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해결
그 사이, 이준은 사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천화존자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괜한 미안함에 고개를 돌리거나 되돌아간다면 그 보다 멍청한 결정은 없을 것이다.
“망할 늙은이, 오늘의 원한은 반드시 되갚아주겠어!”
미칠 듯한 질주가 20분쯤 이어졌을 무렵, 갑자기 이준의 앞쪽 공간이 일그러지며 천화존자의 영혼체가 나타났다.
천태자와 꽤 치열한 대결을 치른 듯, 그의 영혼체는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었다.
“서두르게. 놈이 금방 쫓아올 걸세.”
“잠시만요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늙은이가 제 위치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준의 말에 천화존자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태자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정도로 이준의 위치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네 몸에 새겨진 영혼의 각인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는가? 대체 그 자가 무슨 수로…….”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두루마리! 번개 분신의 수련법이 담긴 두루마리!”
이준이 눈을 번쩍이며 손바닥을 펼치자 4개의 은색 두루마리가 나타나더니 각각 4개의 방향으로 기다란 은빛 꼬리를 남기며 날아갔다.
“망할 늙은이……. 이젠 어떻게 쫒아오나 보자!”
* * *
거대한 산맥 위로 펼쳐진 새파란 하늘이 일그러지며 은빛의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천태자 비천이었다.
상공 위에 나타난 천태자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영혼의 반응이 갑자기 네 갈래로 나뉘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들킨 건가? 그런 보물을 버리는 결정을 내리다니, 실로 대단한 놈이로군.”
천태자가 계속해서 이준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던 것은 4개의 두루마리 내에 새겨진 특수한 각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이준이 그것을 눈치 채고 두루마리를 버릴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비천의 시선이 전방의 먼 곳을 향했다. 자신의 속도라면 지금 이준을 쫓아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추적하는 사이 사방으로 퍼져버린 번개의 분신 두루마리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버린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상대의 노림수 역시 자신이 추격을 포기하고 ‘번개 분신’의 수련법이 담긴 은빛 두루마리를 회수하러 가는 것일 것이다.
“젊은 놈치고는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천태자의 손이 움직이며 허공위에 기이한 은빛 문양이 떠올랐다.
“번개의 분신, 현신!”
곧이어 그의 체내에서 무형의 기운이 폭발하더니 점점 한 곳으로 응집되어 천태자와 똑같은 모습을 한 분신 하나가 나타났다.
천태자는 분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그놈을 죽이고 두루마리를 회수해 오거라. 놈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 그저 발목만 잡아두면 된다.”
본체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태자의 분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천태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고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한 줄기의 빛이 날아왔다.
눈부신 빛줄기가 지나가자, 그 뒤를 따라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태자의 기척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마 두루마리를 쫓아간 게 분명해. 역시 두루마리에 영혼의 각인이 숨겨져 있었군.”
더 이상 천태자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 듯하자, 이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두루마리를 버린 것이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열쇠’만 찾는다면 번개 분신을 수련할 수 있었다.
“그런 것 같군. 놈의 기척으로 보아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다네. 보아하니 따돌린 듯 한데……. 조심해!”
천화존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력한 영혼의 힘이 하얀 저장반지에서 뿜어져 나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펑!
다음 순간, 영혼의 힘이 무언가와 부딪히며 공간에 파동이 일어나더니 공간이 왜곡되며 익숙한 은빛 형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태자였다.
“어리석은 놈, 네 놈은 절대로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태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번개의 분신 두루마리는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
이준의 한마디에 천태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두루마리는 알아서 회수될 것이다. 그리고 네 놈은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지.”
“잠깐, 이 자의 기척이 너무 약하다. 이전에 느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약해!”
그 때,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천화존자의 영혼이 천태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어서 이준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번개 분신?”
“보아하니 번개의 분신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나 보구나.”
천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준, 상대하지 말게, 놈은 그저 시간을 끄려는 것뿐이야. 본체는 두루마리를 쫒으러 간 게 분명하네. 만약 본체가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그땐 정말 도망치지 못할 거야! 어서 이 분신을 처리하고 달아나게!”
눈앞의 상대가 분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천화존자는 곧바로 영혼의 힘을 폭발시키며 천태자의 분신을 향해 영혼 에너지를 날렸다.
천태자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바닥에서 번개를 뿜어내 천화존자의 영혼 에너지를 막아냈다. 본체와의 대결로 이미 많은 힘을 소모한 천화존자의 영혼체로는 천태자의 분신조차 일격에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천화존자는 투존이었고, 분신은 분신이었다. 계속해서 대결을 벌인다면 천화존자의 영혼체가 천태자의 분신을 물리칠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천화존자의 상태로는 천태자의 분신을 처리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진다면 결국 천태자의 본체가 돌아오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펑!
바로 그 때, 천화존자의 공격이 천태자의 번개 분신을 호되게 후려쳤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번개 분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번갯불이 이곳저곳으로 튀기 시작했다.
천화존자의 공격에 당한 번개 분신의 몸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의 머릿속에 불현 듯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충격을 받았을 때 모습이 흐릿해지는 것은, 영혼체가 가진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분신……. 영혼으로 만들어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스파크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이준의 턱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화존자 선생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잠시 힘을 빌려주십시오!”
이준의 외침을 들은 천화존자는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 이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천화존자가 이준의 몸 안으로 들어오자, 폭발저긴 영혼 에너지가 하늘과 땅을 뒤덮더니 무형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불 이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불꽃?!”
무형의 화염을 본 천태자의 분신은 깜짝 놀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태자 정도의 실력자라면 구름 불꽃이 영혼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딜 감히?”
천화존자의 힘을 빌려 강해진 이준이 차갑게 웃으며 손을 휘두르자, 불 이무기가 번개 분신의 몸을 강타했다.
펑!
불 이무기와 부딪히는 순간, 천태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눈부신 은빛 섬광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번개 분신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불 이무기가 또 다시 맹렬한 속도로 몸을 부딪혀왔다.
“앗!”
방어가 뚫리자 비명과 함께 천태자의 분신이 빠른 속도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이준은 미친 듯이 손바닥을 휘두르며 불 이무기를 조종해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천태자의 분신을 몰아세웠다.
곧이어 무형의 불꽃으로 만들어 진 불꽃 이무기가 수 백 마리의 뱀으로 갈라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끝을 알 수 없는 천지의 불꽃의 맹공 앞에 천태자의 분신은 거의 사라지기 직전까지 흐릿해져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불 이무기가 폭발을 일으키는 순간, 이준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가 천태자의 분신 앞에 나타났다.
“끝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짙은 구름 불꽃에 둘러싸인 주먹이 그대로 분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이준이 무심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자 천태자의 분신은 그대로 터져버리며 빛의 조각이 되어 사방에 흩날렸다.
흩어지는 빛의 조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이준은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손을 뻗어 빛의 조각을 잡았다. 그리고 빛의 조각이 손에 잡히는 순간, 수많은 정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보와 함께 머릿속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더니 엄청난 빛을 뿜어내며 폭발했고, 이내 빛이 사라지며 완벽한 수련법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설마하니 번개 분신 수련법의 ‘열쇠’가 이런 것이라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하하하!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아주도록 하지!”
이에 이준은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 * *
이준이 사라지고 몇 분 뒤, 공간이 일렁이며 천태자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준의 기척은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네 이놈!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네 목숨을 거두어갈 것이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까만 형상 하나가 몸을 숨긴 채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천태자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의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직접 몸으로 체감한 이준은 그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자마자 곧장 방향을 꺾어 숲속으로 들어간 뒤 천화존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그렇게 수풀에 몸을 숨긴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허공 위에 공간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천태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숲 속을 둘러보다가 분노한 짐승마냥 미친 듯이 포효하며 사방으로 번개를 뿜어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섬광은 몇 백 미터나 되는 범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왜 ‘번개의 아들’이라고 불리는지 능히 이해할 수 있을만한 위력이었다.
미친 사람마냥 번개를 뿜어대며 주위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천태자는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 몸을 돌려 먼 곳으로 사라졌다.
사실 이준이 몸을 숨긴 수풀 주위로도 천태자의 번개가 떨어졌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다 번개를 맞더라도 천화존자의 영혼 에너지가 있으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을 테지만, 겁을 먹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분노한 뇌신의 철퇴가 자신의 머리통 위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천태자가 사라진 뒤에도 이준은 한참동안이나 벌레처럼 그 자리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태자가 정말로 사라진 것을 확신한 이준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숲으로 들어갔다.
이준은 최대한 마수들을 피해 숲을 달려 나갔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선 최대한 빨리 마수의 숨통을 끊었다. 혹여 마수의 비명소리라도 새어나간다면 천태자가 돌아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숲 속을 가로지르다 보니 눈 앞에 날카로운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산봉우리에서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은 이준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도망을 다닌 탓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