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결투
가만히 눈을 감고 수련에 몰두하자, 어느새 이틀이 지나 있었다.
그 이틀간 한씨 가문에서는 이준이 요청한 약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해 방으로 보냈다.
약재를 받은 이준은 곧바로 연금비약 제조에 들어갔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도 이준이 있는 방에서 퍼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 * *
적막이 내려앉은 앞뜰에는 장발의 두 여자가 서 있었다.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자, 한율은 지루한 듯 기지개를 펴고는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침착한 한율과 달리 한설은 초조한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 동안이나 방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왜 안 나오지? 오늘이 셋째 날이잖아. 아버지랑 가문 사람들은 벌써 천석대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는데…….”
“조급해할 거 없어. 걱정 마.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애거든.”
항상 냉정하던 동생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본 한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언니, 혹시 무슨 일 생긴 간 아니겠지? 우리가 처음 사막에서 발견했을 때 엄청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단 말이야. 기어 다닐 힘도 없어서 마차에 계속 누워있었다니까.”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 자기 입으로 그러겠다고 한 이상 절대 약속을 어길 애가 아니야.”
삐그덕.
한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며 삼베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선배 늦지는 않았죠? 딱 맞춰 나온다고 나왔는데.”
“응. 딱 맞춰 나왔어.”
이준이 나오자, 온종일 초조해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한설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상처는 좀 어때?”
한설의 질문에 이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거의 다 나았어. 가자. 한씨 어르신이 기다리시겠어.”
* * *
천석대는 천북성 정중앙에 위치한 장소로 얼핏 보기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광장처럼 보였지만, 실은 성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하나의 거대한 암석 덩어리였다.
이 가로 세로 삼백미터 크기의 바위는 천북성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장소 중 하나였다. 성내의 주요 세력들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승부를 겨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천북성의 양대산맥인 홍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전투가 펼쳐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게다가 소식에 따르면 홍씨 가문에서 출전하는 사람이 풍뢰각에서 제자로 받아들인 홍신이라고 하니 기대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천북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홍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홍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이제는 풍뢰북각의 내각 제자까지 되어 있었으니 가히 천북성 최고의 천재 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준도 어릴 때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지 않았더라면 홍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가한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인 운남종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약로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운명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천북성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천석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천석대의 남쪽과 북쪽 양 끝에는 눈에 띄게 화려한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좌석은 천북성의 일부 우두머리 세력들만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천석대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설치되어 있었다.
북쪽 좌석 주위에는 빨간 옷을 입은 채 가슴에 홍씨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시간이 흐르며 천석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천북성 전체에 울릴 정도였다.
그리고 홍씨 가문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 입구로 한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씨 가문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어.”
“한씨 가문에서 홍신을 이길 만한 투사를 데려오면 10년 동안 한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더군.”
“참나. 말이 좋아 약속이지. 천북성 안에 사는 젊은 친구들 중에 홍신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제 천북성은 완전히 홍씨 천하가 되겠구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광장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남쪽 좌석에 자리를 잡자, 한철과 비슷한 연배의 나이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일어나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한씨 가주님 이제 오셨군요. 오늘 싸움을 포기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홍씨 가문이 저희 한씨 가문과 십 년간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있나요.”
“십 년 짜리 평화보다는 두 따님을 저희 가문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앞으로 두 가문은 영원히 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텐데요.”
두 가주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홍신이 벌떡 몸을 일으켜 광장으로 몸을 날렸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시작하죠. 이틀 뒤면 다시 북각으로 돌아가 수련을 해야 합니다.”
홍신이 광장에 서서 한씨 가문 쪽을 바라보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율에게 집중됐다. 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 투황이라고는 그녀 한 명뿐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한율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곁에 서 있던 남루한 차림의 청년 하나를 가리켰다.
“네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 애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율을 향해 몰려있던 시선이 이준에게로 옮겨갔다.
자신과 대결을 벌이는 것이 한율이 아니라는 말에 홍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나지막한 폭음과 함께 이준의 몸이 화살처럼 광장 위로 날아갔다.
“저 녀석은 누구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글세, 천북성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얼핏 봐도 홍신을 이길 만한 사람은 아닌데. 한씨 가문은 대체 무슨 생각인 지 모르겠군.”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가문의 운명이 걸려 있는데 아무나 데리고 왔겠어?”
이준이 광장으로 날아가자, 광장에서는 더욱 큰 소란이 일었다.
북쪽 좌석에 앉아있던 홍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이준을 노려봤다. 가문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외부인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홍익 곁에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작은 탑이 새겨진 은청색의 휘장이 달려 있었다.
“아주 강한 녀석이야. 한씨 가문은 대체 어디서 저런 친구를 데려 온 거지?”
“설마 저 자가 우리 신이를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노인의 한마디에 홍익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아닙니다. 신이는 우리 풍뢰북각 상급 무투기를 대부분 익힌 아이입니다. 동일 계급은 물론 투황 최고 계급 강자를 만나도 이길 수 있으니, 동년배 중 신이보다 강한 아이가 있을 리 없지요. 적어도 이 곳 천북성에는 저 아이의 상대가 될 만 한 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 * *
한편,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광장 위에서는 홍신이 싸늘한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을 대라.”
이준은 상대의 무례하고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웃으며 짐짓 예의바른 말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준이라고 합니다. 홍신 도련님과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딱 열까지만 세주지. 여기서 꺼질지 아니면 쓰레기처럼 너덜거리면서 던져질지 결정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죽고 싶은 모양이군.”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밝은 은색 빛이 터져 나오며 번개로 이루어진 그물이 홍신의 몸을 감쌌다.
“번개 속성 무투기군.”
홍신의 몸을 둘러싼 번개 속성의 염력은 마치 살아있는 은색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홍신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팔목 두께의 은색 섬광이 이준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이 정체모를 놈을 치워버리고 한씨 가문을 집어삼킬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대의 몸에서 돌연 청록색의 화염이 폭발하더니 가볍게 그의 번개를 불살라 버렸다.
“바로 시작하죠. 이런 재미없는 장난 말고요.”
“이 놈이 감히…….”
상대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자존심이 상한 홍신은 곧바로 은빛 섬광을 폭발시키며 이준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손조차 들지 않고 가볍게 왼쪽으로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홍신은 곧바로 주먹을 펼쳤고, 이어 다섯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발톱 모양으로 변해 이준의 어깨를 향해 내리 꽂혔다.
이에 이준은 염력을 두른 손가락 두 개로 홍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제법이군.”
다음 순간, 홍신의 손톱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마침내 그의 손끝에 모여 날카로운 번개 손톱이 만들어져 이준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상대의 손톱에서 쏟아지는 섬뜩한 기운에 놀란 이준은 곧바로 청록색 염력을 뿜어내 홍신의 공격에 맞섰다.
쾅!
묵직한 소리가 울리며 두 사람의 몸이 잠시 멈췄다. 홍신이 다시 한 번 염력을 폭발시키며 손톱을 휘두르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광장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홍신의 광적인 공세에도 이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손을 움직여 몸 앞에 방어막을 세웠다. 지금 그는 영혼의 힘의 도움을 받아 상대의 공격이 아무리 빨라도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막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홍신은 아무리 빠른 속도로 공격을 퍼부어도 이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무수히 많은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계속해서 자신의 공격이 가로 막히자, 시종일관 거만하던 홍신의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하게 변해갔다. 이미 가볍게 상대를 꺾고 한씨 가문을 집어삼키려던 생각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번개 도끼!”
우렁찬 함성소리와 함께 허공을 수놓고 있던 잔상이 하나로 뭉치더니 돌연 이준의 가슴 주위에서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키며 가볍게 뒤로 한걸음을 물러서며 염력을 폭발시켰다.
그 순간,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황의 염력을 느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투황이라고?”
“역시 한율 아가씨보다 강한 자였군!”
“태초의 힘!”
콰아앙!
이준이 염력을 폭발시키며 주먹을 내지르자,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음이 터져 나오며 주변의 괴석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광장을 가득 뒤덮었던 먼지가 걷히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신은 무려 십 미터 가까이 뒤로 밀려나 있었지만, 이준은 불과 두 세 걸음 정도 밖에 뒤로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이 정도 번개로 절 상대하시려는 건가요?”
이준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도발하자, 홍신의 눈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
“너도 7성 투황일 줄이야. 한씨 가문에서 불러 온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날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곧이어 홍신의 몸에서 더욱 많은 번개 줄기가 뻗어 나오며 번개로 이루어진 그물을 형성했다.
“날 밀어냈으니 풍뢰각의 비술을 맛보여주마!”
“뇌신강림!”
다음 순간, 그의 발밑에서 무수히 많은 은색 뱀이 쏟아져 나오며 눈 깜짝 할 사이에 대지를 뒤덮었다.
홍신이 비술을 펼치자, 한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한설과 한율 역시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하지만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