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피의 못
이준이 손가락을 튕겨 요괴를 소환해 족자를 그에게 던지자, 요괴가 곧바로 네 개의 두루마리를 펼쳐보였다.
펑! 펑! 펑!
역시나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요괴의 몸을 세차게 후려쳤다.
“역시…….”
이준은 피식 웃으며 은색의 두루마리 안으로 영혼 에너지를 밀어 넣었다.
풍․뢰․전 세 장로가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 안에도 심운이 가지고 있던 족자 속 의 공간과 거의 똑같았고, 아래쪽에는 번개가 흐르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영혼의 힘을 이용해 벼락을 밀어내자, 깨끗한 호수의 표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십여 분 동안 정신을 집중해 수면 위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음에도 도저히 수련법을 알 수가 없었다.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네 개의 두루마리가 전부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수련법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보물 상자를 얻었지만 열쇠가 없는 느낌이었다.
“열쇠라…….”
호수 위에 뜬 신비로운 글자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련 방법으로 바뀌게 하는 열쇠가 무엇인지 도통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 역시 풍뢰각의 극비 정보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휴. 젠장…….”
이준은 이를 갈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고생 끝에 겨우 얻어낸 2격 무투기인데, 모든 두루마리를 모았음에도 수련할 수 없다니……. 답답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끝까지 짜증나게 하는군. 망할 놈들.”
결국 이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번개 분신’의 수련법을 다시 저장 반지 안에 넣어두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일단 풍뢰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니까 공간 통로가 있는 도시를 찾아 봐야겠어……. 일단 풍뢰각의 세력 범위만 벗어나면 천화존자 선생님의 몸도 만들 수 있겠지.”
계획을 모두 세웠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해골성은 천북성보다 결코 작지 않은 도시로, 천북성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풍뢰각의 세력 범위를 간신히 벗어나는 곳이었다.
‘해골성’의 지배자는 ‘해골문’이라는 세력으로, 그 아래로 꽤 많은 세력이 존재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감히 해골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 했다. 게다가 해골문은 현명하게도 이익을 독식하지 않고 다른 세력과 공존하는 법을 아는 세력이었으니, 굳이 다른 세력들도 그들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해골문이 다루는 것은 주로 특이한 물 속성의 무투기로,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몸 속으로 공격을 침투시켜 제대로 한 방 먹이면 온 몸의 뼈를 물렁하게 연화(軟化)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도시는 이준이 천북성을 떠나 처음으로 마주친 성이기도 했다. 이준은 풍․뢰․전 세 장로와의 일전 이후 계속해서 깊은 산골짜기의 길을 따라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주 지역의 지리를 잘 몰라 장담하기는 어려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점점 풍뢰각의 세력권을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 해골성에 가면 우선 지도부터 하나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천화존자의 영혼의 힘을 제거할 수 있는 약재인 ‘청혼단’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재를 구해야 했다.
해골성 내부는 온통 옅은 백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얼핏 보면 뼈다귀를 쌓아 만들어 놓은 도시처럼 보였다. 왜 ‘해골성’이라는 섬뜩한 이름이 붙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도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했다. 성 안은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고요한 숲 길만을 택해 이동해왔던 이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파에 적응이 안 돼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이준은 곧바로 중주 북쪽 지역의 지도를 구하기 위해 지도 전문 판매점을 찾았다. 내부에 여러 지도들이 가득 쌓여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 판매점에 들어가니 지금도 가한제국에 있을 오래된 친구가 생각났다. 예전에 가한제국에서 동해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이런 지도 상점이었다. 그 곳에서 정화의 불꽃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 조각을 찾기도 했다.
정화의 불꽃을 생각하자, 이준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한조각 밖에 남지 않았지만, 네 번째 지도 조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구할 수 없었다. 정화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 무려 세 번째에 위치한 불꽃으로, 스승인 약로조차 이름만 들어본 정도의 신비로운 보물이었다. 만일 그 불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투종이 아니라 투존도 꿈이 아닐 것 같았다.
이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선 상점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상점 안에는 독특한 분위기의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실력은 무투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기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노인이었다.
“이봐 친구, 어떤 지도를 찾는 겐가?”
이준이 걸어오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완전한 북쪽 지역 지도요.”
이준은 대답하는 내내 상점 곳곳에 쌓인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먼지 쌓인 지도를 볼 때마다 가한제국내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오오, 북쪽 지역 지도는 우리 가게에서 만든 게 가장 자세하지. 3만 골드만 받겠네.”
노인이 서랍장에서 예쁘게 잘 말린 두루마리를 꺼내 이준에게 건네며 말했다.
“3만 골드라니…….”
완전히 바가지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도도 없이 이 넓은 중주를 헤집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도가 제법 상세하게 제작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대충 만들어진 지도에 3만 골드를 내놓으라고 했다면 아무리 돈이 아쉬울 일 없는 연금술사라 해도 적잖이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이준은 군말 없이 골드를 지불한 뒤 곧바로 뒤돌아 상점을 나가려 했다.
“껄껄껄. 잠시만 기다리게나.”
“뭐죠?”
“이 동네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해골성 사람이 아닌 게지? 자네도 천목산의 피의 못 때문에 왔는가?”
“천목산은 뭐고 피의 못은 대체 뭐죠?”
사실 ‘천목산’과 ‘피의 못’은 제법 귀에 익은 단어였다. 도시에 들어온 이후로 길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도시 어딜 가나 ‘피의 못’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대니 호기심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준의 반응에 노인이 오히려 당황한 듯 되물었다.
“자네 정말 천목산과 피의 못을 모른단 말인가?”
“제가 북쪽 지역에 온지 얼마 안 돼서 아는 게 많이 없어요. 혹시 그게 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준은 골드 주머니를 매대 위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런, 중주 북부출신이 아닌가보지? 천목산과 피의 못은 아주 유명한 곳이네. 중주 북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 삼 년에 한 번씩 산 꼭대기의 화산 입구에서 천지 에너지의 조석(潮汐)이 일어나는데, 조석이 지나고 나면 화산 입구의 산의 못에서 기이한 붉은 액체가 흘러 나온다네. 그걸 피의 못이라 부르지. 피의 못은 5일 정도 뒤면 모두 사라져 버리네.”
노인이 골드를 챙기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 피의 못이라는 게 투황 최고 계급 강자들이 투종 단계에 이르는 것을 도와준다고 하더군. 게다가 투종 강자도 그 속에 들어가면 육신이 강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하고 말이야. 어찌됐든 피의 못의 효과가 워낙 신기하니 3년에 한 번씩 그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그리고 다음 달이 바로 그 날이네. 그래서 요즘 셀 수 없이 많은 인파들이 천목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 허허. 그런데 천목산이 워낙 넓고 상급 마수도 많아서 말이야. 산세도 험준한 데다가 안개도 자욱해 길 찾기가 어렵지. 자네가 관심이 있다면 여기서 천목산 지도도 하나 줄까? 4만 골드밖에 하지 않네. 지도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꼭대기에 도착하지 않겠나.”
이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한 게 모두 천목산 지도를 팔기 위함이라니……. 정보를 제공하고 돈을 받고 지도까지 팔다니, 장사 수완이 아주 대단한 노인이었다.
게다가 때 마침 이준도 9성 투황 단계에 접어 들어 곧 있으면 투종 승급을 준비해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투종이 되야 하는 이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네. 피의 못이 좋긴 하지만 딱 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거든. 그러니까 늦게 도착하면 빈손으로 돌아와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네.”
이준이 지도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듯하자 노인이 잽싸게 다른 정보를 알려주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장사 수완이 대단한 노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신이 나서 달려가 지도 한 장을 꺼내 왔다.
지도를 받은 이준은 곧바로 4만 골드를 지불하고 지도를 저장 반지 안에 넣었다.
이제 청혼단을 만들기 위한 약재를 찾아볼 차례였다.
하지만 해골성안의 약재상을 모두 뒤져도 필요한 약재를 구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해골성 곳곳을 돌아다니던 이준의 귓가에 또 다시 피의 못에대한 얘기가 들려왔다. 노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다음 달에 피의 못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준은 우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성 안에 위치한 작은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하루만 묵고 내일 바로 출발해야겠어. 정말 피의 못에 들어간 10명 중 한 명이 된다면 투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투종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뜨거워지는 이준이었다.
* * *
숙소에서 하루를 묵은 이준은 날이 밝자마자 간단히 정리를 끝낸 뒤 방 밖으로 나가 숙소의 2층으로 향했다.
숙소 2층은 온통 사람들로 가득해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낯선 곳에서 정보를 얻기에는 이런 곳이 적격이었다. 이준은 청주 한 잔을 주문한 뒤 홀로 술잔을 홀짝이며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금 해골성을 찾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피의 못’이 목적이었다. 자리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의 못’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풍뢰각이랑 만검객, 그리고 다른 일류 세력들도 모두 정예들을 데리고 천목산을 오른다고 하더군. 그 놈들도 피의 못이 탐나는 거겠지.”
“제길. 그 놈들이 있으면 열 자리 중 내가 들어갈 곳이 더 적어지는 거 아니야……. 피의 못에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실력 없고 뒷배 없으면 별 수 있나. 괜히 가서 고생만 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들은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만일 피의 못에 들어가려다 풍뢰각의 강자들과 마주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중주 네 각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사각천’이라는 시합을 열잖아. 거기 참가자들은 당연히 풍뢰각 내에서도 내로라 하는 뛰어난 친구들이고. 풍뢰각과 만검객 같은 막강한 세력에서도 천목산을 노리는데……. 황천각이나 성운각에서는 어쩌려나? 늙어빠진 노친네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젊은 친구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거기서 몸만 좀 담가도 뼈가 단단해지고, 실력도 강해지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사각천과 피의 못이 열리는 시기가 겹치니까 풍뢰각의 젊은 강자들이 모두 그 곳에 몰리지 않겠어?”
“풍뢰각의 아가씨가 그렇게 실력이 대단하다며. 심지어 동각의 각주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만검객도 풍뢰각 못지않은 세력이니까……. 이번 피의 못은 아주 볼만 하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