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단풍산
십분 정도가 지나자, 심운이 자폭하며 만들어 진 폭풍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준은 여전히 눈을 감고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광풍이 쓸고 간 자리에는 계속해서 모래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고, 푸릇푸릇한 숲은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였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 폭풍마저 천천히 흩어지자, 공중에 있던 이준은 살며시 눈을 떠 아래를 바라보다 심운이 자폭을 일으킨 장소로 내려갔다.
심운이 폭사한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 이준이 돌연 몸을 날려 주위에 있던 앙상한 나무 하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영혼 하나가 튀어나왔다.
“심 장로님도 머리를 좀 쓰셨군요. 신체를 자폭 시켜놓고 영혼만 도망을 가려하다니.”
“이준, 제발, 제발 이러지 말게. 대화로 하세. 이런 식으로 풍뢰각과 등을 돌려 자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준에 손에 붙잡힌 심운의 영혼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로님께서 일을 키우시지 않았습니까.”
“이 개자식! 풍뢰각에서 절대 널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넌 이제……!”
콰직!
이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움켜 쥐자, 심운의 영혼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이는 심운이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음을 의미했다.
* * *
“애원도, 거래도 통하지 않는다라……. 참으로 무서운 젊은이구나.”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감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한설의 실력으로는 이준이 있는 곳의 상황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눈을 깜빡이며 노인의 말에 기대어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귀찮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조치를 취한 것 뿐이죠.”
바로 그 때, 이준이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의 곁에 나타났다.
“이준!”
이준을 발견한 한설은 만면에 화색을 띄며 소리를 질렀지만,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이준의 앞을 막아섰다. 이준이 심운을 상대하는 모습만 본 그로써는 도저히 그가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준은 노인이 왜 자신의 앞을 막아섰는지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노인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한씨 가문을 지켜준 은인에게 할 만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눈 앞에선 사내는 조금 전 냉혹하게 심운의 영혼을 박살낸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비라고 하네.”
“이준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네.”
이준의 예의바른 태도에 더욱 민망해진 한비는 손을 저으며 웃은 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이제 홍천효가 오늘 일을 온 천북성 안에 떠벌리고 다닐걸세. 그럼 풍뢰각 녀석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조심하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홍천효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이제 곧 천화존자에게 빌린 힘이 사라질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그래, 알아서 잘 할 거라 생각하고 더는 말하지 않겠네. 오늘은 이쯤에서 인사하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고.”
이 곳에서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비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자리를 뜨려했다.
이준 역시 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더 붙잡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조심해.”
“너도 몸 조심해.”
하지만 한설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조심하라는 말을 건넨 뒤 한참을 망설이다 한비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 * *
두 사람과 헤어진 이준은 잠시 몸을 숨기고 황금단을 복용할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새파란 하늘 위를 날아 아래를 굽어보자, 끝없이 이어진 산등성이 사이로 유난히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산 하나가 보였다.
산봉우리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경사가 깎아놓은 듯 가파른 탓에 마수들이라 해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에 이준은 천천히 날개를 펄럭여 칼날 같은 산봉우리의 정상으로 향했다.
산꼭대기에 내려앉은 이준은 곧바로 적당한 넓이의 바위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자리를 잡은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시간 정도 정신을 집중하고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자, 창백하던 얼굴에도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몸이 튼튼해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내 영혼의 힘을 못 버텼을 거야.”
이준이 눈을 뜨기 무섭게 천화존자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소천화 선생님은 어느 정도 회복 되셨나요?”
“8성 투종 정도인 듯 하네.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지겠지. 다시 투존 계급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영혼과 딱 맞는 육체가 있어야 하니까.”
말을 마친 천화존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래도 오늘보니 그 문제도 자네가 곧 해결해줄 것 같군. 나는 가만히 기다리겠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기꺼이 투종 강자와 싸움을 벌이는 이준의 모습을 보고 천화존자는 상대가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육체를 사용하는 건 효과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니 새로 만들어내는 게 좋겠죠.”
약로의 말에 따르면, 재료만 잘 구한다면 육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과거의 이준을 기준으로 한 것 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의 연금술 실력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천화존자의 그릇이 되어줄 육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도 자네가 알아서 하게.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천화존자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가장 뛰어난 육체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지.”
천화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준이라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재능에 뛰어난 머리, 나이답지 않은 인내심과 결단력에 은혜를 아는 인품까지,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어도 제일 중요한 건 내 스스로 힘을 기르는 거겠지. 매번 남의 손을 빌릴 순 없으니까.’
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움직여 녹색 옥병 하나를 꺼냈다. 병 입구를 기울이자 작은 연금비약 한 알이 굴러 나왔다. 순간적으로 진한 약향이 퍼져나가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이준이 만들어낸 황금단 중에서도 가장 품질이 뛰어난 것이었다.
황금단은 투황 강자가 1성에서 2성까지의 실력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황금단을 복용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일도 흔했으니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평생 단 한 알만 먹을 수 있는 연금비약인만큼 한알을 먹고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점이었다.
황금단을 손바닥 위에 두고 천천히 굴려보던 이준은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입 안으로 연금 비약을 던져 넣었다.
황금단이 목구멍을 지나자, 뜨거운 약 기운이 요동치며 그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약 기운이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온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 이준은 잽싸게 청연의 불꽃을 사용해 황금단의 거대한 에너지를 감싼 뒤 불개의 수련 경로에 따라 그 에너지를 운반했다.
곧이어 이준의 몸 주위에서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더니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에너지 회오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지의 불꽃 덕분에 연금비약 안에 담긴 방대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은 이준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황금단은 이준에게도 제법 부담스러운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허둥지둥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편안하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연금비약이 이준의 실력을 올려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이준이 수련 상태에 돌입하자, 산봉우리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 앉았다.
그의 곁에는 햇볕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을 내는 은색 요괴가 주인을 지키고 서 있었다.
* * *
단풍산은 중주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중 하나였다. 산 위에 풍뢰북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뢰각은 동서남북 네 각으로 나뉘어졌다.
네 개의 조직 중 가장 강한 동각에 비해 나머지 세 조직의 실력이 조금 모자라기는 했으나, 네 각이 함께 힘을 모으면 중주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만한 힘을 자랑했다. 게다가 동각을 제외한 서각, 남각, 북각 역시 그 일대를 지배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풍산의 산세는 깎아지른 듯 험준했고, 산봉우리 위는 온통 안개로 뒤덮여 마치 신선이라도 살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중주 북부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북뢰탑’이 놓여 있었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우뚝 서 있는 ‘북뢰탑’은 마치 번개가 굳어져 만들어진 것처럼 눈부신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북뢰탑은 풍뢰북각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은 자만이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곳 이었다.
북뢰탑의 최고층은 드넓은 궁전이었고, 그 안에는 몇 몇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운 장로가 만든 영혼의 비석이 이미 깨져버렸소.”
궁전 중앙에는 은색 왕좌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은색의 도복을 입은 노인이 등받이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궁전에 있던 세 노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영혼의 비석 안에는 장로들의 영혼의 각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비석이 깨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바로 그 비석의 주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 뿐이었다.
“중주 북부에 우리 풍뢰북각을 건드릴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들이 있단 말이요? 어떤 세력이요? 만검각 놈들이요?”
눈처럼 하얀 눈썹을 가진 흑의의 노인이 입을 물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네. 운장로가 홍신과 함께 천북성에 가지 않았나? 풍, 뢰, 전 세 장로가 직접 그 곳으로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알아내 주게. 설령 만검각 사람이 그랬다 해도 일단 잡아두고 내게 보고를 올리도록. 그렇지 않으면 그놈들이 우리 풍뢰북각을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네!”
은색 도복을 입은 노인이 명령을 내리자, 세 장로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구름 안개가 자욱한 산봉우리 위 공간이 끊임없이 일렁이며 거대한 천지의 에너지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산봉우리를 가득 메운 천지의 에너지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이준의 몸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황금단을 복용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삼일 내내 이준은 돌부처마냥 꼼짝도 하지 않았고, 산봉우리 위에는 방대한 천지의 에너지가 모여들며 만들어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준의 몸속으로 들어간 황금단의 에너지는 천지의 불꽃을 거쳐 염력으로 변화했고, 대하(大河)와도 같이 요동치며 끊임없이 그의 온 몸 구석구석을 타고 흘렀다.
이와 더불어 산봉우리에 가득 찬 천지의 에너지가 담금질을 거쳐 이준의 염력 회오리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