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미친 짓
단숨에 홍씨 가문의 투황을 불구로 만들어버린 이준은 그대로 뒤를 돌아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홍씨 가문의 강자들을 바라봤다.
부상을 입어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홍씨 가문의 강자들은 사지를 덜덜 떨면서도 다급히 저장 반지 안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상대의 눈빛에서 감출 수 없는 살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으니,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쥐기 무섭게 검은 송곳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어 또 한 명의 투황 강자를 후려쳤고,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그의 몸이 저 멀리 천석대 구석까지 날아갔다.
또 한 명의 투황 강자를 처리한 이준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다음 사냥감을 바라봤다.
한철은 이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온 몸의 털이 삐죽 곤두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 온화하고 예의 바른 청년과 지금 눈앞에 선 잔인한 학살자가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이준은 이미 자신과 홍씨 가문의 관계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홍씨 가문이 다시는 자신에게 덤벼들 생각을 품지 못 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버리는 편이 나았다. 어줍잖은 동정심이나 인정을 베풀었다가는 언제 자신의 등 뒤로 칼이 날아들지 몰랐다.
쾅!
검은 송곳이 마지막 남은 홍씨 가문 강자의 몸을 후려치자, 이준은 상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생각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홍익을 노려봤다.
걸레짝처럼 찢어져 너덜거리리는 홍익의 도복 사이로 언뜻 단단한 가죽 갑옷이 드러났다.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했다. 그가 화련에 맞고도 살아남은 것 역시 모두 갑옷 덕인 듯했다.
그는 원망에 찬 표정으로 독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홍씨 가문의 강자들을 하나하나 살해하고 있는 이준을 노려봤다.
“이준, 네 놈이 계속 우리 홍씨 가문 사람들을 죽인다면 우리 가문의 모든 투사들이 죽을 때까지 네 놈을 쫓을 것이다!”
“하……. 그럼 살려주면 안 쫓고요?”
이준의 입가에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가 막 홍익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천석대 한구석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2급 요괴의 주먹이 연달아 심운의 가슴에 내리 꽂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2급 요괴는 무투기나 염력을 사용하지는 못 했지만 육체의 힘만으로 능히 투종 강자를 제압할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괴의 공격에 당한 심운의 입가에서는 이미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심운이 요괴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늘 요괴는 주인의 명에 절대 복종하는 생물이니, 적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 놓기 전까지는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저 쓸모 없는 놈들!’
요괴의 공격에 당해 부상을 입은 심운은 이준의 손에 하나 둘씩 나가 떨어지는 홍씨 가문의 강자들을 보며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홍익, 빨리 홍천효를 부르게. 정말로 홍씨 가문이 이대로 망하는 걸 지켜 보려고 하는가!”
심운의 외침에 홍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악에 받친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 같은 놈. 우리 홍씨 가문 사람들을 죽여 놓고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나!”
홍익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장반지 속에서 새빨간 옥 조각 하나를 꺼내들었다.
쾅!
바로 그 때, 검은 송곳이 춤추듯 움직이며 홍익의 몸을 세차게 가격했다.
이준의 공격에 얻어맞은 홍익의 몸에서는 순간적으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저 멀리 날아가 한참을 구르다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준, 빨리 가야하네. 홍익이 홍씨 가문의 선조를 부른 것 같네! 그 자는 심운보다도 더 강하니 계속 이 자리에 남아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
홍익이 붉은 수정을 부수는 것을 본 한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날아오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석대 상공에 노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우리 홍씨 가문 사람들을 건드리다니,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게로구나!”
살벌한 외침이 벼락처럼 천북성 상공에 울려 퍼지자, 도시 전체가 한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봤다.
“홍천효가 오다니!”
“홍천효는 5성 투종이잖아. 풍뢰북각 심운보다도 더 강한 사람인데, 아무리 요괴가 있어도 투종 강자 두 명을 어떻게 상대해!”
천석대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이준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쥔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실 아라나 천화존자가 곁에 있었더라면 홍씨 가문의 선조 따위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천화존자는 반지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늘 요괴 역시 투종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투종 둘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합쳐 만들어 낸 화련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끌다가 풍뢰북각에서 지원군이 오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정말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판 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겠군.’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하늘 요괴를 회수하려 했지만, 그의 계획을 알아차린 심운이 목숨을 걸고 요괴를 붙들어 두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심운의 행동에 짜증이 난 이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인을 맺자, 2급 요괴의 몸이 눈부신 은빛 광채로 뒤덮이며 더욱 맹렬한 기세로 심운을 공격했다.
심운 역시 온 힘을 다해 요괴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은빛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 때 마다 그의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젠장. 저 요괴는 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육탄전에 이렇게 강한 거야?’
“이준, 서둘러! 시간이 없어, 더 늦으면 큰일 나네!”
그 때, 한철이 다시 한번 이준을 재촉했다.
그 순간, 이준은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 등을 돌려 도망가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에게 붙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에 이준은 잽싸게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홍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강렬한 흡입력이 쏟아져 그의 몸을 이준이 있는 곳까지 끌고 왔다.
“명줄도 질기시네요. 이렇게 했는데도 안 죽다니.”
반쯤 의식을 잃은 홍익은 얼음처럼 싸늘한 이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보아도 부상이 너무 심각한 나머지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이준이 홍익을 붙잡자, 바람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퍼지며 새빨간 도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빠른 속도로 천석대 위로 날아왔다.
“네 이 놈! 당장 홍익을 내려 놓거라. 아니면 네 놈의 육신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천석대 위에 뿌려주마!”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의 등장에 힘겹게 버티고 있던 심운의 얼굴에 곧바로 미소가 번졌다.
쾅!
바로 그 때, 하늘 요괴의 은색 주먹이 또 한번 심운의 팔을 후려쳤다. 무시무시한 괴력에 심운의 입에서는 또 다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네는 심운 아닌가?”
심운을 발견한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은빛 요괴와 그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이 요괴는 저 자식이 데려온 겁니다. 저 놈을 처리하면 요괴도 움직임을 멈출 테니 저 놈을 공격해 주십시오!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홍씨 가문 사람들이 헛된 죽음을 맞이한 꼴이 됩니다!”
심운의 외침을 들은 홍천효의 눈이 곧바로 허공에 떠있는 이준을 향했다.
“네 이 놈, 얌전히 손에 들고 있는 자를 돌려주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노인이 아무리 살기 어린 눈빛으로 호통을 쳐도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심운과 은빛 요괴를 바라볼 뿐 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요괴가 심운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중상은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이준은 시간을 끌어보려 했지만, 노회한 홍천효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할리 없었다. 그 역시 심운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오래 남아 있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우리 홍씨 가문에 도전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다음 순간, 홍천효의 몸이 화살처럼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홍천효를 바라보던 이준의 손이 돌연 홍익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다음 순간, 이준이 돌연 홍익을 홱 날려버리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홍익 몸에 염력을 넣어 놨습니다. 빨리 가서 해결하지 않으시면 곧 폭발할 겁니다.”
쉭!
이준을 향해 돌진하던 홍천효는 잠시 갈등하는 듯하다가 홍익이 날아간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홍천효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이준의 싸늘한 눈빛이 심운에게 향했다. 그 순간 심운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저 멍청한 노인네! 다 죽은 놈은 그냥 곱게 죽게 놔둘 것이지, 어차피 쓸모도 없는 놈을 살리겠다고 가버려?’
심운은 홍천효를 향해 속으로 쉴 새 없이 욕을 퍼부었다. 설마하니 이준이 투종 강자 두 명을 마주한 상황에서 도망을 택하지 않고, 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따돌리고 나머지 한 명을 상대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쾅!
또 한 번 강력한 주먹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심운의 염력이 산산이 흩어지며 그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형상이 그의 등 뒤에 나타나더니 신비한 빛을 내뿜는 조그마한 수정체를 날려 보냈다.
“바다의 힘!”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조금 전 요괴의 공격으로 이미 몸이 성치 않았다. 이에 심운은 빠르게 방향을 돌린 뒤 두 손을 모아 염력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펑—!
웅장한 염력과 조그마한 수정체가 충돌을 일으키는 찰나, 이준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이번에는 심운의 측면에서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다.
“윽!”
바다의 힘을 막아내느라 순간적으로 큰 힘을 썼던 심운은 이준의 주먹을 피하지 못 하고 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 때 요괴가 날아가 심운의 손을 잡더니 반지가 끼워진 심운의 손가락을 그대로 잘라내어 이준에게로 날아갔다.
심운의 저장반지가 이준 손에 들어간 것이다.
“하하! 심운 장로님, 선물 감사합니다!”
저장반지를 손에 넣은 이준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린 뒤 곧바로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 위에서는 이미 붉은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살기로 눈을 번뜩이며 다시 천석대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홍천효의 모습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뼈 날개를 펼쳐 위로 날아올랐다.
“이 개새끼! 우리 풍운각이 널 죽을 때까지 쫓을 것이다!”
손가락을 잃은 심운이 고통으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가 잘려진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피에 염력을 불어넣고 인을 맺자, 돌연 새빨간 핏줄기에 번개의 기운이 서리더니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이준에게로, 또 하나는 남쪽 하늘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