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화. 천태자
“이번에 피의 못에 들어가기 위해 찾아오는 단웅도 검법에 통달해서 웬만한 장로들에게도 지지 않는다지. 젊은 세대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라던데…….”
“에이, 그래도 요즘 유명한 이준이란 녀석한텐 안 될 걸? 그 사람들말고도 중주에는 숨은 강자들이 워낙 많아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남자가 킥킥대며 말했다.
“이준? 풍뢰북각의 심운을 죽이고 나머지 장로들을 처리했다는 그 정체불명의 강자말이야?”
“너희들이 천북성에서 있었던 그 전투를 못 봐서 그래. 아주 죽여줬다고. 겉모습은 20살 정도로 보였는게 실력이 어마어마한 거야. 풍뢰북각의 세 투종 강자를 혼자서 상대하고 홍씨 가문의 원로인 홍천효를 시체로 만들어버렸지. 그 녀석에 비하면 봉씨 아가씨나 단웅 같은 녀석들도 별 거 아닐 걸.”
“글쎄, 그렇게 단언할 순 없지. 이준이란 사람이 강한 건 맞지만 봉씨 아가씨나 단웅도 그에 못지 않은 강자니까. 그 이준이란 녀석도 사람들이 모르는 비술을 써서 강제로 힘을 끌어 올린 거 아닐까? 아니면 어떻게 그 나이에 투종 강자 셋을 상대하겠어?”
“……”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이준은 반사적으로 저장 반지 안에서 모자가 달린 커다란 망토를 꺼내 들었다. 풍뢰각의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정체가 밝혀져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을만한 것은 다 들었다고 생각한 이준은 피의 못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온 몸에 눈을 뒤집어쓴 듯 새하얀 사내 하나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내의 등장에 소란스럽던 2층에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찮은 기운은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신비한 사내의 얼굴은 어려 보였지만 머리는 완전히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있어 얼핏 보면 노인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새하얀 머리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새하얀 눈동자였다. 백발에 새하얀 눈동자로도 모자라 사내는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사내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창가 쪽으로 걸어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정체불명의 신비한 사내는 이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런 사람과 알고 지낸 적은 없었다. 아니, 이런 특이한 사람이라면 아는 사이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한번 마주치기만 했더라도 절대로 잊지 못 했을 것이다.
“이준, 조심하거라. 아주 무서운 힘을 가진 놈이야!”
그 때, 천화존자의 목소리가 이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에 술잔을 잡은 이준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천화존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 사내의 실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 공간이 제 것도 아닌 걸요. 편하신 대로 하시죠. 그런데 저는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편히 계세요.”
“풍뢰북각 세 장로의 번개의 진도 무서워하지 않던 친구인데, 제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죠?”
사내의 한마디에 2층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으로 향했다.
“저… 저 사람이 이준이란 말이야?”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정체를 밝히시죠.”
“하하.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사실 당신에게 받고 싶은 물건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악의는 없습니다.”
은색 망토의 남자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뭐죠?”
이준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천천히 염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의 표정과 말투는 친절하고 온화하기 짝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속에서 적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번개의 분신입니다.”
사내의 답변에 이준은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신 풍뢰북각 사람인가요?”
“사람들은 저를 번개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잔에 갖다 대자 잔 안에 담긴 술 위로 은빛의 전광이 흘렀다.
“번개의 아들이면 혹시 천태자? 풍뢰북각의 각주 아니야?”
그의 한 마디에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천태자’ 비천이야.”
풍뢰북각 각주라는 말이 귓구멍에 꽂히는 순간, 이준은 반사적으로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이런, 성질이 급한 친구로군.”
비천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뻗자, 눈부신 번개 빛이 폭발하며 검은 송곳을 막아섰다.
“흥.”
이를 본 이준은 콧방귀를 뀌며 청록색 불꽃을 쏟아냈다.
검은 송곳 위에 청록색의 화염이 불타오르자, 번개와 화염이 뒤엉키다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진짜 천지의 불꽃이군. 하지만 이런 불꽃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천태자’ 비천이 놀란 표정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천지의 불꽃이 상대의 번개를 압도하지 못 하는 모습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검을 수거해 창밖으로 몸을 던진 뒤 곧바로 등 뒤에 날개를 펼쳐 빛의 속도로 도시 밖을 향해 날아갔다. 눈앞의 사내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강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번개의 움직임이야!”
하지만 비천은 상대를 곧장 쫓아가지 않고 느긋하게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잔을 비운 그가 가볍게 발을 내딛자, 그의 몸이 귀신처럼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천태자까지 사라지자 적막에 휩싸였던 2층이 다시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회복했다. 사람들은 모두 전설속의 괴물을 직접 봤다는 것과, 그가 이준을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섰다는 사실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멍하니 서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정말 큰일 났네. 천태자는 몇 년 전에 이미 8성 투종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천태자를 움직이게 만들다니, 이준이란 녀석도 정말 대단하군.”
이준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해골성을 빠져나와 도시 밖에 위치한 산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저 늙은이가 도대체 어떻게 날 찾아낸 거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넓은 중주 북쪽 지역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마치 자신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설마 어제 도시로 들어갈 때 풍뢰각 사람들에게 발각이라도 됐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이곳은 풍뢰각의 세력 범위를 벗어난 곳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풍뢰북각으로 정보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저 늙은이의 실력은 적게 잡아도 8성 투종이야. 천화존자 선생님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화련이 없으면 대적할 수 없을 텐데…….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나를 찾은 거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이준의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의 염력으로 청연의 불꽃의 열기를 상쇄할 정도의 괴물이었다. 만일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면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설마……. 정말 추격을 포기한 건가?”
정신없이 몇 십 분을 날던 이준은 추격해오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도망치지 못할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바로 그 때, 앞쪽에서 섬뜩할 정도의 에너지가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니 가까운 산의 정상 위에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새하얀 점 하나가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지?”
“아주 제법이군. 투황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속도야. 하지만 이 노부와 속도로 승부를 보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네.”
천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준은 상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사방을 훑어보며 달아날 길을 찾았다.
“번개의 분신을 돌려주게.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수련조차 못할 물건을 가지고 있어 뭐에 쓰려고.”
천태자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번개의 분신을 돌려주면 절 놔줄 겁니까?”
천태자가 가볍게 웃으며 발을 옮기자, 저 멀리 있던 새하얀 점이 갑자기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속도라면 이준 역시 자신이 있었지만, 천태자의 움직임에 비하면 자신의 속도는 굼벵이가 기어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으음, 글쎄……. 아까 보니 자네의 불꽃이 상당히 독특하던데,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는 두 개의 불꽃을 합쳐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 비결을 알려주면 놓아주도록 하겠네.”
천태자의 말을 들은 이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졌다.
이준이 오늘 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스승이 물려준 수련법인 ‘불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빼앗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상대가 풍뢰각 사람이라면 더더욱 넘겨줄 수 없었다.
“네 몸에 아주 고강한 영혼체가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희미하지만 그 존재가 느껴지는구나. 허나 영혼체는 그저 영혼체에 불과할 뿐. 그가 실체였다면 나라해도 함부로 손을 쓰지는 못 하겠지만……. 허니 허튼 생각하지 말고 번개의 분신을 넘기게. 가능하다면 어떻게 천지의 불꽃을 융합했는지도 알려줬으면 좋겠군.”
천태자의 말투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흥, 기세가 아주 등등하구나. 만약 내가 실체였다면 네 놈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바로 그 때, 새하얀 저장반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천화존자의 영혼체가 나타났다.
영혼체에게서 느껴지는 비범한 에너지에 시종일관 웃음을 짓고 있던 비천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상대가 투존 강자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해도 육체가 없는 이상 자신의 앞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생전에는 투존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저 영혼체에 불과할 뿐.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천태자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천화존자는 분노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봤다.
“감히 8성 투종 따위가……. 네 놈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줄 알고는 있느냐?”
말을 마친 천화존자는 차갑게 웃으며 이준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먼저 가시게나. 내가 놈을 막도록 하지.”
이에 이준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화존자를 바라봤다.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해도 영혼체 상태로 8성 투종과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잠깐 발목을 잡아둘 생각이니 안심하고 도망치게. 자네 저장반지에 내가 남겨둔 영혼의 각인이 있어 어딜 가도 찾아갈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천화존자는 마치 이준의 마음을 읽은 것 마냥 이준이 원하던 대답을 해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뼈 날개를 펼쳐 전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준이 도망가는 것을 본 천태자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돌연 눈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제대로 힘을 써보겠구나.”
곧이어 천화존자의 그림자가 천천히 천태자의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혼체가 가볍게 손을 뻗자, 영혼의 힘이 응집되며 텅 빈 허공에서 장검 하나가 솟아났다.
“네 놈이 무슨 수를 쓰든 저놈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천태자는 차갑게 웃으며 몸속에서 번개를 뿜어대기 시작했고, 마치 그의 힘에 호응하듯 하늘에 떠있는 구름들이 어둡게 물들며 번개가 내리쳤다.
천태자가 손을 뻗자, 섬광이 번쩍이며 그의 손 위에 번개로 만들어진 장창하나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번개의 아들’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천화존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볍게 검을 휘두를 뿐 이었다. 영혼체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공간이 물결치듯 흔들리며 거대한 무형의 에너지가 쏘아져 나갔다.
챙!
천화존자와 천태자, 두 사람의 힘이 맞부딪히자 귀청을 찢을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온 산맥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