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7화. 드센 기세
이준은 천천히 눈을 떠 찬란한 은빛을 내는 족자를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2격 상급 무투기인만큼 그리 쉽게 손에 넣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였다. 나머지는 다른 풍운각 장로들에게 얻어내야 했다.
이준은 은색 두루마리를 저장반지 안에 넣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몸 속 피의 각인을 없애는 일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곳으로 가든 풍뢰각의 투사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몸속을 관찰했지만, 한참을 관찰해도 아무런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없을 리가 없어. 내 몸 속에 각인이 들어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에 의문을 느낀 이준은 혈관을 따라 청연의 불꽃을 천천히 이동 시키며 몸 속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져보자, 몸 속 아주 구석진 곳의 혈관에 은색 각인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은색 각인은 영혼의 힘으로도 탐색할 수 없었지만, 천지의 불꽃과 닿자 미세한 빛을 발했다.
“깊이도 숨겨놨군. 게다가 영혼의 힘으로도 찾을 수 없다니……. 천지의 불꽃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추격을 받았겠는걸.”
가만히 관찰해보니, 은색 각인에 번개의 움직임을 사용할 때 뿜어져 나오는 것과 유사한 에너지가 묻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천지의 불꽃을 사용해 혈관을 뜨겁게 달구자, 무시무시한 고온이 은색 각인을 뒤덮었다.
청연의 불꽃을 완전히 길들인 덕분에 혈관안에서 용암 같은 온도의 불꽃이 들끓고 있음에도 고통스럽기보다는 온 몸이 노곤해지면서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각인이 새겨진 곳은 고온으로 인해 비틀리며 붉은 에너지가 새어 나오다가 끝내 깔끔하게 불타 없어졌다.
“피의 각인이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 나네. 천지의 불꽃으로도 이렇게 없애기가 어렵다니…….”
이준은 이화로 인해 점점 옅은 색을 띠는 각인을 보며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났다면 각인을 없애는 것도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각인이 새겨져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이준은 드디어 황금단을 먹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투황강자가 황금단을 복용하면 1성에서 심지어 2성까지의 실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연금비약은 한 사람당 오직 한 알만 먹을 수 있었고, 그 이상은 먹어 봤자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이준은 아직까지 황금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풍뢰각과 마찰이 생긴 이상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올려야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황금단의 힘을 빌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최대한 빨리 투종 단계까지 돌파 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이준은 천지의 불꽃을 몸 속 곳곳으로 흘려보내 빠르게 나머지 각인을 지우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두어 시간 이상 눈을 감고 천지의 불꽃으로 혈관을 달구자, 마침내 몸 안에 숨어있던 모든 각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각인까지 완전히 제거되자, 이준은 비로소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내긴 했네. 이제 슬슬 이동해야겠다!”
바닥에서 일어난 이준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요괴를 저장반지에 넣고 동굴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준이 동굴의 커다란 돌을 막 치우려고 하는 찰나, 바깥쪽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 나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바위를 치우던 손을 멈췄다.
“심운인가?”
하늘 요괴조차 당하지 못 하는 그의 실력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홍천효도 함께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실력으로 투종 두 명을 상대하려면 목숨이 열 개는 되어도 모자랐다.
“허허. 뭔가 곤란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지?”
바로 그 때, 이준의 머릿속에 익숙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천화 선생님이세요?”
* * *
푸른 하늘 위에는 십여 개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오가며 산맥을 샅샅이 두지고 있었다.
“심운 장로, 분명히 그 놈에게 피의 각인을 새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붉은 도복을 입은 노인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에 심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갈며 발아래 펼쳐진 숲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는 길에 피의 각인의 연결 신호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투황에 불과한 이준이 자신의 각인을 지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 놈이 어떤 방법을 써서 내가 새긴 각인을 없앤 것 같습니다.”
심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가득했다. 설령 투종 강자라 해도 자신이 새긴 피의 각인을 이리 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헌데 투황에 불과한 애송이가 어떻게 반나절도 되지 않아 자신의 각인을 지울 수 있단 말인가.
“흥, 피의 각인이 있으니 놈이 어딜가도 쫓아갈 수 있을 거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그 놈을 쫓아갔을 것입니다.”
홍천효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가득했다. 각인이 없다면 이준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작 쫓아가기는 무슨. 그 녀석이 데리고 있는 요괴가 무서워서 따라 가기나 했겠습니까?”
심운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홍천효가 눈을 부라리며 벌컥 화를 냈다.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 녀석의 요괴를 무서워 할 리가 없지 않소!”
“그럼 이준이 돌아오면 요괴는 그쪽이 맡아 주시죠.”
이에 심운은 코웃음을 치며 홍천효에게 하늘 요괴를 떠넘긴 뒤 손을 휘저어 홍씨 가문의 투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래로 내려가 샅샅이 뒤져라. 그 녀석은 분명 아직 이 산 속에 숨어 있을 거야. 멀리 도망 갔을 리가 없어.”
심운의 명령에 공중에 떠 있던 열댓 명 강자들은 말없이 홍천효를 바라봤다. 그들은 홍천효를 따라온 것이지, 심운을 따라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
“네!”
홍씨 가문 사람들이 홍천효의 명에 따라 산을 뒤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숲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 개의 그림자 중 하나는 바로 한율의 동생인 ‘한설’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하얀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저 사람들이 이준을 찾을 수 있을까요?
“흐음……. 모르겠구나. 네가 하도 애걸복걸하니 같이 오기는 했다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신분이 발각되지 않는 선에서만 저 젊은이를 도와줄 수 있다. 홍천효는 그렇다 쳐도 심운은 풍뢰각 사람이니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엄숙한 말투로 답했다.
“사실 이것도 아주 위험한 짓이야. 하지만 그 젊은이가 우리 한씨 가문을 위해 싸우다 화를 당한 것이라 온 것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칫 풍뢰각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일에 끼어들지 않았을 게다.”
노인의 말에 한설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할아버지는 나중에 상황을 보고 도와주세요.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잔뜩 풀이 죽어 눈물을 흘리는 한설의 모습에 노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휴우……. 거참, 우리 설이가 아주 잘 커줬구나. 네 말이 맞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금수나 다름없지. 하지만 은혜를 갚다가 우리 가문이 멸망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느냐. 사정이 허락한다면 이 할애비가 그 이준이라는 청년을 꼭 도와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노인의 말을 듣고 한설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 때, 멀리 있는 산 한쪽에서 돌연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 * *
“흥, 쥐새끼처럼 산굴에 숨어 있다고 내가 너를 찾지 못 할 줄 알았느냐!”
동굴에서 걸어 나오는 청년을 발견한 심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을 많이도 데려 오셨네요. 정말 화가 나셨나 봅니다.”
하지만 이준은 겁을 먹기는커녕 싱글벙글 웃으며 상대를 조롱했다.
“네 이놈! 어디 사지가 찢어져도 입을 놀리나 보자!”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운이 노발대발하며 삿대질을 해댔다. 이준에 의해 손가락이 잘린 것도 분했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풍뢰각의 장로가 새파랗게 어린 투황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이었다. 이에 심운은 이준을 죽여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준은 이번에도 여유만만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반지에서 하늘 요괴를 꺼낼 뿐 이었다.
“정신 나간 자식. 설마하니 그 요괴가 투종 둘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홍천효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아까 내 앞에서 한 얘기가 있으니 요괴는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이준 저 녀석은 제가 상대 하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 하늘요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심운은 곧바로 홍천효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에 홍천효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저 정체 모를 은빛 요괴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뱉은 말이 있으니 이제 와서 발을 빼기도 민망했기 때문이다.
“대신 저 건방진 애송이를 확실히 죽여 버리시오.”
두 노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이준은 또 다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죽여!”
이준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은빛 요괴가 화살처럼 홍천효에게 돌진했다.
“흥. 그래, 네 요괴가 대체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보자!”
홍천효가 팔을 휘두르자, 붉은 염력이 몸 밖으로 폭발하듯 쏟아지더니 이내 몇 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붉은 대검이 나타났다.
챙!
하지만 요괴는 가볍게 손을 들어 홍천효의 검을 막아냈다. 붉은 대검과 강철과도 같은 은빛 요괴의 팔뚝이 맞부딪히자, 마치 두 개의 금속이 맞부딪힌 것처럼 불똥이 튀었다.
이에 홍천효는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가 요괴를 붙잡고 있는 사이, 심운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이준에게 다가갔다.
“감히 내 손가락을 잘라? 네 놈을 죽이기 전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주마!”
이에 이준은 잽싸게 발을 굴러 거대한 나무 위로 날아오르며 속으로 천화존자의 이름을 불렀다.
‘소천화 선생님, 힘을 좀 빌려주세요.’
그 순간, 그의 손에 끼워진 하얀 반지가 부르르 떨리더니 거대한 영혼의 힘이 손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거대한 영혼의 힘이 혈관을 타고 흐르자, 공기가 일그러지며 허공 위에 물결 같은 파문이 일었다.
갑작스레 폭발한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에 심운은 물론이고 한씨 가문 사람들과 홍천효마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설과 함께 이준을 탈출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인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굳이 올 필요 없었던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