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화. 마수의 왕
“봉황 마수의 날개라고?”
“그 자를 안단 말이냐?”
이준의 말에 정신이 든 은랑왕은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 황급히 뒷걸음질을 쳐댔다. 뼈 날개에 살점이나 깃털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날개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는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봉황 요괴의 날개를 얻은 것이지?”
은랑왕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물었다.
봉황 요괴는 수많은 마수들 중 정점에 선 종(種) 중 하나로,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마수의 왕’으로 불리울 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너, 이게 무슨 마수의 날개인 줄 알고 있는 거야?”
이준이 물었다.
“설마 봉황 마수도 모른단 말인가?”
이준의 말을 들은 은랑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봉황 마수? 그 깡마른 시체가 바로 그 봉황 마수였나 보지? 혹시 그 봉황 마수란 게 뭔지 아는 거야?”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은랑왕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내려앉았다.
“흥, 봉황 마수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지옥 끝까지 네놈을 쫓아갈 것이다.”
은랑왕은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죽일 듯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더니 곧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이준을 향해 새파란 주먹을 내질렀다.
하짐나 이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은랑왕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은빛 형상 하나가 나타났다.
순간 저릿한 느낌을 받은 은랑왕은 황급히 팔을 빼며 뒤로 물러서려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은빛의 주먹이 그의 흉부를 강하게 내리쳤다.
퍽!
은랑왕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대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쓰러진 은랑왕이 황급히 고개를 들자,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 은색의 물체 하나가 이준의 곁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하나는 나의 질문에 얌전히 대답하고 계속해서 이 산의 지배자로 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체가 되는 거야.”
이준이 은랑왕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네놈 따위가?”
“음……. 내가 아니야.”
이준은 손가락으로 은랑왕을 가리키자, 곁에 있던 은빛 요괴가 번개처럼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은랑왕은 요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워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대지요괴와 은랑왕의 주먹이 맞부딪히는 찰나, 먼지가 일어나며 지면에 있던 작은 돌들은 폭발하듯 가루가 되어버렸고, 계곡 안쪽에 있던 물고기들마저 그대로 터져버렸다.
먼지가 흩어지자 제자리에서 반걸음정도 밀려난 요괴의 모습과 족히 몇십미터는 밀려난 은랑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하늘 요괴가 또 다시 은랑왕을 향해 튀어나갔다.
“잠깐! 잠깐! 내가 졌소!”
살기를 품은 채 달려오는 은빛 요괴를 본 은랑왕이 사색이 되어 황급히 외쳤다.
은랑왕의 외침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늘 요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상대가 항복을 선언하자,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해봐. 그 봉황 마수란 게 뭐야?”
은랑왕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공포로 질린 눈빛으로 하늘 요괴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봉황 마수는 수천, 수만의 마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종족이지. 중주에선 그다지 유명하진 않으나 마수들 사이에서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봉황 마수가 태어날 때 그들의 선조들이 영의 눈이라는 것을 열어주면 태어나는 즉시 5레벨 마수에 해당하는 실력을 갖게 되지. 성장한 봉황 요괴는 최소 7레벨의 마수가 되고, 일부는 8레벨 마수가 된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숫자는 많지 않지만 연금탑이나 영혼의 궁전 같은 막강한 세력조차 그들을 깔보지 못하지. 봉황 요괴는 죽기 전에 자신의 부족에 있는 제단으로 날아가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니 보통은 그들의 날개는커녕 깃털 하나 조차 구할 수 없지. 설사 얻는다 하더라도 봉황 마수들에게 들키는 순간…….”
은랑왕은 말끝을 흐리며 이준을 쳐다보았다. 마치 상대가 언제 죽을지 기대라고 하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이에 신경 쓰지 않고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마수 중에 봉황 마수에 대항할만한 종은?”
이준의 질문에 은랑왕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부족이 있다. 모두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부족으로 그 중 하나는 지옥 구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설의 용이지.”
“지옥 구렁이? 전설의 용?”
이런 쪽의 지식이 얕은 이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이 두 종족은 매우 무서운 부족이지. 전자는 숫자는 많지만 순수한 혈통은 아니다. 전설의 용은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는 종족이라 나도 잘 알지는 못해. 그러나 그들의 실력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봉황 마수를 먹이로 삼는다고 하더군…….”
은랑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상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도 흘려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전설의 용은 마수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마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유롭게 공간 벽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말을 마친 은랑왕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이준을 바라봤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든다고? 설마……. 보람의 본 모습이 용인가?’
이준은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저장 반지에서 열매 하나를 꺼내 은랑왕에게 집어던졌다.
“가져가. 순순히 말해준 대가니까. 그리고 이 산맥에 남아있으려면 오늘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기이한 빛을 띤 열매를 받아 든 은랑왕은 조심스럽게 저장반지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좋다. 우리 마수들은 입이 아주 무거우니까. 인간처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종족과는 다르지. 게다가 말해봤자 나만 더 귀찮아질 것 같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네가 무장과를 주었으니 나도 충고 한마디만 하지. 절대로 봉황 마수들에게 뼈 날개를 들키지 말아라. 놈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족을 해한 자를 용서하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은랑왕은 비행 마수의 머리로 뛰어올라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렸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은랑왕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날개가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었다니…….’
* * *
어두운 숲, 횃불에서 피어오르는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피어오르는 횃불 옆에 가부좌를 하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이준의 얼굴도 덩달아 빨갛게 물들었다.
굳게 감은 두 눈 사이에 새겨져 있던 새하얀 화염의 인도 덩달아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기를 반나절, 갑자기 이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형의 에너지가 양미간 사이에서 용암처럼 터져 나오자,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땅이 흔들거리더니 웬 그림자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림자는 이준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분신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지금 만들어 낸 분신의 실력은 아쉽게도 투령 단계에 불과했다. 만일 눈썰미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단번에 그것이 분신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저장해 뒀던 수련 방법에 의하면 ‘번개 분신’의 가장 처음 순서는 분신을 응집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성하면 다음 순서는 이 분신을 본체의 실력과 같은 레벨로 수련시키는 것 이었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태자 비천의 실력으로도 이제 겨우 2레벨 분신을 만들어내는데 그쳤으니, 완벽한 번개 분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흐음……. 분신을 응집하는데 성공한 뒤에는 번개와 바람의 힘을 분신에 주입한다고 해야 했지? 확실히 그 힘으로 영혼 에너지를 가리면 분신과 본체를 구분하기 어려워지겠군.’
이준은 옆에 있는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날 비천의 몸에서 보였던 번개 빛도 그 에너지 때문인가? 하지만 내 체내엔 번개의 염력도 부족하고, 바람의 염력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만일 염력으로 분신을 보호할 수 없다면 분신보다 실력이 강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 곧바로 분신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허허, 누가 번개와 바람의 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나? 이건 그저 일종의 수련 방법일 뿐이네. 자네의 몸에는 천지의 불꽃이 있지 않은가. 구름 불꽃을 본체에 주입시키면 영혼의 힘을 공격할 수 있는 그 어떤 에너지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겁낼 필요가 없네. 그리고 천지의 불꽃의 에너지라면 비천의 분신보다도 더 강한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네.”
이준이 혼자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돌연 천화존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두루마리에는 반드시 번개바람의 힘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힘들게 응집해 낸 분신이 없던 일로 되면 어떡하죠? 특히 구름 불꽃은 영혼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불꽃이잖아요. 번개 분신에 구름 불꽃이 닿으면…….”
“허허, 자네 의외로 의심이 많군. 구름 불꽃은 이미 자네에게 완벽하게 복속되어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내 말을 믿고 한번 시도해보게.”
사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는 속성의 염력을 손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었다. 그럴 바엔 이화의 힘으로 한 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다면 실패해도 잃을 것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번개분신보다 더 강력한 분신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좋아, 그럼 한번 해 보자고.”
지금 속도라면 닷새나 엿새 정도만 더 걸으면 이 산맥을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엿새 사이에 분신을 최대한 강화해야 했다. 투령 레벨의 분신으로는 사실상 앞으로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옆에 있던 분신을 짚자, 분신이 순간적으로 무형의 빛으로 변해 이준의 미간 사이로 들어갔다. 가볍게 손을 흔들자, 분신이 다시 그의 곁에 나타났다.
다시 눈을 감고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켜 양미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의 영역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공간이 일그러지며 작은 빛이 응집됐다가 천천히 분신으로 변화했다.
이준의 영혼이 눈을 감고 수련 자세를 취하자, 앞에 있던 분신도 따라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준은 그제야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손을 흔들어 구름 불꽃을 손바닥에 올려놨다.
구름 불꽃이 나타나는 순간, 발아래 펼쳐져 있던 영혼의 영역이 천천히 물결치기 시작했다.
이준은 곧바로 구름 불꽃을 분신과 떨어뜨려 놓았다. 구름 불꽃은 영혼 에너지에 있어서는 천적이나 다름없었으니 일단은 가까이 붙여놓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구름불꽃을 날려 보내 번개 분신을 뒤덮자, 분신이 파르르 몸을 떨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도를 더 낮춰보게. 자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천화존자의 조언에 따라 손가락에 힘을 주니 분신을 감싸고 있던 화염이 어둡게 변하며 천천히 온도가 떨어졌다. 구름 불꽃의 온도가 떨어지자, 조금씩 흐려지던 분신이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