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것 같았다.
물론 풍뢰각뿐 아니라 만검각 같은 세력들 역시 피의 못으로 가는 정확한 경로를 알고 있을 것이다.
“든든한 세력들이 받쳐주니 얼마나 좋아. 에휴, 피의 못이 열리는 건 에너지 폭풍이 발생한 다음 날이라고 했지? 이걸 어쩐다…….”
씁쓸한 웃음을 짓던 이준은 갑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영혼 탐지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한다고 피의 못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산 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30 분 정도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자, 왼쪽에서 미세하게나마 강한 에너지의 흔적이 느껴졌다.
“북쪽인가?”
방향을 정한 이준은 곧바로 나무 위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방향을 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이준은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긴 뒤 빙돌아 다시 북쪽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이준은 적지 않은 마수들과 혈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용히 산을 올랐다.
그는 뛰어난 영혼 탐지 능력으로 마수의 기운을 감지해내며 마수를 피해 빠른 속도로 산길을 달려 나갔다.
한 시간 정도를 전력으로 질주하던 이준은 그제야 조금 속도를 줄였다. 산맥이 깊어질수록 강한 마수들이 많이 숨어있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조심스럽게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기를 몇 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마수 하나와 사람 하나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는 거대한 마수의 모습을 발견한 이준은 반사적으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6레벨 마수?”
이 시간에 벌써 여기까지 도착한 저 사람도 실력이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이는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엔 냉기가 가득했고, 등에 멘 파란색 검에서는 칼날보다 날카로운 살기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주위 흔적으로 봤을 때 이 남자는 이미 이 마수와 대결을 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옷차림은 여전히 정갈하고 깨끗했으니, 6레벨 마수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검은 색 옷을 입은 남자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의 정면에 서있던 커다란 마수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엄청난 속도네…….’
“귀하는 언제까지 거기서 그렇게 보고 있을 거요?”
이준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고 있을 때,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