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7화. 숲속 수행
잠시 가만히 누워 숨을 고른 이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하늘 요괴를 불러낸 뒤 눈을 감은 채 영혼의 힘을 활용해 번개 분신의 수련 방법을 살펴보았다.
천태자의 영혼에서 얻은 정보로 인해 이준의 머릿속에 있었던 심오하고 난해한 문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대신 그 자리에 완전한 번개 분신의 수련법이 나타나 있었다.
이준은 홀린 듯 번개 분신의 수련법을 탐독해 나갔다.
짧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번개의 분신이란 공법은 지금까지 익혔던 그 어떤 무투기보다도 심오하고, 난해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 공법이 염력 뿐 아니라 막대한 양의 영혼 에너지를 요한다는 점이었다.
‘어쩐지 풍뢰각에서도 극소수의 인원만 이 공법을 익힐 수 있다고 하더니…….’
완전한 수련법을 손에 넣고 나니, 풍뢰각에서 왜 번개의 움직임을 그토록 중하게 여겼는지 역시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번개 분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번개 에너지를 응집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번개 에너지를 응집시키기 위해서는 번개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익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응집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번개 분신을 완전히 익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
번개 분신은 각각 1, 2, 3 레벨로 나누어졌고, 레벨에 따라 분신이 본체의 삼분의 일,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힘을 갖게 되는 원리였다.
본체와 분신이 똑같은 힘을 내기 위해서는 번개 분신의 최고 단계인 3레벨에 이르러야 했다.
“그럼 천태자가 사용한 건 2레벨 번개 분신이었겠군……. 완전한 번개 분신이었다면 절대로 제압하지 못 했을 거야.”
이준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이준의 발에서 은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위가 환히 밝아졌다
번개의 움직임을 사용한 채 앞으로 나아가며 고개를 돌려보니, 잔상이 곧바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는 지금 이준이 번개 분신을 만들기는커녕 번개를 응집시키는 경지에조차 이르지 못 했음을 의미했다.
“마음으로 다스려 그림자에 혼을 담는다…….”
이준은 번개 분신의 수련법에서 읽은 내용을 몇 번이나 되뇌이며 또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금 그가 만들 수 있는 잔상의 최대치는 고작해야 4개에 불과했다.
게다가 4개의 잔상 중, 3개는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사라지는 수준이었다. 오직 한 개의 그림자만이 10초 남짓한 시간동안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남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이준은 극도로 미세한 영혼의 파동을 느꼈다.
“잔상이 나타나는 순간 영혼을 남겨야 분신을 응집시킬 수 있는 건가……. 젠장, 이렇게 빨리 움직이면서 어떻게 영혼을 남기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무투기잖아.”
나름대로 고급 무투기를 많이 익혔다고 자부하는 이준이었지만, 이렇게 수련이 어려운 무투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끙끙거리며 잔상을 만들기를 반복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씨 가문의 미래와 영혼의 궁전에게 끌려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무투기를 익혀야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뒤 또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번개의 움직임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한번으로도 부족하다면 백번을, 백번으로도 부족하다면 천 번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이 지나자, 번개의 분신에 대해 약간이나마 익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재 유일한 단점이라면 염력 소모가 너무 심하다는 점 이었다. 연금비약을 먹더라도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수련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휴……. 피의 못이 열리는 게 한 달 뒤라고 했지?”
잠깐의 휴식을 통해 또 다시 기력을 회복한 이준이 산맥의 끝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산맥에는 적지 않은 마수들이 숨어 있었다. 개중엔 강한 실력을 가진 마수도 있었다.
하늘을 날아 피의 못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천태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산속을 달려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 달 동안 산맥을 따라 이동하면서 번개 분신을 수련하고, 고레벨의 마수들을 사냥하며 실력을 기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산맥을 뚫고 이동하면서 수련이라……. 갑자기 천둥산에서 수련을 하던 시절의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당시에는 힘들고 고되게 느껴졌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졌다.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내려다보던 이준의 귓가에 흉악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좋아, 오랜만에 마수 사냥이나 해보자고!”
* * *
푸른 숲속 사이로 기다란 은하수 같은 계곡이 보였다. 계곡 주위에 흐르는 고요함은 주위의 긴장된 분위기마저 평화롭게 만들었다.
쾅!
정적을 깨버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숲속에서 폭발하듯 날아왔다.
계곡 주위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고 멈춰선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는 흉흉한 살기를 풍기는 거대한 마수였다.
마수는 잠시 몸부림치는 듯싶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마수의 복부에는 까맣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었다.
계곡 주위에 있던 다른 마수들은 시체가 되어버린 거대 마수를 보곤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또 다시 고요해진 숲 속에 누군가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한 깡마른 인간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거대 마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얌전히 자기 영역이나 지켰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쯧.”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이준이 산맥을 가로질러 천목산으로 향하기 시작한지도 어느 새 열흘이나 지나 있었다. 그 시간동안 수많은 마수들이 이준의 손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 광활한 숲 속은 실력을 기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수풀 속에는 어줍 잖은 투황보다 강한 마수가 가득했다.
심지어 우연히 희귀한 약재를 찾아 채집을 하려는 순간 2성 투종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진 마수와 맞붙은 적도 있었다.
방금 쓰러뜨린 곰도 5성 투황 정도는 되는 마수였다. 거대한 곰 형상을 한 마수는 이 산의 지배자라 불리는 ‘은랑왕’이 보낸 숲의 파수꾼 이었다.
은랑왕은 인간으로 치면 2성 투종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진 자로, 극도로 민첩한 몸놀림과 야수 특유의 직감으로 어지간한 3성 투종과 맞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전의 이준이라면 감히 맞붙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은랑왕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이준을 그리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은랑왕과 이준은 사흘 동안 벌써 두 번이나 맞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매번 이준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은랑왕은 다른 마수들을 풀어 이준의 뒤를 쫒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하늘 요괴를 꺼낸다면 숲의 제왕인 은랑왕 따위는 순식간에 시신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준은 일부러 하늘 요괴를 꺼내지 않았다.
이러한 실력을 가진 상대야말로 지금의 이준에게 가장 필요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풍뢰북각의 3대 장로 같은 사람들은 이준을 훨씬 뛰어넘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므로 천화존자의 도움 없이는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 마주하고 있는 은랑왕은 오직 이준 자신의 실력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는 상대인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즉시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놈이 요 며칠간 날 찾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인데?”
이준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거대한 곰 마수 앞에 나타났다.
비수를 꺼낸 이준은 마수의 몸을 찔러 노란 빛깔의 6레벨 마정석을 꺼냈다.
마정석을 계곡물에 깨끗이 씻은 후 저장반지에 집어넣던 이준은 언뜻 계곡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절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간 노숙을 하는 바람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휴……. 이래서야 언제 번개 분신을 익히지?”
이준의 손에 화염이 피어오르며 남아있던 물기들을 모두 말려버렸다.
“천목산의 피의 못이 열리려면 이제 삼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텐데……. 이 속도라면 열흘이면 산맥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일단 이 산만 빠져나가면 날아서 천목산으로 가야겠어.”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바람 속에는 엄청난 살기가 실려 있었다.
“이번엔 꽤 빠르군.”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네 이놈! 당장 물의 열매를 내놓거라!”
가까이 다가온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거대한 비행 마수였다. 놈이 커다란 두 날개를 펄럭이자, 강풍이 일어나며 온 숲을 뒤흔들었다.
비행 마수의 머리 쪽에는 상처로 가득한 상반신을 드러낸 한 남자가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산의 지배자가 고작 열매 하나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우는 건가요?”
이준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반신에 상처가 가득한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이 산맥의 지배자라 불리는 은랑왕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은랑왕은 자신의 힘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마수였다.
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때는 하늘이 뚫린 듯 번개가 쏟아져 내려온다고 했었다. 재수가 없으면 투황 강자가 이 번개에 맞아죽을 정도였으니, 은랑왕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그가 엄청난 실력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마수를 인간으로 바꿔주는 연금비약이 있다면 이런 위험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런 연금비약을 구하는 것이 그리 쉬울리 없었다.
“무슨 개소리냐 이놈!”
은랑왕이 비행 괴수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네 놈을 찢어죽일 것이다!”
은랑왕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한 채 이준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번개의 움직임을 사용해 은랑왕의 공격을 간단하게 피해냈다.
“비겁한 놈! 배운 것이 도망친 것 밖에 없느냐!”
분명 자신이 상대보다 강한데도 불구하고 이준이 계속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인랑왕은 복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준의 남긴 세 개의 잔상 중, 두 개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하나의 잔상은 계속해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잔상에서는 심지어 영혼의 힘까지 느껴졌다.
“서, 성공인가?!”
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사라지지 않는 잔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잠시 멍하게 잔상을 쳐다보던 이준이 잔상을 향해 손을 뻗자, 잔상이 자그마한 빛덩어리로 변해 이준의 미간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겨우 하나의 분신 씨앗에 불과했지만 가장 어려운 창조 단계를 성공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수련을 한다면 언젠간 분신을 응집하는데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하. 고맙구나. 네가 날 도와줬으니 얌전히 계속해서 산의 지배자로 남을 수 있도록 놓아주도록 하마.”
이준이 은랑왕을 향해 웃음을 터뜨린 뒤 뼈 날개를 펼쳐 숲을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은랑왕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봉황 마수의 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