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3화. 괴물
심운의 말에 한철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이준을 바라봤다. 만에 하나 그가 풍뢰각의 무투기를 훔치기라도 했다면 한씨 가문이 아니라 그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됐습니다. 심 장로님께서 2격 신체 무투기를 갑자기 얻게 되셨다면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혼자 수련해보시겠습니까?”
“우연한 기회?”
이준의 대답에 심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10년 전 우리 풍뢰각 장서각에 외부인이 몰래 들어와 많은 무투기를 훔쳤지. 그리고 그 때 도둑 맞은 무투기 중에는 번개의 움직임도 있었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됐다고? 네 놈이 그 도둑놈과 한패인 것이 아니냐?”
심운의 눈은 금방이라도 이준에게 달려들 것처럼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도둑놈이 경매에 내놓은 물건을 뭔지도 모르고 산 사람입니다. 내 죄라면 그 무투기가 도둑맞은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인데, 풍뢰각에서는 그런 것도 문제를 삼는 것 입니까?”
“애송이 녀석, 닥치거라! 감히 심장로 님을 속이려는 것이냐!”
그 순간, 홍익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홍익의 속내는 뻔했다. 심운이 홍신이 다친 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니 이준을 도둑으로 몰아 복수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이 뻔한 수작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홍씨 가문이 두려워 감히 그를 비난하지는 못 했다.
한철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자, 한설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건넸다.
“아버지, 설마 저런 말을 믿고 우리 가문을 도와준 은인을 버리시려는 것은 아니죠?”
이에 한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뒤 다시 한번 심운에게 말을 걸었다.
“심 장로님, 저 청년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이 일은 한씨 가문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번개의 움직임은 결코 외부인에게 전승 되어서는 안 되는 무투기이니, 괜한 일에 휘말리지 말고 가만히 계시지요.”
하지만 심운은 한철의 말을 들어볼 생각조차 없다는 듯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이준을 노려봤다.
“이제 자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네. 첫 째는 나랑 같이 풍뢰북각에 돌아가 각주님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서 내 손에 죽는 것이지.”
심운의 살벌한 한마디에 홍익의 얼굴에는 대번에 웃음이 번졌다.
“심 장로님…….”
“한철, 그만하시오! 이것은 풍뢰각의 문제라고 했을텐데! 더 이상 내 결정에 토를 단다면 나 심운의 이름을 걸고 주제넘게 풍뢰북각의 문제에 끼어든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겠소!”
한철은 이준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상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심운의 결정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한씨 어르신, 이 일은 한씨 가문과 무관한 일이니, 그렇게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이준의 말에 한철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한씨 가문의 가주로서 한씨 가문의 안위를 책임져야 했고, 이준도 이를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한 것이다.
“의리는 있는 녀석이로군.”
한씨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이준의 행동에 심운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이준에게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풍뢰북각으로 가겠나, 아니면 내가 손을 쓰도록 만들 텐가?”
하지만 이준의 대답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풍뢰각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안 가겠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심운 역시 이준의 당돌한 대답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애송이가 뭘 믿고 투기 대륙 최고의 강자들이 모인 중주에서도 내로라 하는 세력인 풍뢰각에게 도전장을 내민단 말인가.
“네, 잘못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죽어야 하네.”
그 순간, 심운의 몸에서 대해와도 같은 거대한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종 강자의 위협적인 한마디에도 이준의 눈빛은 한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 그의 얼굴에는 보일락 말락하게 옅은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글쎄요. 5성 투종도 안 되는 실력으로 저를 죽일 수 있을까요?”
이준의 한 마디는 광장의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오늘 이준이 놀랄 만한 실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4성 최고 단계 투종 강자를 도발할만한 실력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홍신을 폐인으로 만든 원수의 건방진 한마디에 홍씨 가문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감히 풍뢰북각의 장로를 도발했으니,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준의 당돌한 발언에 한철 역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심운의 실력은 한씨 가문의 대장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준의 실력은 동년배 중에는 비길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나이를 떠나 투황 계급 중에서는 그에게 대적할 자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명실상부한 투종 강자였다.
한철의 곁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한설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자신이 이준을 데려와 한씨 가문과 홍씨 가문 일이 끼어들게 하지만 않았어도 번개의 움직임이라는 무투기를 들키지 않았으리란 죄책감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때, 한율이 다가와 조용히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언니…….”
“걱정 하지마. 저 아이는 아무 근거 없이 함부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투종 강자를 상대로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소리겠지.”
한율은 한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녀 역시 내심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심운 장로의 실력은 본원의 대장로인 서천우보다도 한 수 위였고, 이준은 아무리 강해봤자 투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심운이 돌연 폭소를 터뜨렸다. 설마하니 이런 애송이가 자신을 도발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아주 당돌하구나. 좋아, 좋아. 어디 자신감만큼 실력도 대단한지 한번 보지.”
미친 사람마냥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리던 심운의 얼굴에 돌연 살기가 돌았다.
심운의 살기 어린 표정에 한철을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이 덜컥하고 내려 앉았다.
하지만 정작 풍뢰각의 장로를 분노케 한 당사자는 미소까지 머금은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준이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준도 풍뢰각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 앞의 노인과 풍뢰북각에 가는 것 보다는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는 편이 나았다. 일단 그들의 구역에 들어가면 아무리 괴물 같은 실력자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심운은 4성 최고단계의 투종이었으니 만만한 상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준에게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최소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운이 좋다면 상대방을 죽이는 것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준이 계속해서 냉랭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심운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분노한 심운이 가볍게 손가락을 구부리자,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은빛이 새어 나와 손가락 끝에 모여들었다.
“그래, 어디 네가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지 보자꾸나.”
심운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준을 끌어들인 것에 책임을 느낀 한설이 순간적으로 한율의 손을 뿌리치며 이준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설아!”
설아의 돌발 행동에 한철의 얼굴은 완전히 새파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심운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설을 향해 염력을 내뿜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씨 가문과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던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한씨 가문의 사정을 봐 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운의 염력이 막 한설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돌연 거대한 흡입력이 폭발적으로 쏟아지며 그녀의 몸을 끌어 당겼다.
“흥!”
이준이 나서는 것을 본 심운은 콧방귀를 뀌며 은빛 섬광과 함께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이에 이준은 다시 한번 잽싸게 염력을 쏟아내 그녀를 한철에게 날려 보낸 뒤 번개 같은 동작으로 방향을 틀어 심운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그 순간, 이준의 손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오더니 그 안에서 은빛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펑!
갑자기 나타난 은빛 그림자가 심운의 칼날과도 같은 손톱을 향해 주먹을 날리자, 천지를 뒤엎을듯한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단단한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펑!
은색 그림자의 공격에 심운의 몸이 거세게 떨리며 뒤로 날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강렬한 일격에 당황한 심운은 온 몸에서 식은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은빛 형상을 노려봤다.
“누구냐! 감히 풍뢰각의 일을 방해하다니!”
그 순간, 눈을 찌르던 눈부신 은빛 섬광이 천천히 흩어지며 온 몸이 은백색으로 뒤덮인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은빛 형상의 크기는 그리 거대하지 않았으며, 피부는 온통 은색이었다. 텅 빈 두 눈에서는 형형한 은빛 섬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눈을 씻고 바라봐도 시체처럼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요괴란 말인가? 네 놈이 어떻게 이리 강력한 요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냐?”
자신을 막아선 강자가 의식 없는 요괴라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심운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장로님의 실력으로는 저를 어쩌지 못 할 거라고요.”
“네 놈이 투종 계급의 요괴까지 갖고 있을 줄이야. 널 너무 얕보긴 했군…….”
투종급이라는 말에 한씨 가문 사람들은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투종 계급의 요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저 인간을 죽여.”
그 때, 이준의 입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빛 요괴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심운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염력의 도움없이도 투종 강자에 필적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요괴의 모습에 사람들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거침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요괴의 모습에 심운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잠깐의 충돌만으로도 요괴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아무런 통각을 느끼지 못하니 털끝만치도 승산이 없었다.
“홍익 가주. 제가 요괴를 잡아 둘 테니 당신이 저 애송이를 죽여 버리시오. 저 놈만 죽으면 요괴는 알아서 움직임을 멈출 거요. 놈을 죽이면 저 투종 계급의 요괴는 홍씨 가문에게 드리겠소.”
다급해진 심운은 곧바로 홍익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투종급 요괴를 준다는 말에 홍익의 눈빛이 곧바로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직접 저 녀석을 죽여서 아들의 원수를 갚겠소!”
“만일 누군가가 방해한다면 풍뢰각 장로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그 자를 짓밟아주겠다!”
이어지는 심운의 한 마디에 막 움직이려던 한철이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